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소셜섹터 시장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일까. 그 힌트를 아시아의 사회적가치 창출 지원기관이 한데 모인 ‘아시아 벤처 필란트로피 네트워크(AVPN) 글로벌 콘퍼런스’에서 찾을 수 있다. 올해 AVPN은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렸다. 여러 세션 가운데 투자 형식으로 자선사업을 펼치는 ‘벤처 필란트로피’ 관련된 세션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된 세 가지 키워드가 있다. 바로 ‘신뢰 기반(Trust based)’과 ‘담대한 필란트로피(Bold Philanthropy)’, 그리고 ‘패밀리오피스(Family Office)’였다.
기부자와 단체 간 신뢰 기반의 필란트로피
벤처 필란트로피에서 기부자와 기부금·보조금을 받는 단체 간의 신뢰를 강조하는 담론이 등장한 배경은 바로 팬데믹이다. 2년 넘게 이어진 코로나바이러스 대유행은 국제개발과 비영리 사업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개발도상국의 국제개발 분야는 기부자와 현지 단체가 지리적으로 나뉘어 있어 국가·지역 간 이동이 어려워지면서 현지 단체에 현장 사업 운영을 믿고 맡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말레이시아 청년들을 위한 리더십 개발 프로그램인 ‘아큐먼 아카데미 말레이시아(Acumen Academy Malaysia)’다. 말레이시아 ‘YTL 재단’과 세계적인 비영리 벤처캐피털 ‘아큐먼’은 갑작스러운 팬데믹 때문에 최초의 온라인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글로벌 강사와 참가자 사이 시차, 온라인 교육의 효과성 등 염려가 있었지만, 지금까지 아큐먼의 발자취를 믿고 새로운 도전을 결심했다.
팬데믹이라는 역경이 필란트로피 영역에서 새롭고 혁신적인 도전을 촉진하게 된 것은 아이러니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새로운 도전 과정에서 얻은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축적된 협업 경험들은 기부자와 단체 간의 신뢰를 다지며 필란트로피로의 변화를 이끌고 있다.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담대한 필란트로피
그동안 임팩트 투자가 보다 역동적이고 과감한 방향으로 진화해 온 것에 비해 자선 기부는 아직 수혜자에게 직접적인 혜택을 줄 수 있는 임팩트 창출에 집중해 왔다. 하지만 올해 콘퍼런스에서는 담대한 필란트로피를 주창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소득 불평등, 기후변화, 교육격차와 같은 어려운 사회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장기적으로 과감한 규모의 지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기부자와 세상을 바꿀 담대한 솔루션을 연결하는 맞춤형 필란트로피 기금을 운영하는 기관인 ‘레버포체인지(Lever for change)’는 지금까지 총 11번의 기금 공모로 약 2조원 가까운 기금을 145개 사회 목적 조직들에 연결했다. 상향식 프로젝트 기획과 큰 규모의 지원금, 자유로운 기부금 사용은 사회적가치 창출 조직들이 덕분에 기존과는 다른 상상력으로 문제에 접근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담대한 필란트로피의 등장은 사회변화를 만드는 사회적가치 창출 조직에 대한 기부자들의 기대 변화를 반영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제 기부자는 근본적인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사회 목적 조직에도 최신의 기술과 지식을 활용하기를 기대하며, 동시에 임팩트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도록 당장의 실패를 용인할 수 있는 포용적인 관점으로 변화하고 있다.
필란트로피 생태계에 존재감을 드러낸 패밀리 오피스
앞선 두 담론이 등장한 배경에는 아시아 ‘패밀리 오피스’의 성장이 있다. 최근 아시아 경제의 성장으로 부유한 가문의 수가 빠르게 증가했고, 가문의 가치와 문화를 확산하는 필란트로피 사업을 펼치는 패밀리 오피스의 수도 함께 성장했다. 특히 싱가포르는 다양한 기업 친화적 혜택을 적극 제공하여 지금까지 약 1100개 패밀리 오피스들이 설립됐다.
콘퍼런스에서는 필리핀,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국가의 패밀리 오피스들의 임팩트 투자 전략과 벤처 필란트로피 진행 과정이 사례 중심으로 소개됐다. 장기적이고 유연한 투자를 할 수 있는 인내 자본으로서 패밀리 오피스의 역할을 스스로 인지하고, 새로운 시도를 거듭하여 과감한 시스템 변화를 만들어 가고자 하는 의지가 인상적이었다.
패밀리 오피스 시스템은 서구 문화에서 비롯됐다. 이 때문에 아시아 고유의 가치를 접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담론으로 나아갔다. 아시아인에게 가족은 좀 더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이야기하며 ‘여기서 우리 함께 아시아의 새로운 필란트로피를 만들어 갑시다’라며 자신감을 내비치기도 했다.
국내에서 시도되고 있는 벤처 필란트로피
국내에도 상향식 프로젝트 제안 공모사업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담대한 규모의 지원사업가 등장하고, 신뢰 기반의 관계도 강조되고 있다. 새롭게 주목받는 비영리스타트업 생태계가 그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다. 아산나눔재단, 다음세대재단, 루트임팩트, 브라이언임팩트 등 다양한 중간지원조직이 사회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비영리 조직을 벤처 필란트로피 방식으로 지원하고 있다.
벤처 필란트로피 확산의 기저에는 소득불평등, 기후변화, 교육격차 등 전 지구적 문제를 해결하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루기 위해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는 절박감이 있다. 다가올 새해에는 국내에도 기부자와 사회적가치 창출 조직이 서로를 더욱 신뢰하고, 담대한 도전을 할 수 있는 벤처 필란트로피가 점차 늘어나기를 기원한다.
나민수 아산나눔재단 선임매니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