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대담한 자선 ‘빅벳 필란트로피’
전 세계 억만장자들이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수백억원에서 수조원에 달하는 돈을 ‘베팅’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빅벳 필란트로피’라고 불리는 새로운 방식의 기부다. 빅벳 필란트로피는 ‘거액의 판돈’을 뜻하는 빅벳(Big Bet)과 ‘기부’를 뜻하는 필란트로피(Philanthropy)가 합쳐진 말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치 베팅하듯이 큰돈을 내놓는 자선 활동을 의미한다. 8조7000억원이라는 큰돈을 투입해 인류의 오랜 숙제였던 ‘소아마비 퇴치’에 성공한 빌 게이츠(Bill Gates)의 기부가 대표적인 ‘빅벳’ 사례다. 한국에서도 브라이언임팩트 재단을 중심으로 빅벳 필란트로피가 시도되면서 기부 문화의 흐름이 바뀌고 있다.
소아마비 종식에 얼마가 필요할까?
소아마비는 폴리오(polio) 바이러스에 의해 발병하는 질환으로 열병을 앓고 나서 신체 일부가 마비되는 후유증을 남긴다. 백신이 개발되면서 선진국에서는 자취를 감췄지만, 아프리카와 중동 등 저개발국에서는 2000년 이후에도 매년 수천 명의 아이가 소아마비로 장애를 얻었다.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창립자인 빌 게이츠는 2000년 ‘빌앤멀린다게이츠재단’을 설립한 뒤 ‘소아마비 종식’을 선언하며 막대한 규모의 지원금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베팅’을 시작한 것이다.
게이츠재단이 지난 20여 년간 ‘세계소아마비퇴치운동(GPEI)’이라는 단체에 기부한 돈은 62억달러(약 7조8000억원)에 이른다. 대규모 지원금 덕에 변종 바이러스에 대응하는 백신이 지속적으로 개발될 수 있었고 백신 보급도 원활하게 이뤄졌다. 그 결과 2022년 기준 전 세계 소아마비 발병은 30건을 기록했다. 사실상 소아마비가 종식된 셈이지만 게이츠는 완전히 뿌리가 뽑힐 때까지 지원을 계속한다는 입장이다. 그는 “소아마비 발병 사례가 마지막으로 발생한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에 지원을 안정적으로 이어간다면 앞으로 3~4년 안에 소아마비를 완전히 정복할 수 있다”며 “소아마비는 천연두 이후 인류가 정복한 두 번째 질병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빅벳 필란트로피 현황을 주기적으로 조사해 발표하는 비영리 재단 브리지스판그룹은 빅벳 필란트로피의 기준을 비교적 명확하게 제시한다. ▲사회문제 해결이나 사회 변화를 목표로 ▲하나의 단체 혹은 단일 프로젝트에 ▲2500만 달러(약 310억원) 이상을 지원하는 경우를 빅벳 필란트로피로 규정하고 통계에 포함한다. 대학교, 병원, 박물관, 공연장 등에 대한 ‘단순 기부’는 금액이 커도 빅벳 통계에서 제외시킨다. ‘사회문제 해결’이라는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 한다는 게 빅벳 필란트로피가 전통적인 고액 기부와 구별되는 지점이다.
빅벳 필란트로피라는 개념이 등장한 건 2009년 스탠퍼드소셜이노베이션리뷰(SSIR) 봄호에 ‘빅베터(Big Bettor)’라는 용어가 사용되면서다. ‘비영리 조직의 자금 조달을 위한 10가지 모델’이라는 칼럼에서 ‘사회 변화를 위해 큰돈을 내놓는 자산가’를 빅베터라 칭했다. 이듬해 억만장자들이 재산 절반을 기부하기로 서약하는 캠페인 ‘더기빙플레지(The Giving Pledge)’가 시작되면서 빅벳 필란트로피는 본격적으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당시 26세의 최연소 서약자로 이름을 올린 페이스북 공동 창립자 더스틴 모스코비츠는 아내 카리 튜나와 함께 ‘오픈필란트로피재단’을 설립하고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매년 4억달러(약 5000억원) 이상을 기부하고 있다. 블룸버그통신 창립자이자 뉴욕 시장을 지낸 마이클 블룸버그도 대표적인 빅베터다. 블룸버그는 전 세계적인 금연 운동을 위해 지금까지 약 6억달러(약 7600억원)를 기부했다.
크고 복잡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제의 규모에 맞는 ‘큰 자본’이 투입돼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윌리엄 포스터 브리지스판그룹 파트너는 “지난 수십 년간 성공을 거둔 사회운동의 대다수가 최소 1000만달러 이상의 자선 기부를 받았다”면서 “빅벳은 비영리단체들이 모금에 소모하는 에너지를 줄여 사회문제 해결의 전략을 개발하는 데 집중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기부금 이상의 큰 효과를 낼 수 있다”고 말했다.
3년 만에 17조원을 기부한 여성
브리지스판그룹에 따르면 2015년 57억5200만달러(약 7조3000억원)였던 미국의 빅벳 필란트로피 규모는 2020년 120억1200만달러(약 15조2400억원)로 5년 새 배 이상으로 성장했다. ‘베팅’이라 불릴 정도의 큰 기부금을 투입해서라도 사회변화를 만들고자 하는 억만장자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뜻이다. 그 중심에 ‘기부왕’ 빌 게이츠가 있다. 2015~2020년 빌앤멀린다게이츠재단의 빅벳 기부 총액은 117억300만달러(약 14조8800원). 이 기간 미국 전체 빅벳(400억4800만달러)의 29.2%를 차지하는 금액이다.
지난 2020년, 빌 게이츠가 주도해 온 기부 판을 발칵 뒤집어 놓은 여성이 나타났다. 1년 만에 무려 26억600만달러(약 3조3100억원)를 기부한 매켄지 스콧(Mac Kenzie Scott)이 그 주인공이다. 스콧은 2019년 아마존 창업자인 제프 베이조스와 이혼하면서 베이조스가 가지고 있던 주식의 25%를 위자료로 받았다. 위자료로 받은 주식의 가치는 당시 기준으로 약 380억달러(약 48조원). 단숨에 전 세계 여성 부자 순위 4위에 이름을 올린 스콧은 그해 5월 ‘더기빙플레지’에 재산 절반을 기부하겠다는 서약을 했다.
스콧은 전통적 기부 방식을 거부하고 직접 팀을 꾸려 이듬해부터 본격적인 ‘빅벳’을 시작했다. 지난 3년간 스콧이 내놓은 기부금 총액은 약 140억달러(약 17조7870억원). 3년 만에 보유 자산의 약 36.8%를 기부했다. 스콧의 기부금은 인권, 장애, 민주주의, 기후변화 등을 위해 일하는 비영리단체 1604곳에 뿌려졌다.
기부 속도도 파격적이지만 더 흥미로운 건 단체를 선정하는 방식이다. 먼저 후보를 추리기 위해 ‘조용한 조사’를 수행한다. 서류로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을 우선으로 챙기면서 재정 상태, 실적, 리더십 등을 평가한다. 여기까지는 비공개로 진행한다. 후보에 올랐다는 사실만으로도 비영리단체에 부담을 주고 업무를 방해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모든 조사를 마친 후 지원이 확정되면 단체에 연락해서 결과를 알리고 지원금을 지급한다.
모든 기부 내역은 웹사이트 ‘일드기빙(Yield Giving)’을 통해 공개하고 있다. 단체 이름, 기부 금액, 기부 시점, 활동 지역, 해결하려는 과제 등을 상세하게 살펴볼 수 있다. 스콧은 “별도의 요청이 없는 경우 지원금은 모두 즉시 지급된다”면서 “유연한 조직의 운영을 위해 사용처에는 제한을 두지 않는다”고 밝혔다.
공정하고 꼼꼼한 확인과 검증을 거쳐 신중하게 지원 단체를 선정하고, 선정한 뒤에는 단체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보여주는 방식은 빅벳 필란트로피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이다. 단체에 과도한 서류나 영수증을 요구하는 경우도 없다. 인건비, 운영비, 연구비 등 단체가 가장 필요한 곳에 지원금을 사용하게 한다.
빅벳 필란트로피의 또 다른 특징은 사회문제에 대한 본질적인 해결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반창고를 붙이는’ 식의 단기적인 솔루션이 아니라 장기적 관점에서 시스템을 바꿀 수 있는 단체를 찾아 기부한다. 미국의 만성적 노숙인 문제를 해결하는 비영리단체 ‘커뮤니티솔루션’이 맥아더재단으로부터 2021년 1억달러(약 1200억원)의 기부금을 받은 것도 증상의 개선보다 시스템에 집중하는 단체라는 평가 때문이다. 실제로 커뮤니티솔루션은 특정 도시의 노숙인 인구 수를 기능적으로 제로(0)로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해 성과를 냈다. 커뮤니티솔루션은 이번 맥아더재단의 빅벳으로 향후 5년간 미국 내 75개 지역의 노숙인 문제를 해결하는 효과적인 시스템을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브라이언임팩트가 쏘아 올린 ‘한국형 빅벳’
신뢰를 바탕으로 과감한 지원을 펼치는 ‘빅벳 필란트로피’가 한국에서도 시작되고 있다. 시동을 건 사람은 김범수 카카오 전 의장이다. 김범수·형미선 부부는 2021년 3월 ‘더기빙플레지’에 재산의 절반을 기부하겠다는 서약을 하며 220번째 멤버로 이름을 올렸다. 한 달 전에 먼저 서약한 우아한형제들 김봉진 의장 부부에 이어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 기빙플레지 멤버가 된 것이다.
김범수 전 의장은 재산 절반 기부를 약속한 지 3개월 만에 자신의 영어 이름 ‘브라이언’을 딴 공익 재단 ‘브라이언임팩트’를 설립해 빅벳 필란트로피를 실현 중이다. IT·과학 섹터, 소셜 섹터의 사회혁신가와 조직에 ‘빅벳’ 하겠다는 게 재단의 목표다. 국내 사회혁신가를 지원하는 ‘카카오임팩트 펠로우십’과 사회혁신 비영리단체의 스케일업을 돕는 ‘임팩트 그라운드’ 등이 대표 사업이다.
특히 임팩트 그라운드는 ‘스케일업’이 필요한 비영리단체에 최대 수십억 원의 자금을 지원하는 사업으로 지금까지 21개 단체에 총 250억원이 기부됐다. 미국의 빅벳 수준은 아니지만 ‘프리빅벳(Pre-Big Bet)’에 해당하는 규모다. 김정호 브라이언임팩트 이사장은 “인큐베이팅이나 액셀러레이팅 등 비교적 초기 단계의 비영리단체를 돕는 사업들은 종종 있었지만, 어느 정도 검증된 솔루션을 갖춘 단체를 ‘스케일업’해서 임팩트를 확산할 수 있게 도와주는 프로그램은 국내에 없었다”고 했다. 해결책을 가진 비영리단체가 임팩트를 확산하고 실질적인 사회변화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한 단계 더 큰 도약이 필요한데, 이 부분에 대한 지원이 막혀 있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김정호 이사장은 “스케일업 단계에서는 인력이나 조직에 대한 투자가 필요한데 대부분의 기부자들은 즉각적인 성과를 확인할 수 없는 이런 투자에 관심이 없다”면서 “임팩트 그라운드는 이 공백을 메워주기 위해 시작한 사업”이라고 했다.
큰돈을 지원하는 만큼 단체 선발 과정은 매우 촘촘하다. 외부 전문가로부터 후보 조직을 추천받은 뒤 브라이언임팩트에서 직접 대면 인터뷰와 현장 실사를 진행한다. 사회문제를 해결했을 때 발생하는 사회적 가치의 크기, 이를 실현하기 위한 혁신적인 프레임워크, 유의미한 성공 경험 등을 확인한다. 최종 검증은 파트너 기관에서 맡는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지원 단체가 하나의 솔루션으로 모델링이 되고, 이 모델을 확산해 전체 시스템을 바꾼다는 목표다.
1기(2022년도)와 2기(2023년도) 임팩트 그라운드 사업에는 ▲서울재활병원(50억원)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아동복지실천회 세움(이상 30억원) ▲세상을품은아이들 ▲여성환경연대 ▲인권재단 사람 ▲푸른나무재단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녹색연합 ▲점프 ▲피치마켓(이상 10억원) ▲공익법센터 어필(8억원) ▲빅이슈코리아 ▲지리산이음(이상 5억원) ▲동아시아 바다공동체 오션 ▲미래교실네트워크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 ▲핸드스피크(이상 3억원) ▲공익활동가 사회적협동조합 동행 ▲비투비 ▲열린옷장(이상 2억원) 등이 선정됐다.
김정호 이사장은 “선정된 단체들의 성장 과정을 지켜본 뒤 향후 본격적인 ‘빅벳’을 시작할 예정”이라며 “규모는 한 단체당 수백억 원에 달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의 기부 제도나 환경이 미국과 전혀 다르기 때문에 미국의 빅벳 방식을 가져와 적용할 경우 임팩트가 나오기 어렵다”면서 “한국의 상황에서 가장 잘 작동할 수 있는 ‘한국형 빅벳’ 방식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시원 기자 blindletter@chosun.com
문일요 기자 ilyo@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