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기후 유니버스] 청년을 위한 기후 일자리는 어디에

기후 관련 공론장에 참석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표현이 있다. 바로 ‘미래세대를 위한’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미래세대에 대한 부채감과 책임감을 불러일으키며 기후위기 대응의 당위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청년에게 이 말은 왜 공허하게 들릴까. 기후위기의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세대로 지목되면서도, 막상 정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청년은 주체가 아닌 ‘수혜자’나 ‘보호 대상’으로만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청년세대의 가장 절박한 관심사 중 하나는 단연 ‘일자리’다. 경총이 2022년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20~39세 구직자 1000명 중 20.4%가 향후 5년간 괜찮은 일자리가 많이 생길 분야로 ‘환경·에너지’를 꼽았다. 필자가 속한 단체에서도 ‘청년 일자리’와 관련한 행사를 개최했을 당시 예상보다 신청자가 몰려 모집 인원을 추가로 늘려야 했다. 행사 당일 불참자도 거의 없을 만큼 관심이 뜨거웠다. 그렇다면 청년들은 왜 여전히 기후 분야로 진출하는 길목에서 헤매고 있을까. 기후 분야의 일자리 전망은 밝다. 국제노동기구(ILO)에 따르면 파리협정 이행으로 2030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1850만 개의 일자리가 순증할 것으로 전망된다. 국내 연구에서도 비슷한 전망이 나온다. MIT 정치경제연구소와 그린피스가 공동으로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2030 NDC와 2050 탄소중립 목표를 달성할 경우 국내에서 2030년까지 최대 86만 개, 2050년까지 추가로 120만 개의 일자리가 창출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이러한 전망과 달리 현장에서는 인력난이 이어지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가 발간한 ‘세계 에너지 고용 보고서 2023’에 따르면, 글로벌 에너지 기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응답 기업의 58%가 숙련 인력 부족을 겪고 있으며, 40% 이상은 채용의 어려움이 사업

[AI 시대, 필란트로피를 묻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선의를 대신할 수 있는가

인공지능(AI)은 이미 우리의 일상뿐 아니라 기부와 모금, 복지와 사회공헌의 방식까지 바꾸고 있다. 누구에게 도움이 더 필요한지 분석하고, 잠재적 기부자를 찾아내며,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데 AI가 활용되고 있다. 앞으로 그 능력은 더욱 커질 것이다. 그렇다면 더 좋은 알고리즘이 더 좋은 사회를 만들어 줄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알고리즘은 인간의 능력을 확대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욕망과 편견, 불평등도 증폭시킬 수 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더 정확하게 찾아낼 수도 있지만, 데이터에 잘 포착되지 않는 사람을 오히려 더 철저히 배제할 수도 있다. 기부를 촉진하는 한편, 사람의 불안과 죄책감을 교묘하게 자극해 선의를 조종할 수도 있다. 따라서 AI 시대에 중요한 질문은 단지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다. 그 능력을 어디를 향해, 누구를 위해 사용할 것인지 물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 최근 주목받는 개념이 ‘알고레틱스(Algorethics)’다. 알고리즘과 윤리를 결합한 말로, AI가 지켜야 할 공정성·투명성·책임성·개인정보 보호 등의 원칙을 강조한다. 이러한 윤리적 기준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할까. AI가 단순한 도구를 넘어 인간의 관계와 제도, 노동과 교육, 복지와 민주주의까지 재구성하기 시작한 오늘날에는 더 큰 질문이 필요하다.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가’를 넘어 ‘우리는 기술과 함께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나는 최근 펴낸 책 ‘테크노-도’에서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한 하나의 나침반을 제안했다. ‘테크노-도(Technodao)’는 기술을 지배와 효율의 도구로만 보지 않고, 인간과 공동체, 자연이 함께 살아갈 길, 곧 ‘도(道)’의 문제로 다시 생각하자는 제안이다. 그 방향은

[AI 시대, 필란트로피를 묻다] 인공지능 시대, 대학은 다시 인간을 가르쳐야 한다

2006년 ‘모금학’을 만난 뒤 내게는 하나의 질문이 20년간 남아 있었다. 필란트로피는 이해에 머물러도 되는가, 아니면 삶을 바꾸는 실천으로 이어져야 하는가. 2017년 학회 창립 이후 필자가 찾은 답은 교육이었다. 학생들이 타인과 공동체에 관심을 갖고 스스로 행동을 선택하도록 돕는 것이 교육자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2017년 1학기 교양교육과정에 ‘필란트로피의 이해와 실천’을 개설한 지 올해로 10년째다. 낯선 용어를 고려해 ‘인간사랑의 이해와 실천’으로 과목명을 바꿨지만, 중심 질문은 그대로다. 핵심은 ‘필란트로피’보다 ‘실천’에 있다. 학생들은 관심 있는 사회문제를 찾고, 자신이 가진 시간과 능력을 돌아보며, 대학생인 지금 할 수 있는 작은 행동을 직접 실천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삶의 목적은 행복이며, 덕은 반복된 실천을 통해 형성된다고 보았다. 대학 교육은 로고스(이성), 파토스(공감), 에토스(품성과 태도)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전공교육이 문제를 이해하는 힘을 기르고, 문화예술과 교양교육이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폭을 넓혀 준다면, 에토스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지를 묻는다. ◇ 사회문제를 발견하고, 행동으로 옮기다 필자가 수업에서 특히 강조해 온 것도 에토스다. 필란트로피를 기부나 자선에 한정하지 않고, 타인과 공동체에 대한 관심을 행동으로 옮기는 태도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매 학기 학생들에게 한 가지 과제를 제시했다. “우리 사회의 문제 가운데 여러분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하나 찾아보십시오. 그리고 대학생인 지금, 여러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을 직접 해보십시오.” 학생들은 스스로 사회문제를 발견하고 주제를 정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해결 방법을 고민해

[People&Planet] 탄소 배출권은 무엇을 남기는가

케냐 나이로비 외곽 루이루의 한 공장. 태양광으로 가동되는 생산라인에서 1분에 한 대꼴로 조리용 화덕인 쿡스토브가 만들어진다. 기존 쿡스토브보다 숯 사용량을 40% 가까이 줄이고, 실내 연기는 60% 넘게 감소시킨 제품이다. 이 공장을 세운 케냐 기업 BURN은 2010년 작은 스타트업으로 출발해 지금까지 아프리카 12개국에 500만 대가 넘는 쿡스토브를 보급했다. 현재 케냐에서만 2500명 이상을 고용하고 있으며, 나이지리아에도 공장을 세웠다. 쿡스토브 생산과 보급을 통해 환경 개선은 물론 고용 창출과 아프리카 내수시장 확대에도 기여하고 있는 셈이다. BURN이 최근 몇 년 사이 급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탄소 배출권이 있다. 기후변화 대응은 결국 산업을 바꾸는 일이다. 같은 생산 활동을 하더라도 온실가스 배출이 없거나 적은 설비와 공정으로 전환하는 것이 저탄소 산업으로의 전환이다. 문제는 비용이다. 새로운 설비에 투자하는 데 큰돈이 들고, 기존 설비를 폐기할 때도 비용이 발생한다. 여력이 있는 선진국은 정부 예산과 금융을 통해 전환 비용을 감당할 수 있지만, 개발도상국은 그럴 여력이 부족하다. 개도국의 기후변화 대응이 번번이 자금 문제에 가로막히는 이유다. 이처럼 막힌 자금 조달의 통로를 열어줄 수 있는 것이 탄소 배출권이다. 흔히 탄소 배출권 구매를 기업이 비용을 지불하고 ‘탄소중립’을 달성하는 수단으로만 인식하기 쉽다. 그러나 개도국 입장에서 탄소 배출권은 외부 자금을 통해 산업 전환 비용을 조달하는 통로다. 탄소 배출권을 둘러싼 논쟁은 많지만, 제대로 설계한다면 개도국에 새로운 산업이 뿌리내리도록 돕는 마중물이 될 수 있다. ◇ 탄소 배출권, 개도국 산업 전환의

[필란트로피 인사이트] 왜 한국에는 매켄지 스콧이 없는가

2019년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Jeff Bezos)와 이혼한 매켄지 스콧(MacKenzie Scott)은 기존 필란트로피의 관행을 뒤집었다. 일반적으로 비영리단체는 재단이나 기부자에게 사업 제안서를 제출하고 심사를 거쳐 지원금을 받는다. 스콧은 이 절차를 없앴다. 직접 조사해 지원할 단체를 선정한 뒤 먼저 연락해 거액의 기부금을 전달했다. 단체 입장에서는 예상하지 못한 거액의 기부, 이른바 ‘윈드폴 기부(windfall gift)’였다. 지원 방식도 달랐다. 특정 사업에 사용하도록 용도를 지정하거나 별도의 성과 보고를 요구하지 않았다. 기부금을 어디에, 언제, 어떻게 사용할지는 받는 단체가 결정하도록 했다. 기부자가 자금의 사용처를 통제하던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비영리단체의 판단과 역량을 신뢰한 것이다. 스콧은 2019년부터 2025년까지 약 263억 달러(약 37조1200억 원)를 기부했다. 2025년 한 해에만 71억 달러(약 9조4810억 원)를 내놓았다. 별도의 재단을 설립하지 않고 기부 내역은 ‘일드 기빙(Yield Giving)’ 웹사이트를 통해 공개한다. 2024년에는 처음으로 공개 모집을 열어 6353개 지원 단체 가운데 361곳을 선정하고, 총 6억4000만 달러(약 8600억 원)를 지원했다. 그렇다면 아무런 조건 없이 거액을 받은 단체들은 이 돈을 어떻게 사용했을까. 미국의 필란트로피 연구기관인 효과적 필란트로피센터(CEP)는 스콧의 기부 효과를 3년간 추적 조사했다. 기부금을 받은 단체의 지원금 중간값은 500만 달러(약 66억 원)로, 일반 대형 재단의 보조금 중간값인 12만3000달러(약 1억6500만 원)보다 약 40배 많았다. 그러나 거액의 기부가 방만한 운영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와 달리, 2020년 기부금을 받은 단체들이 조사 시점까지 사용한 금액은 중간값 기준 전체의 60% 수준이었다. 기부 2년 뒤 이들이 보유한 운영자금도

[하지원의 에코 NOW] “몰랐다”는 변명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

열세 살 소니카는 세 살배기 남동생을 안고 산비탈을 달렸다. 누군가 홍수가 밀려온다고 소리쳤다. 어머니는 막내를 딸에게 맡겼고, 소니카는 어린 동생을 품에 안은 채 숲속으로 뛰었다. 뒤돌아보니 가족이 대대로 살아온 집이 거센 물살에 휩쓸리고 있었다. 부모님이 어디 계시는지도 알 수 없었다. 전화도 닿지 않았다. 지난 8월 26일 네팔에서 일어난 일이다. 유니세프가 전한 소니카의 이야기를 읽으며 한동안 마음이 먹먹했다. 다행히 소니카 가족은 살아남았다. 그러나 모두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이 재난으로 1,400명 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약 5천 명이 실종됐다. 그리고 불과 46일 뒤인 10월 11일, 네팔에는 또다시 산악 붕괴와 홍수가 찾아왔다. 이토록 무서운 재난은 정말 예측할 수 없었던 것일까. ◇ 위험은 예고됐지만, 피해는 공평하지 않다 사실 히말라야의 위험은 수십 년 전부터 경고됐다. 1990년대부터 과학자들은 녹아내리는 빙하와 빙하호 붕괴의 위험을 연구했다. 2001년 국제산악통합개발센터(ICIMOD)는 관련 보고서를 발표했고, 2008년과 2011년에는 히말라야의 변화와 주민들의 위기를 담은 다큐멘터리까지 제작됐다. 2023년에는 이 지역의 빙하 손실 속도가 이전 10년보다 65% 빨라졌다는 분석도 나왔다. 온난화로 빙하와 얼어붙은 지반이 약해지면서 산악 재난의 위험이 커지고 있다는 사실은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네팔의 연간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전 세계의 약 0.05%에 불과하다. 지구를 뜨겁게 만든 책임이 극히 작은 나라에서 어린 소녀가 동생을 안고 목숨을 걸고 달려야 했다. 문득 ‘공유지의 비극’이 떠올랐다. 모두가 함께 사용하는 목초지에 각자 소를 더 많이 풀어놓으면 이익은 개인에게

[사회혁신발언대] 벌새가 산불을 끌 수 있을까?

기후 위기, 빈곤, 차별과 양극화, 지역 소멸. 우리가 마주한 사회문제는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버겁다. 해마다 심해지는 폭염과 가뭄, 산불과 홍수를 보면 기후 위기가 얼마나 심각한지 실감하게 된다. 인류가 수백 년 동안 해결하려 애써 온 빈곤 문제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처럼 거대한 문제들을 우리는 과연 해결할 수 있을까. 필자는 영리기업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다 취업이나 시험에 실패한 뒤 사회에서 고립된 청년들에게 관심을 갖게 됐다. 사회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소셜섹터로 옮겼고, 사회문제 해결에 도전하는 기업가를 육성하고 투자하는 엠와이소셜컴퍼니(MYSC)에 입사했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일에 참여하고 있다는 보람도 있었지만, 기후 위기나 빈곤 같은 거대한 문제 앞에서는 종종 무력감을 느꼈다. 특히 회계라는 백오피스 업무를 담당하다 보니 내가 하는 일이 사회문제 해결에 어떻게 기여하는지 체감하기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 대표의 제안으로 책 한 권을 번역하게 됐다. 일본의 사회적기업 플랫폼 ‘보더리스 재팬’을 설립한 다구치 가즈나리 대표의 ‘사회문제의 90%는 비즈니스로 해결할 수 있다’였다. 사회문제의 90%를 해결할 수 있다고? 그것도 기부나 원조가 아니라 비즈니스로? 자신감 넘치는 제목에 의문을 품은 채 책장을 펼쳤다. ◇ 사회문제 해결에 수익을 다시 투자하다 ‘사회문제를 비즈니스로 해결한다’는 말은 익숙했다. 우리 회사가 추구하는 비전이기도 하다. 하지만 책에서 만난 보더리스 재팬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를 실현하고 있었다. 2007년 설립된 보더리스 재팬은 사회문제 해결에 도전하는 기업가를 육성하고, 이들이 창업하는 기업에 자본을 출자해 소셜 비즈니스의

[AI 시대, 필란트로피를 묻다] 마케팅 기술자의 종말, 다시 모금가의 본질로

올해 1월, 누구나데이터는 10년간 이어온 모금 교육을 중단했다. 기부자 데이터를 분석하는 법, 클릭을 유도하는 모금 페이지를 만드는 법, 모금 광고의 성과를 측정하는 법 등 비영리 실무자 2500여 명에게 가르쳐 온 내용이었다. 교육을 중단한 이유는 단순했다. 올해 안에 이 업무들을 AI가 사람보다 더 잘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필요 없어질 지식과 기술을 배우자고 사람들을 불러 모을 수는 없었다. 실제로 AI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당시의 판단은 점차 현실이 되고 있다. 과장된 전망만은 아니다. 미국의 AI 연구기관 METR은 AI 모델이 독립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과업의 복잡도를 사람이 해당 업무를 처리하는 데 걸리는 시간으로 환산해 분석한다. 2022년 챗GPT가 처음 등장했을 당시에는 사람이 약 30초 만에 끝낼 수 있는 수준의 과업을 수행했다면, 최근에는 14시간이 걸리는 과업까지 수행할 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러한 추세가 이어진다면 내년에는 하루, 내후년에는 일주일, 2029년에는 한 달이 걸리는 과업까지 처리할 수 있다는 전망도 가능하다. 물론 이는 특정 평가 방식에 따른 추정치이지, AI가 모든 업무를 해당 시간만큼 자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는 2024년 한 인터뷰에서 마케팅 전문가에게 맡겨 온 업무의 95%를 AI가 거의 즉시, 비용 없이 처리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가 예상한 시점은 5년 뒤인 2029년이다. 나는 이 예측이 결코 과장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로 우리 팀에서도 지난해까지 일주일이 걸리던 일부 업무를 이제는 하루 만에

[박훈의 나눔과 세금] 법정에서 배운 기부의 신뢰, 세법이 할 일

기부하면서 소송을 떠올리는 사람은 드물다. 소송까지 내다봤다면 애초에 지갑을 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판결문에는 기부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기부자가 대학을, 장학재단이 세무서를, 종교단체가 정부를 상대로 다툰 사건들이다. 소송은 신뢰가 깨진 자리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거꾸로 읽으면, 기부의 신뢰를 누가 지키고 누가 흔드는지, 그리고 세법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보인다. 기부에 세제 혜택을 더 주자는 말을 꺼내면 늘 같은 질문이 돌아온다. 공익법인을 어떻게 믿느냐, 결국 조세회피에 쓰이는 것 아니냐. 결론부터 말하면 이렇다. 믿는 일은 기부자에게 맡기고, 법과 정부는 꼭 필요한 안전장치만 두자. 의심을 앞세워 문을 닫아 두면 지켜지는 것은 세금이 아니라 의심이고, 잃는 것은 기부다. ◇ 뜻은 적힌 만큼만 지켜진다 2003년 한 향토기업인이 한 지방 국립대에 305억 원을 기부하기로 약정하고 195억 원을 먼저 냈다. 새 캠퍼스 땅값으로 쓰일 것이라 믿었는데, 대학이 상당 부분을 연구비와 건물에 쓰자 나머지 110억 원은 낼 수 없다며 소송을 냈다. 대학이 뒤늦게 유감을 표했지만, 재판의 결론은 달랐다. 약정서에 적힌 용도는 ‘캠퍼스 건설 및 연구지원기금’으로 넓었고, 용도를 적어 두었다고 해서 받는 쪽이 꼭 그대로 해야 할 의무를 지는 기부(법률 용어로 ‘부담부증여’)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이유였다. 2012년 대법원까지 결론은 같았다. 기부자는 마음을 냈고, 법원은 약정서를 읽었다. 기부자의 신뢰를 법이 지켜 주는 범위는 생각보다 좁다. 받는 쪽이 지켜야 할 의무를 분명히 적어 둔 기부라면 이를 어겼을 때 되돌릴 길이 있지만, 마음은 문서가 아니고

[사회혁신발언대] 경도인지장애, 진단 다음의 자리가 중요

“경도인지장애 진단을 받은 분들은 그다음 어디로 가시나요?” 지난 9월 서울 은평구청에서 열린 ‘건강이웃’ 사업 성과공유회에서 한국에자이 관계자가 던진 질문이다. 한국에자이와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서울광역치매센터, 은평구치매안심센터가 처음 사업을 논의할 때부터 반복해서 제기했던 문제이기도 하다. 보건복지부의 2023년 치매역학조사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인의 치매 유병률은 9.25%다. 여러 조사에서는 국내 경도인지장애(MCI) 추정 인구가 300만 명에 육박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경도인지장애는 정상적인 노화에 따른 인지 변화와 치매의 중간 단계로, 치매로 진행될 위험이 높은 상태다. 은평구치매안심센터 유미숙 부센터장에 따르면 경도인지장애가 있는 사람은 정상 인지기능을 가진 사람보다 치매로 진행될 위험이 4~5배 높다. 치매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정작 치매로 이어질 수 있는 이 중요한 시기에 우리 사회가 제공하는 지원은 충분하지 않다. 진단은 받았지만, 그 이후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찾기 어렵다. 이번 성과공유회에서 만난 한 경도인지장애 당사자도 비슷한 시간을 보냈다. 약속을 자주 잊어버려 주변에서 검사를 권유했지만, 자존심이 상해 검사를 미뤘다고 했다. 사람들과의 만남도 피했다. 집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발음이 어눌해지고 몸과 마음이 점점 병들어가는 것을 느꼈다고 털어놨다. 그렇게 사회와 멀어지던 그에게 변화의 계기가 찾아왔다. 한국에자이와 한국노인인력개발원의 지원으로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 은평구에서 5개월간 시범 운영한 ‘MCI 노인일자리’ 사업이었다. 이 사업은 경도인지장애 진단을 받은 어르신 10명과 기존 노인일자리 참여자인 ‘건강이웃’ 10명을 짝지어 함께 활동하도록 설계됐다. 참여자들은 매주 가정을 방문하며 서로 관계를 맺고 사회활동을 이어갔다. 사업에 참여한

서명지 CSR Impact 대표 섬네일
[People&Planet] 친환경 굿즈를 팔아 기부하면, 좋은 사회공헌일까

“쓰임이 다한 자원을 수거해 고품질의 새 제품으로 만들고, 판매 수익금은 소외된 이웃에게 기부합니다.” 이 설명에는 여러 좋은 뜻이 담겨 있다. 자원을 아끼고, 소비에 의미를 더하며, 누군가를 돕겠다는 약속이다. 그러나 약속이 많을수록 확인해야 할 것도 많아진다. 재료를 재활용했다는 사실이 제품의 품질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제품이 팔렸다고 해서 불필요한 소비가 줄어든 것도 아니며, 수익금을 기부했다고 해서 수거와 재생 과정의 환경성이 저절로 입증되는 것도 아니다. 캠페인에 투입된 예산과 실제 판매량, 재고, 기부금 산출 방식까지 함께 살펴야 한다. 기부금이 매출의 일부인지, 비용을 제외한 순이익인지에 따라 그 규모와 성격은 달라진다. 기업이 제작비와 구매비를 지원해 임직원에게 배포한 물량이라면 일반 소비자의 실질적인 수요로 보기도 어렵다. 기부금이 전달된 이후 어떤 변화를 만들어냈는지도 별도로 확인해야 한다. 환경적 성과와 제품의 쓰임, 기부의 실질적인 효과를 각각 검증해야 비로소 캠페인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 ◇ 우유팩 수거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모았나’가 아니다 카페에서 라떼 몇 잔을 만들고 나면 빈 우유팩 하나가 남는다. 손님이 떠난 뒤에도 매장의 일은 이어진다. 우유팩을 씻어 말리고, 접어서 모아 누군가에게 건네는 일이다. 자원순환을 기획할 때는 이 작은 행위의 ‘다음 순서’를 물어야 한다. 누가 처리하는가. 어떤 경로로 이동하는가. 그 비용은 누가 부담하는가. CSR impact가 코레일유통과 우유팩 회수 체계를 구축한 것도 이러한 질문에서 출발했다. 전국 철도역사의 직영 카페와 임대 매장을 대상으로 코로나19 이전과 일상 회복 단계의 우유 주문량을 분석했다. 이를

노재권 코즈웍스 썸네일
[People&Planet] 지구톡톡과 지톡이가 보여준 CSR의 다음 장면

사람들의 마음에 이름으로 남아야 오래간다. 다시 찾고 이야기하며 자기 방식으로 참여하게 될 때, CSR은 기업의 브랜드 자산이 된다. 매주 수요일 오전 10시, 2000여 개의 자리가 열렸다. 그리고 1~2분이면 신청이 끝났다. 콘서트 예매 이야기가 아니다. 다회용 빨대와 텀블러를 더 자주 들고 다니자는 기업의 친환경 CSR 캠페인 이야기다. 1~2분이라는 숫자만 보면 인기 많은 물건을 나눠준 호객용 이벤트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물건을 받은 뒤 실제로 사용했고, 자신의 일상 속 장면을 인증사진으로 남겼다. 다음 해에도 다시 참여했고, 자신을 ‘지톡이’라 부르며 자신들만의 환경 자아를 만들어냈다. 사람들은 좋은 취지에는 쉽게 공감하지만, 조금만 번거로워도 행동을 미룬다. 그렇기에 실천을 권하기 전에 무엇이 불편한지부터 살펴야 한다. 지난 20년 가까이 CSR 현장에서 내가 늘 ‘참여자 친화형 캠페인’을 제안해 온 이유다. GS칼텍스의 지구톡톡은 그 불편에서 시작했다. 2023년에는 다회용 빨대를 완전히 펼쳐 안쪽까지 씻을 수 있게 만들고, 가방에 걸 수 있는 키링형 케이스를 더했다. 이듬해에는 “큰 가방에 텀블러를 넣으면 샐까 걱정되고, 전용 가방을 따로 들기는 번거롭다”는 시민 의견을 반영했다. 그 결과 텀블러백과 장바구니를 합친 투인원 제품이 나왔다. 사람을 바꾸려 애쓰기 전에 행동하기 쉬운 환경을 먼저 만들었다. 행동 도구는 지구톡톡을 설명하는 물건이면서, 캠페인의 이름을 일상에서 떠올리게 하는 역할을 했다. 첫해 시민 1만 명에게 빨대가 전달됐고 인스타그램 행동 인증 3939건이 확인됐다. 다음 해에는 참여자가 2만 명으로 늘었고 인증은 8434건을 기록했다. 물론 무료

더나은미래 특별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