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비영리 조직 문화
단기간에 조직 성장 – 관리 필요성 커지자 기업 출신 임원 등 영리 문화 무차별 도입
美 ‘유나이티드웨이’ – “이 일을 왜 해야 할까, 무엇을 성과로 봐야 할까” 온라인에서 사람들과 토론, 함께 의사결정… 소속감 강해
“이 회사는 가치 있는 일을 위해 자기를 희생해야 하는 곳이다. 엄청난 업무량과 직원 수 부족으로 하루 평균 근무는 13시간에 이른다. 직원의 행복을 먼저 생각하는 조직이 되지 않는다면 내가 떠나는 것이 맞겠다.”(A비영리단체)
“우리 기관, 목적대로 앞으로 나아갑시다. 외형을 위해 일하는 것 말고요. 그리고 함께 일하는 사람이 중요한 것을 잊지 마세요. 좋은 일 한다는 명분은 자랑스럽지만 내가 하는 업무가 좋은 일과 잘 연결되고 있는 것인지 대답이 곤란한 곳.”(B비영리단체)
“막연하게 좋은 일 해보려고 선택한다면 다시 한 번 고민해보길. 여기도 똑같은 직장이다. 위에선 항상 자신들의 의견을 관철하려 하고 듣지 않음. 아래 직원들이 자신이 원하는 의견을 낼 때까지 압박하고 그 의견을 내면 자신이 원해서 한 게 아니고 소통을 통해서 의사결정 했다고 함.”(C비영리단체)
익명으로 국내 기업 정보를 공유하는 평가 사이트 ‘잡플래닛’에 올라온 비영리단체 전·현직 직원들의 목소리다. 소통 부재, 보수적인 조직 문화, 지나친 모금 압박…. 잡플래닛에 올라온 비영리 종사자들은 하나같이 ‘뜻을 찾아왔지만 비전을 찾기 힘들다’고 토로했다.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전문가들은 “성과를 위한 기업 경영 방식의 무분별한 도입으로 토론 문화가 사라지고 비영리 조직 문화가 관료화된 게 큰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미션과 비전, ‘보텀업(bottom-up)’ 공유돼야
“지난 몇 년간 국내 비영리 조직들은 엄청난 양적 성장을 이뤘습니다. 규모 있는 곳은 10배 가까이 팽창했어요. 조직 관리가 필요해졌고, 기업 방식을 도입해야 한다는 생각에 대기업 출신 임원들을 모셔오면서 영리기업 문화가 무차별적으로 들어왔어요. 그러다 보니 결과적으로 비영리의 단점과 기업의 단점만 모아놓은 셈이 됐습니다. 비영리 조직이 건강해지려면 비전과 미션이 탄탄한 상태에서 시스템이 갖춰지고 사람이 들어와야 하는데, 국내 대부분의 비영리단체는 가장 핵심 가치인 비전이나 미션은 공유가 안 되는 상태에서 시스템만 강조된 거죠.” 박일준 KCMG 한국갈등관리본부 대표의 말이다.
조직 관리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비영리 조직들이 늘면서 최근에는 단체 전체가 컨설팅을 받기도 하고, 사회적기업 슬로워크처럼 아예 최고지속가능경영책임자(Chief Sustainability Officer)를 채용한 곳도 있다. ‘생명의숲’이 그런 사례다. 1998년, 외환위기 당시 공공근로사업을 통해 숲 관련 다양한 사업을 진행해 온 ‘생명의숲’은 올해로 17년 된 조직이다. 2007년까지는 상근자 30여명, 연간 예산 약 80억원 규모로 커졌지만, 지난 7년간은 다소 침체된 분위기가 이어져 왔다. 지난해 ‘생명의숲’ 은 팀장 5명을 시작으로 조직의 비전과 미션을 재확립하고 건강성을 회복하기 위한 외부 교육을 3개월간 받았다. 올해 1년간은 전 구성원, 지방 활동가, 운영위원 및 이사진이 참여하는 대대적인 ‘재수립’ 과정이 이뤄질 예정이다. 유영민 생명의숲 사무처장은 “단체 설립 초창기에는 비전과 미션, 가치에 대해 조직 내부 공감대가 컸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내부 조직원끼리 지향하는 바가 달라졌다는 느낌이 들더라”며 “올해는 조직원 각자가 지향하는 미션, 가치를 찾고 그것을 이끌어 내 모두가 공감하는 교집합을 찾아 새로운 내부 동력을 만들어 갈 예정”이라고 했다.
◇130년 살아남은 조직이 소통하는 법
지난해까지 미국 최대 모금단체인 유나이티드웨이(United Way)에서 일했던 이재현 NPO스쿨 대표는 “130년이 되도록 유연하게 움직이는 비결을 들여다보니, 조직 내부에서 미션과 비전을 중심으로 한 활발한 토론 문화가 핵심”이라고 말했다. 유나이티드웨이는 올해로 128년, 연간 모금액 52억달러(약 5조7000억원), 세계 곳곳 1800여개의 지부를 두고 있다.
“자고 일어나면 메일함에 미국 본부, 유럽, 아시아, 남미 등 세계 각지에서 온 메일이 30통도 넘게 쌓여 있었어요. 그중에 직접적으로 업무 요청하는 메일은 한두 통 정도이고, 나머지는 온라인으로 하는 토론이에요. 관련된 사람들을 모두 수신자나 참조로 넣어서 열댓 명이 넘는 사람들이 메일로 의견을 주고받는 겁니다. 처음에는 ‘나랑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러나’ 싶더니, 몇 개월 지나고 보니 ‘이게 이 조직이 돌아가게 하는 핵심 원리구나’ 싶더라고요. 조직에서 어떤 일이 돌아가는지 맥락을 알게 되고, 어떤 결정도 위에서 정해서 통보하는 게 아니다 보니 소속감이나 애정도 강해지고요.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소통의 강력한 원리가 담겨 있다는 걸 깨달았죠.”
한번은 한국 공동모금회에 관련한 내용으로 온라인 토론이 있었다고 한다. CEO도 수신자에 포함됐던 사건이었는데 A로 결정할지, B로 결정할지를 두고 의견이 갈렸다. 그런데 CEO가 마지막에 “한국을 제일 잘 아는 재현이 어떻게 할지 확정(confirm)할 것”이라며 토론을 마무리했다. 이재현 대표는 “당시 조직원이자 책임자로 인정받은 느낌에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고 한다. 하지만 3개월 후 그가 내린 결정이 잘못된 것으로 판명 났다. 이후 유나이티드웨이 조직의 반응은 국내와 판이했다. 그한테 책임을 묻는 게 아니라 ‘실패의 원인’에 대해 다 같이 워크숍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이를 통해 조직원들은 “내가 공부하고, 내가 스스로 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책임감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토론 내용을 들여다보면 업무 정보가 아니라 단체의 근본적인 가치들에 대한 거예요. ‘왜 해야 할까’, ‘한다면 무엇을 성과로 봐야 할까’, ‘지역사회의 지지를 얻을 수 있을까’ 같은 것들을 끊임없이 묻고 또 물어요. 토론으로 큰 내용에 대한 합의를 거치면, 세세한 내용은 실무자에게 믿고 맡겨 버립니다. 중요성에 공감했다면, 그때부턴 각자가 창의성과 역량을 동원해 잘하라는 거죠.”
이재현 대표는 “비전과 미션이라는 근본 가치에 대한 토론 없이 사업 계획, 아이디어, 모금같이 기술적인 부분으로만 논의가 이뤄지다 보면, 결국엔 윗사람 아이디어로 내용이 정해질 게 뻔하다는 생각에 직원들은 자기 주체성을 잃고, 사업 성과에 대한 합의가 없다 보니 사업을 끌어나가는 중간에도 힘을 잃는다”고 말했다.
한동우 강남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비영리 조직에서 제일 중요한 건 사람이고, 이들이 본인의 성장과 조직의 성장을 통합할 수 있는 시스템이 돼야 한다”며 “분명한 미션과 비전 정립이 이뤄지고 그 기준에 맞게 필요한 사업들이 정리될 때, 조직원은 몰입할 수 있고 사회적 임팩트는 높아지는 선순환이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주선영 기자
권보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