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금)

폐광촌 토박이, 폐열차 숙소로 마을에 활기 불어넣다

[인터뷰] 엄영광 ‘석항트레인스테이 협동조합’ 대표

위탁 운영으로 시작… ‘주민 자립’ 이끌어
올해부턴 주민 협동조합 만들어 직접 운영
“재밌게 일하며 돈 버는 일자리 만들고파”

‘로컬 전성시대’다. 지역의 역사가 담긴 한옥, 조선소, 창고 등 오래된 공간을 개조해 만든 카페나 문화 공간으로 관광객이 몰리고 있다. ‘잘나가는’ 로컬 기업을 만든 사람은 대부분 서울이나 해외에서 커리어를 쌓고 지역으로 유입된 이른바 ‘턴(turn)족’이다. 지역에서 쭉 살아온 토박이들이 주도적으로 만들어낸 성공 사례는 많지 않다

강원도 영월군 석항리는 인구 160여 명이 거주하는 폐광 지역이다. 지난 2014년 설립된 ‘석항트레인스테이’는 영월군이 폐열차를 활용해 만든 숙박 시설로, 열차간 안에 머무르며 영월의 아름다운 자연을 체험할 수 있다. 2018년 사회적기업 오요리아시아가 위탁 운영하면서 지역 주민을 고용하기 시작했고, 올해부터는 아예 주민들이 직접 사업을 맡게 됐다. 석항리와 연상리 등 인근 지역 주민 9명이 ‘석항트레인스테이협동조합’을 꾸려 영월군에서 위탁 사업자 계약을 따냈다. 조합 대표는 2018년부터 석항트레인스테이 매니저로 일한 엄영광(31)씨. 이 지역 토박이다. 지난 3일 재개장을 앞두고 분주한 석항트레인스테이를 찾았다.

지난 3일 강원 영월에서 만난 엄영광 석항트레인스테이협동조합 대표는 “외부 기관 도움 없이 자립해야 하기에 걱정이 많다”면서도 “주민들끼리 힘을 모으고 주변 관광 프로그램과 연계해 석항트레인스테이를 키워나갈 것”이라고 했다. /영월=양수열 C영상미디어 기자

동네 꼬마, 마을 살릴 ‘대표님’ 되다

석항트레인스테이는 2009년 운행이 중지된 태백선 간이역인 석항역에 자리 잡고 있다. 더는 달리지 않는 열차 9량이 객실과 식당, 카페로 다시 태어났다. 폐광으로 마을이 쇠락하면서 여객 열차 운행이 중지된 곳을 열차 콘셉트 숙박 시설로 만든 것이다. 2018년 오요리아시아가 운영을 맡으면서 매월 1000만원의 매출을 올릴 정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외식 분야 사회적기업인 오요리아시아는 위탁 운영을 시작할 때부터 ‘주민 자립’을 목표로 내세웠다. 3년 차인 올해 3월 주민 협동조합인 ‘석항트레인스테이협동조합’이 만들어지면서 사업에서 손을 뗐다. 매니저 일을 하던 엄영광씨가 이사장 겸 대표를 맡았다. 90년생인 엄 대표는 “마을에 발로 뛰면서 홍보도 하고 자금도 끌어올 젊은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어쩌다 보니 대표를 맡게 됐다”며 웃었다. 그를 제외한 조합원 대부분이 50~60대. 나이가 가장 많은 조합원은 1950년생이다.

“3살부터 쭉 석항리에 살았어요. 공고를 졸업한 후 잠깐씩 인근 지역에 가서 일을 하기도 했지만 금방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어요. 2014년 석항트레인스테이가 처음 생겼을 때도 잠시 일을 했었고, 2018년부터 본격적으로 매니저로 합류했습니다.”

매니저로 일하면서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업무 능력을 인정받았다. 조합원이면서 석항트레인스테이에서 일하는 문미순(61)씨는 엄 대표를 “고마운 사람”이라고 했다. 문씨는 “어른들 데리고 일하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안다”면서 “매니저로 일할 때부터 힘든 일은 도맡아 해서 나이 많은 우리도 믿고 따르게 됐다”고 말했다. 이지혜 오요리아시아 대표는 “반짝 스타가 돼서 지역을 헤집고 다니다가 빠져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지역을 오래 지킬 사람이 필요했는데 엄 대표가 딱 그런 사람”이라고 했다.

“고향에서 일하는 게 쉽지만은 않아요. 어린아이일 때부터 봐왔던 분들이니, 대표로서 ‘이렇게 하자’고 강하게 의견을 내는 게 조심스럽죠. ‘조그맣던 게 머리 좀 컸다고 까분다’는 소리 들을까 봐 걱정도 되고요. 그래도 손님들 앞에서는 다들 ‘대표님’이라고 불러주세요. 그게 어딥니까(웃음).”

자립 위한 싸움, 지금부터 시작

석항트레인스테이는 난방 문제로 지난해 11월부터 동절기 영업을 중지했다. 그사이 석항트레인스테이협동조합이 새로운 위탁사업자로 선정되면서 개장이 잠시 미뤄졌다. 엄 대표는 “시설 정비 등을 마무리하고 6월 초 본격적으로 문을 열 계획”이라고 말했다.

“기존에 위탁 운영했던 오요리아시아 덕분에 주민들이 3년간 노하우를 쌓았어요. 하지만 또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영월군이 지난해까지 2억5000만원 규모로 지급하던 위탁사업비 지원을 중단했어요. 오히려 매년 시설 사용료 240만원을 내라고 해서, 발등에 불이 떨어졌어요. 재개장을 준비하는 동안 쓸 인건비도 없어 조합원들이 100만원씩 갹출해 초기 운영비와 사업비를 마련했어요.”

지자체 지원비로 홍보나 시설 개선을 하면서 관광객을 유치하겠다는 계획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엄 대표는 “자금을 끌어올 방법을 찾고 있다”고 했다. 상황은 어렵지만 자신은 있다. 지난 3년간 석항트레인스테이에서 일하며 받은 고객들의 피드백 덕분이다. 고즈넉한 산속 마을에 멈춰선 열차 안에서 밤을 보낸다는 콘셉트 덕에 지난해 내내 숙박객이 끊이지 않았다. 요즘에도 “언제 다시 문을 여느냐”는 문의가 수시로 들어온다.

“지역 여행사와 연계한 프로그램도 구상 중입니다. 숙박객들이 영월 인근 관광지나 식당을 추천해달라고 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석항트레인스테이를 거점으로 동강 래프팅 등 지역의 여러 관광 자원이 활성화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엄 대표는 “석항트레인스테이를 통해 동네가 더 살기 좋은 곳이 될 거라 믿는다”고 했다. 지난 몇 년 새 이미 환경이 달라지고 있다. 석항트레인스테이에 오는 관광객들이 동네 식당이나 수퍼를 찾기 시작했다. 엄 대표는 “원래 정말 아무것도 없는 동네였는데 편의점과 중식당이 생겨났다”고 했다.

“좋은 일자리를 만들고 싶어요. 영월 지역 전반에 좋은 일자리가 거의 없거든요. 최저임금 받는 사람이 수두룩해요. 재미있게 일하며 돈도 버는 곳으로 만들고 싶어요. 돈을 더 많이 벌면 노인정이나 마을회관도 짓고 마을 기금도 낼 겁니다. 별것 없는 시골 동네가 아니라 재밌고 살기 좋은 동네가 되길 바랍니다.”

영월=박선하 더나은미래 기자 sona@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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