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토)

[월간 성수동] 영감들과의 휴식

한상엽 소풍벤처스 대표

사회를 바꾼다는 것. 참 무겁고 거창한 일이다. 그러다 보니 ‘사회혁신’이라는 거대한 목표를 업(業)으로 삼은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장작으로 삼아 불을 지펴 밝은 빛을 만드는 걸 너무 당연하게 여긴다. 가장 가까이에서 이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들이 내는 밝은 빛 아래에 감춰진 고독의 그림자를 느낄 때가 있었다. 혼자 고군분투하는 듯한 고립감, 노력해도 안될 것 같은 무력감,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여러 감정으로 지쳐가는 혁신가들에게 필요한 게 있다면 한 인간으로서 갖는 재충전의 시간일 것이다.

‘인스파이어드’는 매년 전국 각지에 있는 100명의 사회혁신가들을 제주로 초청해 2박 3일 동안 영감과 휴식의 시공간을 제공하는 행사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자신을 제물로 바친 사회혁신가들이 스스로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 바라보고, 또 그런 서로 마주하며 연대할 수 있는 자리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그 원동력이었다. 씨프로그램과 루트임팩트, 소풍, 씨닷이 함께하는 인스파이어드는 올해로 다섯 번째를 맞은 언컨퍼런스다. 언컨퍼런스란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 연사가 청중에게 일방적으로 강연을 하는 기존의 콘퍼런스를 뒤집는다는 뜻의 단어다. 언컨퍼런스에서는 모두가 호스트이며 동시에 참가자다. 이 행사에서는 누구나 즉흥적으로 프로그램을 제안하고 만들어낼 수 있다.

인스파이어드에서는 서로를 ‘영감(靈感)’이라고 지칭한다. 혁신가로서 지고 있던 짐을 모두 벗어 던지고 온전히 한 개인으로서, 그리고 하나의 영감으로서 서로를 마주하자는 약속이자 문화다. 2020년의 인스파이어드는 몇 가지 변화가 있었다. 코로나로 인해 최초로 온라인으로 진행됐고, 카카오임팩트재단이 처음으로 합류했다.

온라인으로 열리는 것에 대한 우려도 있었다. 하지만 시작되자마자 우려는 저만치 날아가 버렸다. 온라인 회의 툴을 활용해 백여 명이 따로 또 같이 서로 소개하고 근황을 나눴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우리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도 잊게 됐다. 온라인으로 마피아 게임을 하며 웃음보가 터지기도 했다. 함께 화음을 맞추며 아카펠라를 하기도 했고, 줌을 통해 각자의 지역을 산책하며 수다를 떨었다. 디자인 싱킹이나 영상 편집 프로그램을 배우는 것도 제법 할만 했다. 동시에 같은 영화를 틀어놓고 보며 단체 채팅으로 감상을 실시간으로 나눴고, 어느 요리 예능 프로그램처럼 한 참가자를 따라 다 같이 과일주를 만들기도 했다. 밤에는 ‘창업 괜히 했다’는 주제로 서로의 노고를 나누며 랜선 너머로 술잔을 부딪치기도 했다.

인스파이어드 행사의 백미는 바로 ‘영감 여행’이다. 혼자 또는 삼삼오오 짝을 지어 여행을 떠나도록 참가자들에게 소정의 여행비를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즉흥적 계획에 몸을 맡겨보기도 하고, 평소 주저하던 일들을 과감히 시도해 보기도 했다. 2020년 랜선 인스파이어드의 풍경은 이러했다.

인스파이어드가 표방하는 것은 휴식이지만, 사실은 위로에 가깝다. 걸어가는 방향은 다르지만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래서 나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따뜻한 기운이 차오른다. 행사의 마지막 즈음, 누군가의 입에서 지금까지 쉬어본 적이 없다는 고백이 나올 때쯤엔 모두가 각자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사회혁신가라는 정체성을 온전히 내려놓은 그대로의 나 자신을 드러내면서 먹고, 마시고, 웃고,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상하게도 홀로 골몰할 때는 잘 떠오르지 않던 새로운 영감이 번뜩인다. 지금까지 인스파이어드를 해오며 배운 것이 있다면 우리는 모두 스스로에게, 그리고 서로에게 영감의 존재라는 사실이었다. 때로는 사회를 바꾸는 거대한 일에 쓰이는 작은 톱니바퀴처럼 느껴지더라도 우리는 각자 소중한 존재라는 것, 그렇기에 위안 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 그런 우리가 스스로 빛을 잃지 않아야 우리가 쏘아 올린 빛 또한 더 밝게 세상을 비출 수 있다는 것이다.

한상엽 소풍벤처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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