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금)

시나리오부터 편집까지… 무주고 학생들의 ‘영화 제작기’

[굿네이버스 드림하이 프로젝트]

5년째 멘토링과 촬영 비용 지원
직접 영화 6편 제작… 수상까지
문화 예술 소외지역 진로 교육

# ‘사랑하는 우리 딸, 이번 시험도 1등이지? 엄마는 우리 예나 믿는다.’ ○○고등학교 전교 학생회장 예나는 겉으로 보기엔 남부러울 것 없는 아이다. 공부도 잘하고 친구도 많다. 하지만 속은 타 들어간다. 부모의 지나친 성적 압박에 하루에도 몇 번씩 자해 충동을 느낀다. 어느 날 간부 수련회에 간 예나와 친구들은 게임을 하나 하기로 한다. 스마트폰을 가운데 모아놓고 전화나 메시지 내용을 공유하는 놀이다. 밝고 걱정 없어 보이던 아이들 비밀이 하나씩 벗겨진다. 아빠의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찬용의 비밀도, 수련회에서까지 모의고사를 풀어 엄마에게 사진으로 검사받아야 하는 예나의 처지도. 아이들은 당황하다가 이내 왠지 모를 위안을 얻는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다들 힘들었구나….’ 찬용은 예나에게 조용히 말한다. “우리는 아직 너무 어려. 괜찮아. 괜찮아.”

“청소년만의 고민 담은 영화 만들어요.”지난 7일 전북 무주고등학교에서 만난 영화 제작 동아리 ‘DVD’ 학생들은 단편영화 ‘유치’ 마무리 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무주=김종연 C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청소년만의 고민 담은 영화 만들어요.”지난 7일 전북 무주고등학교에서 만난 영화 제작 동아리 ‘DVD’ 학생들은 단편영화 ‘유치’ 마무리 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무주=김종연 C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지난 7일 전북 무주고에서 만난 영화 제작 동아리 ‘DVD’ 학생들은 단편 영화 ‘유치(乳齒)’ 막바지 작업 중이었다. 지난여름 촬영해 둔 영상을 편집하고, 부족한 부분은 재촬영했다. 동아리 부원 정영주(17)군은 “아기 때부터 영구치가 나오기 전까지 사용하는 ‘유치’가 청소년의 상황과 비슷한 것 같아서 제목으로 정했다”고 말했다. “청소년은 아직 어른이 아니니까 모든 걸 혼자 책임지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어요.”

무주군은 인구 2만3600명의 조용한 산골 지역이다. 영화관이라고는 8년 전에 생긴 98석 규모의 작은 곳 하나뿐이다. 다양한 문화를 접하기 어려운 이곳에서 무주고 학생들은 2018년부터 동아리를 결성해 영화를 만들고 있다. 시나리오를 쓰고 연기와 촬영, 녹음, 편집까지 한다. 영화를 완성하면 소규모 상영회도 연다. 각종 영화제에서 잇따라 수상하는 성과를 거두며 무주 지역에 문화의 씨앗을 싹틔우고 있다.

어른들은 몰라요

‘유치’ 시나리오는 동아리원 13명이 지난 6월부터 꼬박 한 달 동안 머리를 맞대고 완성했다. “학생들의 속마음을 담으려고 했어요. 어른들은 우리가 겉으로 밝으면 마냥 괜찮은 줄 알지만, 사실 각자 어두운 면이 있거든요. 어른들은 잘 몰라요. 부모 입장에서만, 직장인 관점에서만 생각하니까요. 우리한테 짐을 지우는 건 결국 어른들이에요.”(정영주)

등장인물들을 연결하는 매개체로는 ‘스마트폰’을 택했다. 요즘 학생들이 가장 시간을 많이 들이는 스마트폰은 어른들은 모르는 세상이자, 각자의 속마음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휴대폰 연락 내용을 공유하는 놀이는 누군가와 속마음을 터놓고 싶은 학생들의 마음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시나리오는 임혜령·임의령 영화감독의 도움으로 완성도가 높아졌다. 학생들 의도가 탄탄한 스토리와 자연스러운 대사로 표현될 수 있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지난 8월에는 2박 3일 동안 모든 동아리원이 함께 먹고 자며 하루 12시간씩 촬영에 임했다. 동아리 담당 교사 김승운씨는 “아이들이 하루에 서너 시간씩 자면서 촬영에 몰입하는 모습을 보면서 놀랐다”며 “자발적으로 참여한 일이니 더 열심히 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2018년 설립된 무주고 영화 제작 동아리는 지금까지 영화를 여섯 편 완성했다. 학교 폭력 가해 학생이 시골 할머니 집으로 이사 가 이웃 여학생을 돌봐주면서 생긴 따뜻한 이야기 ‘학교 가는 길에’(2019), 어렵사리 영화를 제작하는 고등학생들의 이야기 ‘레디 액션’(2020), 진로 문제로 힘들어하는 청소년 이야기 ‘한번 해봐’(2021) 등이다. 2019년부터 ‘전북 사랑 영상 공모전’ ‘전북 청소년영화제’ 등에서 대상을 거머쥐는 성과도 얻었다. 짧은 전통이지만 네트워크도 탄탄해지고 있다. 대학교 연기과, 영화과로 진학한 선배들이 찾아와 조언해주면서 후배의 성장을 돕는다.

새로운 꿈을 만나다

굿네이버스와 신용카드사회공헌재단은 ‘드림하이 프로젝트(이하 드림하이)’라는 이름으로 무주고 영화 동아리를 5년째 지원하고 있다. 2017년 시작된 드림하이는 청소년에게 깊이 있는 진로 탐색 기회를 제공해 각자의 소질과 적성을 찾도록 돕는 사회공헌 사업이다. ▲청소년 영화 제작 동아리에 영화 전문가를 연계해 지도받을 수 있게 한 ‘산골영화캠프’ ▲세종문화회관과 연계해 수도권 아동·청소년에게 오케스트라 전문 교육을 지원하는 ‘세종꿈나무오케스트라 음악캠프’ ▲국가대표 출신 배구 감독과 코치진이 매주 문화 소외 지역 학교를 직접 찾아가 코칭해주는 ‘유소년 배구교실 프로그램’ ▲강원 지역의 학교 밖 청소년에게 웹툰, 요리, 체육, 4차산업 기술, 미디어 등 전문적인 교육을 진행하는 ‘학교 밖 청소년 진로지원사업’ ▲시설에 거주하는 지적 장애인에게 직무·직업 체험 활동과 경제 교육을 제공하는 ‘장애인 진로지원사업’ 등이 대표적이다.

산골영화캠프 지원 대상으로 선정된 무주고 영화 동아리 학생들은 매년 현직 감독, 배우에게 영화 제작에 관한 멘토링을 받는다. 촬영에 필요한 비싼 장비도 제공받는다. 촬영 장소 섭외에 드는 비용, 숙소비 등도 모두 지원받는다. 배우를 꿈꾸는 박찬용(17)군은 “특성화 고등학교에 다니지 않는 이상 이렇게 전문적인 지원을 받기는 어렵다”며 “소도시 인문계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틀에 박힌 공부만 하지 않고, 영화 제작이라는 흔치 않은 경험을 할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여서빈(17)양은 “중학생 때부터 연극 동아리를 하면서 시나리오 작가의 꿈을 키워왔는데, 동아리에서 영화를 만들면서 연출에 소질이 있는 것 같다는 칭찬을 여러 번 들었다”면서 “영화감독이라는 새로운 꿈이 생겼다”고 말했다. 드림하이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강인수 굿네이버스 팀장은 “창작 경험이 지역 학생들 삶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진로를 구체화하는 데도 도움을 주고 있다”면서 “내년에는 산골영화캠프를 전북 정읍 지역으로도 확장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무주=최지은 더나은미래 기자 bloomy@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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