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호 현대차정몽구재단 사무총장
[최부장의 CSR 스토리] 사회공헌, 기업과 지역사회를 이어주는 ‘다리’

2008년 6월로 기억한다. 팀장님이 자리로 부르시더니 대뜸 “최대리가 연구소의 ‘사회공헌 사업’ 기획을 좀 해줘야겠다”고 하셨다. “본사에서 우리 연구소에 사회공헌 예산을 배정했는데, 어떻게 사용하는 게 좋을지 고민을 좀 해봐.” 당시 나는 현대기아자동차 기술연구소 PR 담당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갑작스럽긴 했지만 왠지 큰 미션을 받은 것처럼 흥분됐다. 입사 후 8년간 의전과 홍보를 담당한 내게 사회공헌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곧바로 필립 코틀러의 ‘CSR 마케팅’, ‘기업은 왜 사회적책임에 주목하는가?’ 등 몇권의 필독서를 찾아 읽었다. 또 연구소가 위치한 화성 지역에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파악하기 위해 지자체, 화성시 새마을회, 사회복지시설 등 현장을 직접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을 만나면서 놀랐던 게 한둘이 아니다. 우선 주민들은 현대기아차 연구소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 호의적이지도 않았다. 수년간 PR 담당자로서 수도 없이 “우리 연구소는 1만여명의 연구원이 디자인, 설계, 시험, 평가 등 신차 개발의 모든 프로세스를 한 곳에서 할 수 있는 100만평 규모의 세계적인 연구소”라고 자랑을 했는데, 정작 지역 주민들은 그런 세계적인 연구소가 화성시에 있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실망스러웠지만 지금이라도 이런 상황을 알게 된 게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우연히 맡은 사회공헌 업무는 지역사회와 친해지고 소통할 수 있는 훌륭한 채널이 될 것만 같았다. 한번은 막 개관한 화성아트홀에 사전 약속 없이 찾아간 적이 있었다. “현대차에서 왔는데 팀장님을 만나고 싶다”고 했더니, 그가 나를 위아래로 쓱 훑어보더니 “차 안 삽니다~!”라고 하는 게 아닌가. 자초지종을

김민석 경기도사회적경제원 사업본부장
[논문 읽어주는 김교수] ‘그린워크’와 ‘그린토크’가 불일치할 때 ‘그린워싱’이 탄생한다

빙하와 만년설이 녹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긴 장마와 잦은 태풍, 게릴라성 폭우가 이어진다. 기후변화에 대한 우려는 점점 커지고 있다. 지난 8월 13일에는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정부 차원의 녹색금융 태스크포스(TF)가 가동됐다. 금융위 손병두 부위원장은 “자산운용에 있어 전통적 리스크 외에도 ESG(환경·사회·거버넌스) 요소 등 사회적 책임투자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무늬만 녹색인 ‘그린워싱’을 방지하고 새로운 투자 기회를 제공하는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린워싱(green-washing)은 ‘그린(녹색)’과 ‘화이트워싱(불쾌한 사실을 숨기기 위한 눈가림)’의 합성어로, 겉으로는 환경에 좋은 녹색제품을 만드는 것처럼 홍보하지만 실제로는 환경오염 감소를 위한 노력은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린워싱과 관련해 켄트워커(Kent Walker)와 팡완(Fang Wan)은 ‘상징적 행위와 그린워싱의 피해’라는 연구 논문에서 다양한 그린워싱 사례를 조사하고 이와 관련된 흥미로운 결과를 도출했다. 이 연구에서 저자는 환경을 위한 실질적인 활동을 ‘그린워크(Green Walk)’로 정의했다. 또 환경을 위해 상징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그린토크(Green Talk)’라고 했다. 그린워크와 그린토크의 불일치를 ‘그린워싱’이라고 정의했고, 그린워크과 그린토크를 위해 집중적으로 노력하는 것을 ‘그린 하이라이팅(Green Highlighting)’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정의를 바탕으로 연구자는 다음 4가지의 가설을 세우고 검증했다. 첫 번째 가설은, 환경을 위한 실질적인 조치(그린워크)는 재무 성과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둘째, 환경을 위해 상징적으로 하는 행동(그린토크)은 재무성과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셋째, 그린워싱은 재무성과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마지막 넷째, 그린 하이라이팅은 재무성과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결과는 어땠을까? 그린워크는 재무성과와 큰 관련이 없었고, 상징적 활동인 그린토크는 가설대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그린워싱도 예상대로 재무성과에

한수정 아름다운커피 대표이사
[모두의 칼럼] 기후변화와 공정무역

지난 8월, 유래 없는 긴 장마가 한국을 덮쳤다. 가옥이 물에 잠기고, 제방이 터져나갔다. 소떼와 자동차가 뒤섞여 떠내려가는 풍경은 여기가 21세기 초일류국가 한국인지를 의심하게 했다. “이 비의 이름은 기후변화입니다”라는 한 장의 카드뉴스를 보며, 우리 삶 깊숙이 다가온 기후변화의 위기를 비로소 알아차린 한 철이었다. 사실, 도시의 삶은 기후변화를 체감하기 매우 어렵다.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출근해 에어컨 나오는 사무실에 들어 앉는다. 점심 먹는 잠깐 사이의 더위를 참지 못해 일회용 컵에 아이스커피를 마신 후, 집에 돌아와 냉장고와 선풍기의 도움을 받으며 잠에 든다. 높은 습도에 매일 하는 빨래가 잘 마르지 않는다고 열 건조기 사용량도 늘어난다. 냉방병에 걸리지 않으면 다행인 여름철을 보내는 도시인들에게 기후변화는 8월 장마철의 잠깐 이야기일 뿐이다. 추석 즈음 과일 값이 폭등하게 된다면, 기상관측사상 가장 길었다던 장마와 기후변화를 혹시 떠올릴 수 있을는지. 기후변화의 아이러니는, 기후변화에 가장 적은 책임을 진 사람들이 가장 크게 체감하고, 가장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는 것이다. 종일 바깥에서 일하는 배달노동자, 몸 하나를 무기로 삼는 일용직 노동자, 그리고, 전 지구의 80% 먹거리를 길어 올리는 소농들의 이야기다. 대표적인 소농의 작물인 커피. 커피 생산국 에티오피아는 1960년에서 2006년 사이 평균온도 1.3도가 오르며 지난 몇 년 명성대비 낮은 품질로 커피인들의 애를 태웠다. 멕시코, 콰테말라, 온두라스의 강수량은 1980년대 이후 15%나 줄었다. 2050년까지 현존하는 커피경작지 50%는 사라질 것이라는 연구 결과를 실증하는 사례들이다. 커피섹터에서의 기후변화는 ‘병해충의 세계화’다. 콩고에서 시작한 커피천공충(Coffee berry borer)은 보통 재배고도 1500m 아래에서만 발견됐다. 그러나 커피산지 기온이 전반적으로 상승하면서 1500m 이상 고도에서도 발견되며, 연간 5억 달러의 피해를 발생시킨다. 천공충 발생 초기, 기온이 낮은 높은 고도로 점진적으로 경작지를 옮겼던 세계 각지의 농부들은 허탈하기만 하다. 2014년 엘살바도르 커피의 70%를 날려버린 커피녹병(coffee leaf rust)은 점점

[아무튼 로컬] 도대체 로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그저 코로나 탓만일까. 로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 대도시의 다중 밀착 컨택트에 지친 사람들이 언택트 공간을 찾아, 혹은 발 묶인 해외여행족들이 꿩 대신 닭이라며 로컬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 아닌가 싶지만 사실 이런 움직임은 코로나가 창궐하기 전부터 급류를 타고 있었다. 여기서 로컬이란 ‘서울 말고 다 시골’이라는 의미보다는 ‘사람들의 삶 터’라는 뜻에 가깝다. 당연히 서울 안에도 다양한 로컬이 있다. 요즘 뜬다는 성수동이나 창신동, ‘힙지로’로 불리는 을지로 세운상가 주변, 예전부터 개성적인 상권을 형성해 왔던 이태원, 홍대 앞 등이 서울 안의 로컬이라 할 만한 곳들이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는 로컬의 핫플에 다녀온 걸 과시하려는 셀카 사진이 넘쳐난다. 형형색색 피크닉 복장 중·장년 세대의 관광버스 여행이 명승지 위주로 돌아갔다면, SNS 네트워크로 연결된 밀레니얼 자유여행객들의 발걸음은 전국의 ‘로컬 크리에이터’들이 만든 멋진 공간을 누빈다. 맛집은 기본이고 퀄리티 면에서 서울의 유명 상권에 뒤지지 않는 카페, 책방, 공방, 수제 맥주집, 바버숍, 편집숍 등 업종도 다채롭다. 매력적인 인테리어와 감각적 서비스를 갖춘 이런 가게들이 지난 수년 새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생겨나더니 점점 더 빠른 기세로 확산하는 추세다. 그러다 보니 ‘로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냐’는 말이 나온다. 청년들 사이에 가장 뜨는 게 로컬이라는 얘기도 있다. 서점에 가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한동안 출판계에선 ‘퇴사’를 주제로 하는 책들이 홍수를 이뤘다. 그 흐름을 로컬이 이어받았다. 잡지에서 시작해 일본 번역서로 넘어가는가 싶더니, 지난해부터는 본격적으로 로컬 전성시대의

[진실의 방] 사과 없는 사과문

  “고(故) 최숙현 선수가 제 길을 가로막는다는 이유로 뒤통수 한 대를 (때린 것을) 인정합니다. 이런 신체접촉 또한 상대방에게는 폭행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저의 안일하고 부끄러운 행동을 다시 한번 반성하고 깊이 사죄드립니다.” 사건·사고의 주인공들이 올리는 ‘사과문’이라는 게 대체로 형편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도 기대 이상이었다. 감독과 동료에게 가혹행위를 당하고 지난 6월 극단적 선택을 한 최숙현 선수. 그를 괴롭혔던 동료 선수가 얼마 전 써서 올린 자필 사과문은 뉘우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허술한 변명들로 가득했다. 문장을 곱씹어보자. 우선 ‘뒤통수 한 대’라는 말로 일회적이고 예외적인 사건이었다는 걸 강조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사안을 축소하는 건 ‘거짓 사과문’에 흔히 등장하는 수법이다. ‘때렸다’는 말을 생략한 것도 흥미롭다.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때렸다는 표현만은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다음 문장에서 바로 드러난다. 가해자는 그날 자신이 했던 행동을 ‘신체접촉’이라고 표현했다. 접촉은 ‘닿았다’는 뜻이다. ‘퍽’ 소리 날 정도가 아니었음을 넌지시 알린 셈이다. 고인과 유족을 향한 사과문에 감히 신체접촉이라는 단어를 집어넣었는데, 반성하고 사죄한다는 그 말을 어떻게 믿겠는가. 아무래도 매뉴얼이 있는 것 같다. 세간에 떠도는 사과문들을 찾아 읽어보면 유형과 패턴이 거기서 거기다. 책임질 말은 쏙 빼고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하며 머리를 조아리는 유형, 엉뚱한 이야기를 꺼내 본질을 흐리는 유형, ‘잘못한 건 별로 없지만 사과할게요’라고 이야기하는 대인배 유형도 있다. 지난 2018년 12월 16일, 태안화력발전소 운영사인 한국서부발전이 발표한 사과문은 ‘거짓 사과문’의 전형적인 문법을 보여준다.

[알립니다] 더나은미래의 필진 12人을 소개합니다

다양한 분야 전문가, 릴레이 연재 조선일보 공익 섹션 더나은미래가 새로운 필진으로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더나은미래가 정성 들여 캐스팅한 12명의 칼럼니스트가 공익 현장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소식과 고민,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혁신적인 생각과 어젠다를 공유할 예정입니다. 매월 첫 주에는 한종호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장이 ‘아무튼 로컬’ 코너를 통해 지역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변화와 혁신 비즈니스를 소개합니다. 국내 ‘체인지 메이커’ 1세대로 꼽히는 정경선 HGI 의장은 ‘정경선의 최적화 인류’를 연재합니다. 인류가 직면한 기후 위기와 그 해결책을 모색하는 코너입니다. 둘째 주에는 김민석 지속가능연구소장이 ‘논문 읽어주는 김교수’ 코너를 맡아 사회혁신 분야와 관련한 연구들을 쉽게 풀어 드립니다. 셋째 주에 신설되는 ‘월간 성수동’ 코너는 한상엽 소풍벤처스 대표가 맡습니다. 소셜벤처 메카로 불리는 성수동과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 등 임팩트 생태계의 트렌드를 전합니다. 최재호 현대자동차그룹 사회문화팀 부장은 ‘최부장의 CSR 스토리’ 코너를 통해 CSR 담당자의 경험과 고민, 생각을 나눕니다. 넷째 주에는 신현상 한양대 경영학과 교수가 사회문제 해결에 앞장서는 기업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변화를 소개하는 ‘신현상의 임팩트 비즈니스’를 연재합니다. 장애·환경·아동·노동 등 다 양한 공익 담론을 이끌기 위해 ‘모두의 칼럼’ 필진도 강화했습니다. ▲송진호 코이카 이사(국제개발협력) ▲박인자 아이쿱생협 회장(생활협동조합) ▲한수정 아름다운커피 사무처장(공정무역) ▲김미진 위커넥트 대표(여성) ▲이탁건 재단법인 동천 변호사(이주민·난민) ▲유지민(장애·청소년) 등 6명의 필진이 함께 만드는 모두의 칼럼은 매주 화요일 만날 수 있습니다.

[사회혁신발언대] 한국 소셜섹터 발전을 위한 3가지 제언

2020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 19 대유행 사태는 최근 아시아 전역에서 다양한 사회 문제를 심화시키고 있다. 질병은 국경을 넘어 무차별적으로 퍼졌지만, 그로 인한 영향은 평등하지 않았다. 전염병이 남긴 경제적 타격과 사회적 소외는 특히 사회 취약계층에 큰 고통을 주고 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를 넘어서며 선진국 반열에 들어섰지만, 심각한 빈부 격차와 노인 빈곤 문제를 겪고 있다.  사회적기업, 소셜벤처, 비영리단체 등 이른바 ‘소셜섹터’로 불리는 이들은 지난 10년간 꾸준히 성장하며 사회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해왔다.  국제 사회도 한국 소셜섹터에 주목하고 있다. 지난 7월 홍콩에 있는 아시아 지역 공익 활동 연구 단체인 ‘아시아필란트로피소사이어티센터(Centre for Asian Philanthropy and Society·이하 CAPS)’가 발표한 ‘공익활동환경평가지수(Doing Good Index)’에서 한국은 홍콩, 일본과 함께 2순위 그룹인 ‘비교적 잘하는 편’(Doing Better)에 속한 것으로 평가됐다. 공익활동평가지수는 아시아 18개국의 공익 활동 환경을 ‘잘하고 있음(Doing Well)’부터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음(Not Doing Enough)’의 네 단계로 구분하는 지수로, 지난 2018년부터 발표하고 있다. 이번 발표에서 한국은 ‘잘하고 있음’으로 평가된 싱가포르나 대만에는 미치지 못했다. 이는 코로나19 위기에 맞서 국제 사회에서 비교적 신속하고 현명한 대응을 해온 것으로 알려진 한국의 공익 활동 환경을 점검할 필요성을 보여준다. 이에 사회 문제의 최전선에서 공익 활동을 이어가는 소셜섹터의 발전을 위한 세 가지 방법을 제언한다.    첫째, ▲규제 ▲세금제도 ▲조달정책 등 소셜섹터 관련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가장 시급한 개선이 필요한 분야는 규제다. 이번 공익활동평가지수에서 발표한 아시아 지역 비영리단체, 소셜벤처 등을 대상으로 한 설문 결과에 따르면 한국의 경우 한 개의 공익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최대 43개의 지자체와 정부 기관을 상대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홍콩과

유지민(거꾸로캠퍼스 재학생)
[모두의 칼럼] 선한 도움, 무례한 도움

내 취미는 혼자 시내에 나가 노는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최근에는 조금 어렵게 됐지만, 기회가 되면 무조건 나가려고 하는 편이다. 특히 대중교통 이용하는 걸 좋아한다.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내게 사람들은 ‘힘들지 않느냐’고 묻지만 그 힘듦과 비교할 수 없는 뿌듯함이 있다. 자립적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늘어간다는 건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물론, 대중교통을 타고 환승하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과정엔 늘 어려움과 돌발상황들이 있지만 그럴 땐 주저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이렇게 만나는 사람 중에는 선량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무거운 짐을 함께 들어주고, 난처한 상황에 처했을 때 도움이 필요한지 먼저 물어봐 주는 친절한 사람들을 만나고 나면 종일 기분이 좋다. 필요하지 않을 때 도움을 주겠다는 사람들에게도 ‘감사하다’고 말한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선한 도움’과 기분을 망치는 ‘무례한 도움’을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착하고 선량한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선한 사람 열 명보다 무례한 사람 한 명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기억을 곱씹어본다. “어린애가 웬 휠체어 신세냐”며 내 손에 1000원을 쥐여주던 어르신, “휠체어 탔는데도 예쁘네!”를 칭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혼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내게 “다음부턴 어른과 함께 타라 “며 승객들 다 들리게 쩌렁쩌렁 소리치던 버스 기사, “하나님 믿어야 장애가 고쳐진다”며 버스 이동 시간 30분 내내 설교하던 어르신, 전동휠체어를 탄 나를 쫓아오며 달리기 경주를 하는 초등학생들…. 막상 적다 보니 끝도 없이 생각난다.

[모두의 칼럼] 출생신고 되지 않은 아이들

몇 년 전 약 15개의 시민단체가 결성한 ‘보편적 출생신고 네트워크’는 모든 아이가 태어나면 출생등록이 되어야 한다는 ‘보편적출생신고 캠페인’을 진행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신고’라는 이름의 캠페인이었다. 활동가들은 열띤 토론 끝에 캠페인 이름을 정한 후, 가장 적절한 이름을 찾았다며 기뻐했다. 출생등록은 다른 모든 권리를 누리기 위한 첫 단추다. 출생등록이 되지 않으면 법률상의 신분 증명이 어려워진다. 미취학 아동 전수조사에서도 누락돼 학교에 보내지 않더라도 확인하기 어렵다. 출생등록이 되지 않으면 건강보험에도 가입할 수 없어 의료 혜택에서도 배제된다. 현재 우리나라 가족관계등록법은 출생신고 의무를 부모에게 일임하고 있다. 또 부모가 신고하지 않는 경우에도 정부가 적극적으로 감독하거나 개입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부모가 출생신고를 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출생등록이 되지 않는 경우이다. 혼인 중 출생한 자녀는 법률상 남편의 자녀로 추정되기 때문에 실제 부(父)를 기재해 출생신고 하기 위해서는 지난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미혼부의 출생신고도 모(母)의 개인 정보 일체를 알지 못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쉽지 않다. 한국 국적이 없는 아동은 출생신고 할 수 있는 길이 아예 막혀 있다. 가족관계등록법상의 출생신고는 원칙적으로 한국 국적이 아닌 외국인에 대해서는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10여 년간 다수의 국제 인권 조약 기구가 우리 정부에 ‘보편적 출생등록 제도’를 도입하라고 권고했다. 아동에게는 ‘출생등록할 권리’가 있다는 점을 확인하고, 한국에서 출생한 모든 아동이 지체 없이 출생등록될 수 있도록 제도를 보완하라는 요구였다. 그러나 큰 변화는 없었다. 미혼부도 출생신고 할 수 있도록

한수정 아름다운커피 대표이사
[모두의 칼럼] 네슬레, 킷캣 초콜릿에서 공정무역을 지우다

커피 카카오 영역의 절대 강자 ‘네슬레’. 2009년 영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초콜릿바 ‘킷캣(KITKAT)’의 카카오와 설탕을 ‘공정무역 인증’ 제품으로 바꾸면서, 6000여 아프리카 농부들의 생계를 책임지겠다고 공언했다. 겨우 10년을 버텼다. 네슬레는 코로나와 기후 위기로 개도국 농업 섹터가 가장 취약해진 지난 6월, 공정무역 원료 구매 중단을 선언했다. 엄청난 계획이라도 있나 들여다봤더니 카카오는 ‘열대우림동맹인증(Rain Forest Alliance)’ 원료를, 설탕은 ‘비트’에서 추출한 영국산을 쓰겠단다. 그리고 점진적으로는 자사의 내부 인증 체계인 ‘코코아 라이프’를 준용하겠다는 설명이었다. 영국 최대의 공정무역 제품 취급점이라고 뻐기던 ‘세인즈베리’도 2017년 비슷한 일을 벌였다. 25만명의 공정무역 농가조합과 거래하던 차(tea) 라인에서 공정무역 인증을 뗐고, ‘fairly trade’라는 자사 로고를 붙인 PB 제품을 출시했다. 문제는 네슬레나 세인즈베리가 내놓은 어떤 계획도 농민들의 최저 임금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쉬운 방법으로 명분은 챙기고 비용은 절감한 셈이다. 공정무역 인증 마크가 나온 이후, 지난 15년간 선보였던 450여 개의 마크나 계획이 대체로 환경과 가치를 수호한다는 내용이니 어떤 마크가 ‘찐 마크’인지 식별해야 하는 소비자의 피로는 극심해진다. ‘권력과 통제(Power and Control)’. 거대 식품 기업이 밸류체인에서 갖기를 욕망하는 것들이다. 네슬레, 몬델라즈, 스타벅스 정도의 식품 기업들에 어쩌면 시장가격보다 높은 공정무역 가격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공정무역에 참여했다는 명분으로 마케팅하고, 별도의 사회공헌 없이도 가치를 창출할 수 있으니 비용 면에서 나쁜 거래는 아니다. 다만 공정무역 가격과 별도로 지불해야 하는 ‘공동체 발전기금(Social Premium)’이 그들의 마음에 걸릴 것이다. 농부들은 협동조합 내 위원회를 통해

[진실의방] 자연재난은 없다

불어난 황토물이 세차게 휘몰아친다. 인간이 애써 만들어놓은 모든 것을 가소롭다는 듯 유유히 쓸어버리는 힘. 물이 세상을 집어삼키는 모습은 언제 봐도 위협적이고 공포스럽다. 우리나라 전역에서 이런 장면이 펼쳐지고 있다. 이달 초부터 이어진 집중호우로 전국 곳곳이 물에 잠겼다. 산사태만 700건 가까이 발생했다. 전문가들도 이번 장마를 난감해하고 있다. 패턴을 예측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지구온난화가 우리나라 여름 기후에 영향을 미치면서 극단적 기상현상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우리나라 재난 분류 체계에 따르면 호우(豪雨)는 ‘자연재난’이다. 폭염·태풍·홍수·가뭄·지진 등도 자연재난에 속한다. 감염병 사태, 붕괴 사고, 침몰 사고 등 인간의 부주의나 고의로 발생한 재난은 ‘사회재난’으로 분류된다. 문제는 이런 유형 구분이 점점 무의미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재난을 사회재난으로 봐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환경파괴로 인한 기후변화로 자연재난의 빈도와 강도가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폭우나 폭염이 발생했을 때 그 피해가 사회적 약자에게 집중된다는 것도 자연재난을 사회재난으로 봐야 하는 이유다. 미국의 사회학자 에릭 클라이넨버그가 쓴 ‘폭염 사회’라는 책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1995년 여름, 단 일주일 만에 사망자 739명을 낸 ‘시카고 폭염 사태’를 추적한 책이다. 저자는 시카고 폭염을 단순한 자연재난이 아닌 사회비극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사망자 가운데 상당수가 혼자 사는 노인, 에어컨 없이 사는 빈곤층이었기 때문이다. 사회적 불평등이 소외 계층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게 이 책의 결론이다. 코로나19 사태가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호우라는 재난이 대한민국을 덮쳤다. 재난 대응 능력이 떨어지는 고령자들이 무심코 밖에 나갔다가 급류에 휩쓸려 사망했고,

[모두의법] 모든 놀이터가 통합놀이터가 되는 그날을 기다리며

“함께 놀자!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즐거운 공간.” 통합놀이터법개정추진단이 지난해 팝업 통합놀이터 행사에서 내걸었던 슬로건이다. 통합놀이터란 모든 어린이가 장애 유무나 장애 정도에 따라 차별받지  않고 놀 권리를 실현할 수 있는  놀이터를  의미한다. 풀어서 ‘무장애 통합놀이터’라고도 한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통합놀이터가 단순히 지체장애인의 접근성을 확보하는 장애인 전용 놀이터가 아니라는 점이다. 놀이터는 아이들이 단순히 놀기만 하는 공간이 아니다. 놀면서 배운다는 말이 있듯 놀이터는 놀이라는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 타인과 소통하고 서로 이해하는 법을 배우고 공동체 의식을 함양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놀이터에서부터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분리된다면, 서로 소통하고 이해할 기회를 갖기 어려워진다. 어린이들은 놀이터에서 장애인이 없는 반쪽짜리 사회만 경험하게 되는 셈이다. 장애와 비장애 통합교육이 강조되고 있는 요즘, 진정한 의미의 통합교육이 이루어지려면 놀이터에서부터 통합이 이뤄져야 하지 않을까.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통합놀이터를 실현하기는 쉽지 않다. 현재 통합놀이터가 일부 지역에 조금씩 설치되고 있기는 하지만, 법령상 제약 등으로 인해 매우 제한적인 상황이다. 현행 어린이놀이시설 안전관리법에는 장애가 있는 어린이가 접근할 수 있는 놀이시설 설치에 관한 규정이 없다. 어린이놀이시설을 설치하는 자는 어린이제품 안전 특별법 제17조에 따라 안전인증을 받은 어린이놀이기구를 행정안전부장관이 고시하는 시설기준과 기술기준에 적합하게 설치해야 하는데, 해당 기준에는 장애가 있는 어린이를 위한 놀이시설이 열거돼 있지 않다. 따라서 휠체어 그네와 같은 놀이시설은 어린이놀이터에 함께 설치될 수 없는 실정이다. 유엔아동권리협약 제31조,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제7조에 따르면 모든 아동은 장애 유무나 장애 정도에 따라 차별받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