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이 불편하지 않은 나라가 진짜 선진국이라 생각합니다”

이채필 고용노동부 장관 장애인고용 법안 만들 땐… 1년 중 5일도 안 쉬고 ‘예술작품 만들 듯’ 했다 법 시행 20년… 고용률 13배 늘었지만 이윤 추구 고용 형태, 아쉬운 부분도 많아 신체 일부가 불편할 뿐 다른 문제는 없는데… 인식 개선이 급선무 소아마비를 앓은 장애인으로, 고용노동부 최초로 ‘내부 출신 장관 1호’가 된 인물. 이채필 고용노동부 장관이다. 그는 1982년 행정고시(25회)에 합격한 후 30년 가까이 고용노동부에 몸담으며, 장애인 고용문제 해결에 남다른 관심을 보여왔다. ‘장애인의 날'(4월 20일)을 이틀 앞둔 지난 18일, 경기 과천의 정부종합청사에서 이 장관을 인터뷰했다. ―1991년 ‘장애인고용촉진 등에 관한 법률’ 제정을 주도했다고 하는데, 당시 어려움도 많았다고 들었다. “1989년 무렵 법안을 만드는 주무관으로 차출됐다. 장애인이니 더 애정을 갖고 해보란 뜻도 담겨 있었다. 당시 경영계에서는 ‘고용의무제는 시장논리에 반한다’며 엄청나게 반대했다. 당시 나는 ‘세금을 내서 장애인을 시혜적으로 도와줄 거냐, 일자리를 줘서 그들이 세금을 내도록 할 것이냐’고 경영계를 설득했다. 사무관인 나와 고용전문직 직원, 둘이서 법과 예산과 기금 마련까지 다 짜느라 1년 365일 중 집에서 쉰 날이 5일도 안 됐다. 참고할 게 아예 없어서, 모든 걸 예술작품 만들 듯 새로 짰다.” ―법 시행 20년이 넘었다. 직접 주도한 공무원으로서 공과를 평가한다면. “법 시행 초기 장애인 고용 수치가 1만명에 불과했다. 작년 연말 기준 13만명을 돌파했다. 13배 늘었다. 예전에는 장애인들이 주로 집안에만 있었는데, 요즘은 사회생활을 많이 한다. 근원적 복지가 일자리 아닌가. 일자리를

暗_청각장애인 청강문화산업대학 안태성 前 교수

교수 임용 등 매순간 불이익… 장애학생 위한 지원 없어 안태성(53) 전 청강문화산업대 교수는 요즘 일주일에 두 번씩 국립서울농아학교에 나간다. 방과후교실에서 농아인 학생들에게 만화를 가르친다. 작업할 돈도 없고, 의욕도 나지 않아 작품활동은 쉬고 있는 상태다. 한때 대학에서 만화를 가르치던 교수였던 그는 학교의 부당해고에 맞서 지난 5년간 긴 법정투쟁을 벌여왔다. 인권위 진정제기, ‘해직처분무효확인청구각하결정취소’ 행정소송 대법원 승소, 복직 위한 행정소송 1,2,3심 승소, 대학 측 항소…. 소송은 끝났지만 상처는 오래 남았다. 그는 선천적 청각장애 4급으로, 왼쪽 귀는 전혀 안 들리고 오른쪽 귀는 큰 소리만 들을 수 있다. 어린 시절 별명은 ‘귀먹쟁이’. 야간공고 졸업 후 공장에 다니던 그는 우연히 그의 그림을 본 목사의 소개로 동양화가를 만나 미술과 연을 맺었다. 24세에 홍익대 미대에 진학했다. “당시만 해도 장애인 배려가 별로 없었어요. 교수가 1시간 내내 강의를 해도, 들을 수가 없으니 쉬는 시간에 친구들 노트를 빌려 베끼기도 했어요. 실기는 넘어가도 교양과목은 그냥 포기하고 출석체크만 한 후 뒤에 앉아 엎드려 잤어요.” 돈이 없어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던 그는 대학 3학년 때 만난 아내 이재순(46)씨가 선물하면서 보청기를 처음 사용해보았다고 한다. 사회에 직접 부딪쳐본 그의 삶은 ‘장애를 이유로 차별을 겪어도 참아야 하는 것’투성이었다. 1999년 그는 청강문화산업대에 애니메이션 전임강사로 임용됐다. 채용공고에선 분명히 전임강사였음에도, 임명장엔 ‘전임강사 대우 6개월’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그는 “월급도 불이익을 당했지만 그냥 감수했다”고 말했다. 학교 측의 배려도 없었다. 강의를 위한 보청시스템이나

明_시각장애인 KBS 앵커 이창훈씨

523대 1 경쟁률 뚫고 앵커… 다양한 부서 돌며 취재 현장 배워 지난 4월 17일, KBS 본관 뉴스제작팀에 들어서자 스튜디오 너머로 부드럽게 정제된 음성이 들려왔다. 이창훈(27) 앵커가 얼굴에 미소를 띤 채 뉴스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의 양손은 기사를 점자로 변환해주는 점자정보단말기 위에서 좌우로 움직이고 있었다. 유심히 보지 않으면 시각장애인임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목소리도, 시선도 안정돼 있었다. “5분이 금방 지나가죠?” 방송을 마친 이 앵커가 기자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지난해 523대 1의 경쟁률을 뚫고 KBS뉴스 앵커로 채용된 그는 현재 KBS1TV ‘뉴스12’의 생활뉴스 코너를 단독으로 진행하고 있다. 기자가 그의 손에 들린 점자정보단말기를 신기한 듯 쳐다보자 이 앵커는 “노트북 기능과 비슷하다”며 차근차근 사용 방법을 알려준다. 점자키는 키보드 역할을 하고, 9개의 원형 버튼은 방향키 역할을 한다. 그는 “갑작스레 단말기가 고장 날 때를 대비해 점자로 출력된 프린트물도 함께 준비한다”며 부연설명을 했다. 생후 7개월, 뇌수막염 후유증으로 시력을 잃은 그는, 정식으로 아나운서 공부를 한 적이 없다. KBS에 최종 합격 후 3개월 만에 능숙하게 뉴스를 진행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이 앵커는 “혹독한 훈련”이라며 목소리를 낮춘다. 보도국 오리엔테이션 직후 그가 배치된 곳은 뉴스제작 3부. 홍수 피해로 전국이 혼란스러운 시점이었다. “재난 상황에서 속보가 어떻게 준비되는지 그때 비로소 배울 수 있었죠. 숨 가쁜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뉴스를 전달하는 앵커 모습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가장 잊을 수 없는 경험은 사회2부에 배치됐을 때다. 이 앵커는 사회부 기자들과 함께 경찰서로 향했다.

[12가지 핵심과제] ③ 장애 극복한 판사·앵커 뒤에 훌륭한 시스템 있었다

사법연수원 시각장애인 판사 최영씨 모든 교재·기록 음성 변환 시험 시간 약 2배 제공 KBS 앵커 이창훈씨 위해 장애 등급·배려 사항 공부 점자프린터 등 장비 마련 동료로 곁에서 지내보니 장애 대한 편견 사라져 정부, 유형별 직업 개발 기업, 의무고용률 지켜야 21세에 갑자기 얻은 루게릭병. 온몸의 근육이 마비돼 움직일 수 있는 것이라곤 손가락 두 개와 얼굴 근육 일부뿐. 목소리까지 잃어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던 스티븐 호킹(70) 박사가 ‘세계적 물리학자’가 된 데에는 숨은 조력자가 있었다. 호킹 박사가 간단한 버튼만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도록, 세계적인 반도체 회사 인텔은 음성변환장치(전용 PC)를 개발, 지원하고 있다. 호킹 박사의 전용 PC는 그의 건강 상태에 따라 계속 진화하고 있다. 최근 국내에도 장애의 벽을 허문 이들이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11월 최초의 시각장애인 앵커 이창훈(27)씨가 KBS에 채용된 데 이어, 올 2월에는 최영(32) 서울북부지법 판사가 국내 최초의 시각장애인 판사로 임용됐다. 장애인의 직업적 한계를 뚫은 이 최초 기록 뒤에는 숨은 조력자와 지원 시스템이 함께하고 있었다. ◇모범 사례 찾아 일본으로 떠난 사법연수원 교수진 2008년 10월, 경기도 일산의 사법연수원 교수진 8명이 회의실에 모였다. 이들은 최초의 시각장애인 사법시험 합격자인 최영씨의 적응을 도울 태스크포스(TF)팀이었다. ‘시각장애인이 어떻게 수업을 받고, 시험을 치르며, 현장 실무수습을 할 것인가.’ 하나부터 열까지 준비가 필요했다. 일단 해외의 비슷한 사례부터 수집하기 시작했다. 사법연수원 기획총괄교수(판사) 2명이 2009년 1월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다. 1981년 시각장애인 판사를 배출한 일본의 20년

공연 지원 등 ‘문화 복지’로 영역 확대해야

기업의 사회공헌은 전통적으로 사회복지나 교육·장학 사업과 같은 지원 사업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최근에는 문화 예술 영역으로도 그 저변이 확대되고있는추세다. 이번 여론조사에서 드러난 일반인들의 인식에서도 문화 예술에 대한 사회공헌 요구가 높았다. 문화 예술 사회공헌의 필요성에 대해 ‘반드시 필요하다(40.4%)’와 ‘필요하다(51.7%)’는 응답이 90%를 넘었다. 반면 ‘현재의 문화 예술 사회공헌에 대한 평가’를 묻는 질문에는 ‘못한다(42.6%)’나 ‘아주 못한다(10.8%)’는 부정적인 답변(53.4%)이 긍정적인 답변(29.8%)을 압도했다. 플랜엠의 김기룡 대표는 “학력과 소득수준이 높을수록 문화 예술 사회공헌의 현 수준에 대한 부정적 응답이 많았기 때문에, 향후 사회가 발전해가면서 문화 예술 사회공헌에 대한 욕구가 동시에 늘 것으로 전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문화 예술 사회공헌 활동은 대부분 공연 지원이나 현물 기부와 같은 마케팅성 협찬 활동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번 조사에서는 문화 예술 사회공헌의 향후 지원 분야가 소외 계층의 문화 예술 교육 지원(38.2%)이나 소외 계층의 문화 예술 관람 및 향유 지원(10.7%), 또 지역사회 예술 단체나 예술 공연 지원(16.3%) 등으로 ‘문화 복지’에 대한 욕구가 매우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기존의 메세나 형태로 이뤄져 온 고객이나 일반인 문화생활 지원(14.6%)이나 신진 예술가 발굴 및 지원(9%), 예술가의 창작 활동 지원(7.7%)은 상대적으로 응답자가 적었다. 문화예술사회공헌네트워크 김민지 사무국장은 “문화 예술 사회공헌에 대한 욕구는 매우 큰 데 반해, 기업의 사회공헌 프로그램은 아직 미약한 수준”이라며 “앞으로 현장의 욕구를 반영한 정교한 프로그램이 다양하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문화 예술 사회공헌은 기업 이미지 제고에 도움이 될까. 이

[박란희의 작은 이야기] 무조건적 ‘혜택’보다 낯선 땅에서의 적응 도와줄 ‘시스템’ 만들어야

“겪어보지 않으면 몰라요.” 다문화 취재를 통해 만난 몽근졸씨와 저는 말이 아주 잘 통했습니다. 낯선 나라에서 이방인으로 산다는 것, 그건 정말 경험해보지 않으면 모를 일입니다. 2008년 여름부터 2년 동안 저는 미국에서 소위 ‘다문화 여성’으로 살았습니다. 매일 아침 다섯 살짜리 딸아이를 프리스쿨(어린이집)에 맡기고 돌아서면서 저는 선생님께 뭔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맴돌았지만 그냥 웃으며 “굿 모닝(Good Morning)”만 하고 돌아서야 했습니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선생님과 낄낄거리며 대화하는 미국인 학부모를 보며 자괴감을 느껴야 했지요. 마트에서도 “Plastic or Paper?(비닐봉지, 아니면 종이봉투에 담아갈래?)” 하고 재빠르게 묻는 종업원의 말을 못 알아들어 창피당한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서커스장에서 모든 관객이 일어나 미국 애국가를 부르는 통에 우리 가족만 어색한 채 입만 벙긋벙긋한 기억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게 끝은 아니었습니다. ‘영어를 제대로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주위를 둘러본 순간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제 스케줄을 채워줄 다양한 프로그램이 눈에 보였습니다. 월요일엔 도서관, 화요일엔 초등학교, 수요일엔 지역 커뮤니티센터, 목요일엔 미국인 자원봉사 할머니집, 금요일엔 교회를 다니며 생활영어를 배웠습니다. 도서관에서 40년 넘게 자원봉사로 일한 70대 애비(Evy)할머니 부부는 매주 목요일 자신의 집으로 저와 몇몇 한국 여성들을 초대해 토크타임을 갖고, 미국 문화와 미국 생활에서 겪는 아주 사소한 어려움을 상담해주기도 했습니다. 운전면허증을 딸 때 유의할 점, 식당에서 팁(tip)은 얼마나 줘야 하는지, 할로윈 데이에는 아이에게 무슨 옷을 입혀서 학교에 보내야 하는지 등을 말입니다. 이렇게 2년쯤 지나 귀국할 때쯤, 저는 전화 통화를 통해 “왜

놀림 받고 자란 아이가 성장한 10년 후 사회 모습 그려봐야

다문화 정책… 지원금 크게 늘었지만 일부에만 혜택 몰려 다문화 지원 예산, 6년 동안 100배 늘고 지원센터도 10배 증가 시간 여유 있는 주부는 혜택 많은 기관 서로 비교해가며 다녀 농사짓거나 시댁 눈치로 혜택 전혀 못 받는 경우도 이주 노동자 자녀교육이 훨씬 심각한 상태지만 정부는 오히려 지원 배제 이벤트성 지원보다는 장기적인 큰 그림 필요해 “보육료 거절합니다.” 파워블로거인 고마츠 사야카(31)씨는 올 1월 자신의 블로그에 한국의 다문화 정책에 관한 이런 글을 올렸다. “요즘 한국 사람들이 우리 아기가 다문화 가정 아이라서 나를 엄청 부러워한다. ‘다문화 가정 보육료 100% 공짜’라서다. … 인터넷에 찾아보고 주민센터도 가봤더니 결혼식·여행·택배비 할인, 대입 다문화 가정 특별전형, 한국어 교육, 요리교실, 각종 취미교실, 육아도우미 무료, 영·유아 보육비 무료, 각종 체험 문화 탐방, 취업 지원 및 일자리 지원, 친정부모 초청행사, 바우처사업, 방문 자녀 교육, 방문 부모 교육, 놀이공원 가족초대권, 영화관람권, 무료건강검진권, 고향 방문 항공권, 토픽(TOPIK·한국어능력시험) 응시료, 어린이학습지, 장학금, 운전학원비 보조, 자조 모임 운영비, 국민임대주택 1순위 우선 배정, 분양시 우선 공급 대상, 전세자금 대출금리 할인까지 있더라. … 물고기를 계속 잡아주면 물고기 잡는 방법은 절대 못 배운다. 낚싯대를 어디서 사고 낚시를 어디서 하고 낚시를 하는 방법을 알려줘야 한다.” 사야카씨는 이런 이유로 남편과 상의해, 39만원의 보육료를 받지 않기로 했다고 블로그에 밝혔다. ◇다문화 지원도 양극화 다문화 지원과 관련된 예산은 2006년 12억원에서 2011년 1162억원으로 6년 만에 100배 가까이 늘었다.

[Cover Story] ’10년 후 미래’ 핵심과제 12가지_ ②다문화

다문화 가정의 빛과 그림자 다문화 혜택 전혀 못 받고 한국이 낯설기만 한 ‘리엔씨’ 방 밖에는 커다란 자물쇠… 4년 동안 아무 데도 못 가 호강하러 온 한국땅… 남편 퇴근하는 밤 11시까지 방안에서 갇혀 지내 주변 도움의 손길 있지만 남편이 절대 안 받아 시내를 벗어나 한 시간을 달렸다. 도로 양쪽으로 메마른 논이 펼쳐졌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들어가니, 철판과 나무로 덧댄 집들이 모여 있었다. 논두렁 앞쪽으로 파란 지붕을 가진 낡은 집이 눈에 들어왔다. 싸늘한 바람에 낡은 대문이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누구세요?” 문틈 사이로 보인 여성의 눈동자엔 경계심이 가득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몇 번의 대화 끝에 마침내 문이 열렸다. 신발을 벗고 방 안에 들어서려는데 무언가 발끝을 건드리며 지나갔다. 아궁이에서 흘러나오는 뿌연 연기 밑으로 회색 쥐 한 마리가 보였다. “저는 잘 때 깨요. 쥐가 얼굴을 때려서.” 리엔(가명·24·충남 아산)씨가 경직된 기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4년 됐어요. 한국에 온 지.” 7개월 된 딸 정은이(가명)를 안고, 리엔씨는 또박또박 단어를 곱씹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열아홉 살 무렵, 베트남 또래 친구들이 “호강하러 간다”는 말만 남긴 채 하나 둘 모습을 감췄다. 어디로 간 걸까. “한국으로 시집을 갔대요. 비행기 타고 가서 결혼한다고 다들 부러워했어요. 한국 가는 게 유행 됐어요.” 1년쯤 지나니, 친한 친구 여섯 중 리엔씨만 남았다. “나도 한국 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비행기 탔어요.”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낯선 남자 한

[박란희의 작은 이야기] 조금씩 싹트고 있는 공동체 의식 모여 ‘청소년 행복지수 1위’ 국가 될 수 있기를…

지난해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 옆 동에서 한 여중생이 몸을 던졌습니다. 집단따돌림 때문이었습니다. 핏자국을 보았다는 이웃도 있고, 옥상 밑 계단에서 웅크린 채 울고 있던 여중생을 보았다는 이웃도 있었습니다. 무수한 소문만이 휩쓸고 난 후, 사건은 점점 사람들 기억에서 잊혔습니다. 그리고 12월 대구의 한 남중생이 학교폭력으로 또다시 목숨을 던졌습니다. 출근길, 그 지점을 지날 때마다 저는 가끔 얼굴도 모르는 그 아이를 생각합니다. ‘왜 그랬니, 왜 그랬어’ 하고요. 미국 시애틀에서 2년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2010년 여름, 일곱살짜리 큰딸을 유치원에 보냈습니다. 얼굴색은 똑같은데, 말이 어눌하고 영어를 섞어 쓰는 큰딸은 금방 또래 여학생들에게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유치원에 간 지 일주일이 되던 무렵, 아이는 잠자리에서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가 ‘쟤는 이상하니까 놀지 마’라며 왕 노릇을 하자, 몇몇 친절하던 여학생들도 모두 자기와 친구를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상황은 나아졌지만, 놀이터에서 놀 때면 큰딸은 늘 애들이 맡기를 꺼리는 술래역할만 맡았습니다. “나대지 마라!” 요즘 청소년들 사이에 가장 심한 욕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왕따나 학교폭력 등의 사건이 반복되어도, 많은 사람은 “왕따 당할 만하니까 당했다” 혹은 “문제아들은 전학이나 퇴학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 아이는 그러지 않을 거야’라고 위안을 삼기도 하지요. 공동체가 아닌 나와 가족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 이것은 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문제를 해결하는 걸 어렵게 합니다. 청소년 문제 취재를 하면서 참 고약했던 건, “어쩔 수 없다. 해결책이 없다”는 패배감이 사회 전체에 가득했다는 점입니다. ‘다름’을

처벌로 일관 말고 교실 분위기 바꿔야

문화학습협동 네트워크 사토 요사쿠 대표 이지메(왕따),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등교 거부…. 일본의 청소년문제는 우리보다 훨씬 역사가 깊다. 청소년문제에 집중하는 일본의 NGO 또한 다양하다. 일본 문화협동네트워크 대표 사토 요사쿠씨는 1993년부터 등교거부 청소년을 위한 대안학교(프리스쿨)를 운영해오고 있으며, 1999년부터 히키코모리 청소년을 위한 비영리법인 ‘문화학습협동네트워크’ 대표를 맡고 있다. 지난 15일 서울시립 하자센터에서 열린 한·일 교육포럼 ‘청소년 폭력과 부적응을 말하다’에 참석한 그를 만났다. ―한국에선 학교폭력·왕따·자살 등 청소년 문제가 심각하다. 일본의 청소년 문제는 어떤가. “일본에선 세 차례 큰 흐름이 있었다. 1980년대 중반 도쿄의 한 중학교에서 재일동포 아이가 왕따를 당하다 못해 자살했다. 가해학생들은 교실 안에서 그 학생의 ‘장례식 놀이’까지 했고, 담임교사도 관여해 큰 사회적 파장이 일었다. 아무도 왕따문제를 자각조차 못하던 시기였다. 1990년대 중반에는 또 한 번 대형 사건이 터지면서 ‘아동권리조례’가 만들어졌다. 이전에는 왕따 피해자에 초점을 맞춰 가해자 처벌을 위주로 했다면, 이후부터 왕따 구조 자체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교실 내 스트레스가 쌓이고, 누군가가 교실 안에 있는 누군가에게 스트레스를 풀며, 주변의 친구들은 이를 방관하게 된다. 2000년대 중반부터는 사이버상의 왕따가 극성을 부렸다. 왕따 피해자 친구를 집단으로 매도하고, 심지어 하반신 사진을 올려놓는 등 ‘인터넷 왕따’로 아이들이 연속으로 자살했다.” ―일본 정부의 대책은 어떻게 변했고, 효과는 있었나. “일본의 정책은 별로 변한 게 없다. 처벌주의로 일관하고 있다. 수치목표를 정해놓고 ‘모든 학교를 히키코모리 제로를 만들어라’고 하는 식은 별 효과가 없었다. 최근에는 청소년들이 일본 문부과학성에 정책을 비난하는 편지나

전문가·정부 중심 아닌 ‘청소년 중심’… 경쟁보다 문화예술 교육 강화한 ‘행복 학교’로

청소년 문제 대처 방안… 현장 전문가에게 듣는다 학교문제 함께 해결하는 철저한 협업시스템으로 교사문화 조성돼야 집에서 받은 스트레스 학교폭력으로 이어져… 못사는 나라 여행 후 행복의 소중함 느끼기도 학교폭력과 청소년 문제가 촉발된 계기는 지난해 12월 발생한 ‘대구 중학생 자살사건’이다. 하지만 학교폭력과 왕따, 우울증과 자살 등 우리 사회의 청소년 문제는 곪을 대로 곪아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지난 2월 교육과학기술부는 학교폭력 근절 종합대책을 발표, 가해학생 처벌과 피해학생 보상 등을 주로 한 ‘불관용(Zero-tolerance)’ 원칙을 내놓았다. 하지만 ‘더나은미래’가 세미나와 심포지엄, 인터뷰 등을 통해 만난 현장 전문가들은 “청소년 문제는 학교와 가정, 지역공동체 등 우리 사회의 건강성에 대한 척도이기 때문에,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이분법적 구도는 ‘대증요법’적인 처방일 뿐”이라고 입을 모았다. ▲㈔들꽃청소년세상 김현수 공동대표=”18년간 위기 청소년을 돌봐오면서 청소년 문제의 해결은 청소년 중심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청소년은 늘 대상화되고, 전문가나 정부 중심으로 청소년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아이들을 대상화시켜 놓고 뭔가를 진행하면 쉽다. 아이들과 함께 기획·연구하고 프로그램을 시도하려면 수십 배의 노력이 든다. 청소년 문제 진단과 조사활동, 정책개발 등에서 청소년이 중심이 되고 전문가가 이를 돕는 형태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서울시 하자센터 박형주 교육사업단 팀장=”교사문화가 바뀌어야 한다. 학교의 문제를 함께 머리 맞대고 풀어내려는 협업시스템이 필요하다. 철저히 분업시스템이다.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이 있어도 ‘넌 뭘 맡아’ 식으로 역할배정을 통해 개인별로 진행된다. 함께 브레인스토밍을 거쳐 기획하고 협업하는 에너지가 없다. 학생들 또한 은연중에 이런 에너지가 학습된다.”

마음의 병 치료한 후 아이의 아픔 깨달았죠

청소년 교육 생태계를 바꿔라_’우울증 엄마’가 달라졌어요 남편 장사 실패·별거… 술에 의존하는 나날들 구타·무관심했던 엄마, 상담치료 후 변화 가족관계 돈독 “엄마가 달라진 거 많이 느껴요. 예전에는 심하게 많이 때렸는데, 요즘엔 따뜻하게 대해요. 엄마 노력 보면서 나도 잘해야겠다는 생각 해요.” 경옥(가명·46)씨와의 인터뷰 도중 걸려온 진호(가명·16)군의 전화였다. 기자의 질문에 짤막한 답변을 마치고 나서도, 둘의 통화는 오랫동안 이어졌다. 가족과의 대화가 늘었다는 것. 변화의 긍정적인 신호다. 진호의 첫 가출은 7살 때였다. 처음엔 하룻밤 주변을 배회하는 수준이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나흘 동안 집에 안 들어오기도 했다. 공원에서, 공중화장실에서, 주차장 뒤에서 잠을 청하는 날이 늘어갔다. 나쁜 친구과 어울리며, 싸우는 일도 잦았다. 경옥씨는 “너 때문에 힘들어 못살겠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아이를 때리는 일도 잦아졌다. 진호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해, 경옥씨는 진호와 함께 신경정신과를 찾았다. 상담 결과 경옥씨는 우울증, 진호는 ADHD(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판정을 받았다. 변화는 엄마부터 시작됐다. 경옥씨는 “우울증을 치료하고 싶었지만, 정신과 치료가 갖는 사회적인 편견이나 비용 부담을 이겨내기가 쉽지 않았다”고 했다. 대신 선택한 방법이 ‘상담’이다. 지역가정지원센터, 학교 내 시설, 종교단체 등을 찾아다녔다. “진호가 유치원 때 아빠 장사가 망했어요. 만날 싸우다 결국 별거까지 했죠.” 경옥씨는 “괴로운 마음에 술에 의존했고, 우울증까지 겹쳐 아이를 나 몰라라 했다”며 “상담을 받으면서 ‘진호가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생각하면 미안하다”고 털어놓았다. 동대문구건강가정지원센터의 김은정 상담팀장은 “가출·폭행·절도·학교부적응 등 청소년 문제는 대부분 가정에서 시작된다”며 “상담자 다수가 아이들 문제로 이곳을 찾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