2024년 4월 28일(일)

남이 덧씌운 ‘콩깍지’에서 자유롭도록…’나는니편’ 프로젝트

#1. 하루에도 서른 번 이상 구토를 하는 직장인 A씨.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체중계에 올라섰다. 아이돌 여가수의 식단을 검색하고 그에 맞춰 몇 주간을 거의 굶다시피 했다. 그리고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폭식을 했다. 그 죄책감으로 구토를 하고, 다시 폭식을 했다. 그렇게 이어진 잦은 폭식과 구토는 일상 생활을 어렵게 했다.

#2. 대학생 B씨, 유달리 우월한 미모를 자랑하던 친 언니와 잦은 비교를 당했던 어린 시절 이후 내 노력으로 바꿀 수 있는 건 ‘내 몸’밖에 없다 생각하게 됐다. 살이 찌는 것에 대한 강박이 생겼다. 살쪘다는 주변의 한마디를 들으면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이다.

섭식장애를 겪는 이들의 실제 사례다. 일반인에게 잘 알려진 ‘거식증’ 역시 섭식장애의 하나다. 살이 찌는 것에 대한 강한 두려움으로 음식이나 체중에 집착하는 게 주요 특징이다. 2014년 기준, 우리나라에서 섭식장애로 진료를 받는 이들은 7000여명에 달한다(건강보험심사평가원). 그러나 정신질환으로 인지하지 못하거나 진료를 꺼리는 경우가 많아, 실제 섭식장애를 겪는 이들은 훨씬 더 많다는 지적이다.

‘외모가 곧 능력이고 스펙인 우리 사회가 사람들을 섭식 장애로 내몰고 있는 건 아닐까?’

‘외모 지상주의’가 섭식장애를 만든다는 문제의식에서 시작해 섭식장애를 가진 이들을 돕는 프로젝트가 있다. 2014년 7월, 이화여대 사회공헌 동아리 ‘인액터스’에서 시작한 ‘나는니편’ 프로젝트다. 지난 2년여간 ‘나는니편’ 프로젝트를 통해 섭식장애를 극복했거나 극복 단계를 밟아가는 이들은 100여명에 이른다. 이들이 섭식장애를 가진 이들을 돕기 위해 나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권은정 나는니편 매니저 ⓒ송지원 청년기자 촬영
권은정 나는니편 매니저 ⓒ송지원 청년기자 촬영

“많은 사람들이 섭식장애는 개인적인 문제라고 생각해요. 폭식은 자제력이 부족한 것이고, 음식을 먹지 않는 건 자기 관리가 지나친 정도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러다 보니 섭식장애를 겪는 사람들은 어려움을 이야기할 곳이 없어요. 정신과 진료를 받기엔 장벽이 높고 정해진 치료법도 없고요. 그런데 사실은 우리 사회의 ‘외모 지상주의’가 사람들을 ‘섭식장애’까지 갖게 되도록 내모는 게 아닌가요?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자리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권은정(22·사진) 나는니편 프로젝트 매니저)

‘사회 문제를 해결해보자’며 모였던 팀원 여섯 명 중 한 명도 알고 보니 섭식장애를 앓고 있었다. 함께 알고 지냈던 다른 팀원들도 몰랐던 일이었다. 이후 섭식장애가 무엇인지, 팀 프로젝트를 통해 해결할 수 있을지 두 달여에 걸친 토론과 공부가 시작됐다. 권씨는 “처음에는 ‘섭식장애’라는 주제에 거부감이 있던 팀원들도 알면 알수록 섭식장애를 가진 이들을 위한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 이후 본격적으로 프로그램 구상에 나섰다. 섭식장애인들을 위한 프로젝트, ‘나는니편’이 탄생하게 된 계기다.

‘나는니편’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은 크게 세 가지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섭식장애를 앓고 있는 이들이 모여 서로에게 도움을 얻는 자조 모임이다. 블로그와 페이스북을 통해 참가자를 모집한다. 한 기수당 8명씩, 총 8~10회에 걸쳐 운영된다. “자조 모임 이름이 ‘깐콩모임’이에요. 세상에 콩이 약 1만8000여개 종류가 있다고 해요. 길쭉한 콩도 있고, 울퉁불퉁한 콩도 있는 거죠. 그런데 생긴 게 어떻든 간에 단단하고 건강한 ‘콩’이라는 본질이 중요하잖아요. 누군가가 덧씌워 갑갑하고 불편한 겉모습 ‘콩깍지’에서 힘들어하는 대신, 진정한 내면의 나를 만나자는 취지로 붙인 이름이에요.”

자조 모임에서는 ‘섭식 장애’를 가진 이들이 모여 각자가 가진 어려움이나 감정을 함께 공유한다. 이야기만 나누는 건 아니다. 거식이나 폭식 등의 욕구가 생길 때 어떤 활동으로 대체할 수 있을지도 함께 찾아본다. 자신이 가장 편안하게 느낄 때가 언제인지, 어떤 일에 매력을 느끼는 지 등을 돌아보면서 다른 방식으로 욕구를 풀어낼 활동을 찾기도 한다. 지난 모임에서는 ‘걱정인형 만들기’ 등의 활동을 하기도 했다.

자조모임에서 대체활동 찾기의 일환으로 진행했던 '걱정 인형 만들기' /'나는니편' 제공
자조모임에서 대체활동 찾기의 일환으로 진행했던 ‘걱정 인형 만들기’ ⓒ나는니편

공감을 넘어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하기 위해 ‘치유 릴레이’ 프로그램도 기획했다. 식이장애 전문 클리닉 ‘마음과 마음’과 MOU를 맺어 기존 상담과 치료 가격의 10분의 1 가격으로 상담을 진행한다. 일주일에 2회, 총 16회로 구성했다. 기존 상담 이후 사후 관리가 어려운 점을 보완하기 위해, 한 회는 집단상담으로, 다른 한 회는 자조모임을 통해 상담을 보완한다.

“섭식장애는 혼자서 치료가 어려운 병이에요. 그런데 통원치료를 한다고 하면 한 달에 100~200만원, 입원까지 하면 300~400만원은 금방 들어요. 섭식장애를 앓는 사람들 통계를 분석하면 보통 중•고등학교에서부터 시작해서 평균 6년을 앓거든요. 그런데 정신질환으로 분류돼서 보험도 안돼요. 저희는 최대한 사람들이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상담을 제공해보기로 했어요. ‘마음과 마음’ 에서 취지에 공감해주셔서, 1회에 5만원 수준으로 상담을 책정했어요.”

치유릴레이나 자조모임에 선뜻 참여하기 어려운 이들을 위해 정기적으로 ‘토크 콘서트’도 개최한다. 섭식장애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하고, 함께 이야기하면서 나아질 수 있다는 점을 알린다. 건강한 다이어트에 성공한 개그우먼, 섭식장애 치료 전문 정신과 전문의 등을 초청해 지금까지 5번에 걸친 토크 콘서트를 마련했다. 강연 이후에는 소그룹으로 모여 이야기할 수 있는 자조모임으로 이어진다. 권 씨는 “지금까지 100여명이 여러 프로그램을 통해 ‘나는니편’ 프로젝트를 다녀갔는데 설문을 돌려보면 만족도가 굉장히 높다”고 했다.

토크콘서트
토크콘서트 현장 ⓒ나는니편

“하루에도 30번 이상 구토를 하던 사람이 이제는 스스로 행동을 자각하고 멈출 수 있는 수준까지 갔어요. 그리고 ‘나는니편’ 프로젝트를 통해 상담교육사라는 꿈을 갖게 돼서 평생교육원 심리상담가 과정에 입학한 분도 계시고요. 이런 작은 변화들을 보는 게 팀원들이 프로젝트를 계속 이끌어나가게 만드는 힘인 것 같아요.”

어려움도 있다. ‘섭식장애’를 가진 이들을 ‘양지’로 불러내기가 쉽지 않다는 것. 프로그램을 신청하는 이들에 비해 정작 참가하는 이들은 절반 정도다. 권 씨는 “아무래도 막상 찾아오려면 용기가 필요하다”면서 “그래도 이런 자리가 있다는 걸 알면 힘들 때 찾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니편’은 지난 5월 12일부터 한 달간 텀블벅에서 크라우드 펀딩도 진행했다. 이름하여 ‘콩밭산책 프로젝트’. 내 겉모습 콩깍지를 사회적 압박과 왜곡된 틀에서 바라보는 대신, 진정한 모습으로 만나자는 취지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디자인 스튜디오 ‘Udstudio’와 협력해 귀여운 콩 일러스트를 만들었다. 10주간 스스로의 식사 습관을 돌이켜볼 수 있는 식습관 다이어리나 마음을 돌아보게 하는 문구가 적힌 ‘엽서’등 식습관을 돌이킬 수 있는 제품을 판매했다. 100만원을 목표로 한 프로젝트가 196%를 달성하며 마무리됐다. 권씨는 “‘나는니편’에서는 섭식장애 문제를 알리고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가면서도 조직으로서 수익을 창출하는 길을 계속 고민하는 중”이라고 했다.

치유릴레이 참가자들이 쓰는 식단 일기 ⓒ나는니편

“최근에 치유릴레이 참여자로부터 문자를 받았어요. 섭식장애로 우울증까지 앓던 분이었거든요. ‘죽기 전에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고 하던데, ‘나는니편’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기억을 꼽을 만큼 인생에서 강렬한 큰 순간으로 남을 것 같다’는 내용이었어요. 제가 살면서 언제 이런 소리를 들을 수 있겠어요. 모두 벅찼던 순간이었죠.” 이 문자를 받고 권 대표는 확실한 목표가 생겼다.

“사실 모두는 지금 모습으로도 너무 예쁘고 아름다운데, TV속 연예인들과 비교하면서 스스로 너무 초라하고, 뚱뚱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조금만 살쪄도 사람들이 수군대는 것 같아 견딜 수 없고, 그래서  무리하게 다이어트를 시작하는 거죠. 그게 거식증이나 폭식증으로까지 이어지고요. 그런 사례들을 하나 둘씩 접하면서 섭식장애는 우리 사회에 뿌리 박힌 외모지상주의가 만들어 낸 병이라고 굳게 믿게 됐어요. 저희가 완치를 가능하게 할 수는 없겠지만, 이분들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게 작은 힘이 되고 싶어요.”

송지원 더나은미래 청년기자(청세담 6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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