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6일(화)

청년들을 사회적기업가로 이끈 건…16년 전 세상에 나온 ‘작은 책 한 권’

[인터뷰] 사회적경제 ‘동탑산업훈장’ 받은 정선희 카페오아시아 이사장

지난 1일 사회적기업 육성 유공자로 ‘동탑산업훈장’을 받은 정선희 카페오아시아 이사는 “16년간 이 분야에서 일하면서 잘한 일이 세 가지 있다”고 했다. 2004년 ‘사회적기업’이라는 책을 펴낸 일, 2007년 사회적기업지원네트워크(세스넷)를 만든 일, 2013년 카페오아시아(cafeOasia)라는 사회적기업을 설립한 일이다. /이경호 C영상미디어 기자

‘사회적기업’의 개념을 설명할 때 지겹도록 회자되는 말이 있다. “빵을 팔기 위해 직원을 고용하는 게 아니라, 고용하기 위해 빵을 판다”고 했던 미국의 사회적기업 루비콘 베이커리의 슬로건이다. 지금은 우리나라 대통령도 인용할 만큼 유명해진 말이지만, 2004년 문고판 책자에 담겨 국내에 처음 소개될 당시만 해도 신선하고 놀랍다는 반응이었다. 한국의 수많은 청년과 대학생을 사회적기업가의 길로 이끌었던 조그마한 책. 정선희(59) 카페오아시아 이사가 쓴 ‘사회적기업’이라는 책이다.

고용노동부가 이달 초 정선희 이사에게 동탑산업훈장을 수여했다. 오랜 기간 사회적기업과 사회적경제 발전에 기여한 공을 인정하는 훈장이었다. 정선희 이사는 사회적경제 분야에 몸담았던 지난 16년을 돌아보며 잘한 일세 가지를 꼽았다. ‘사회적기업’이라는 책을 쓴 일, 사회적기업지원네트워크(세스넷)를 만든 일, 카페오아시아(cafeOasia)라는 사회적기업을 설립한 일이다.

“세스넷 할 때까지만 해도 ‘훈수 두기’ 전문이었는데, 카페오아시아 하면서 그동안 내가 떠들었던 게 얼마나 멋모르고 한 소리였는지 알게 됐어요(웃음). 사회적기업 하는 사람들이 진흙 속에서 걷듯이 무겁게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더라고요. 이제는 함부로 훈수 안 둡니다! 

인생을 바꾼 책

지난 14일 만난 정선희 이사는 절판된 작은 책 한 권을 기자에게 건넸다. “이 책이에요. 보잘것없죠. 책이라기보다는 자료집에 가까워요. 미국 사회적기업 사례를 모으고 분석한 내용이죠. 이 책 읽고 사회적기업가가 되고 싶다며 찾아온 청년이 여럿 있었어요. 내 인생도 이 책 때문에 달라졌고요.

인생이 달라졌다니요?

“비영리 분야에서 일을 하다가 이 책 쓰고 나서 사회적경제로 완전히 분야를 옮겼으니까요.

책은 어떻게 내게 된 건가요.

“미국에서 사회복지학 석사 학위를 따고 돌아와 2001년 ‘기부정보 가이드’라는 작은 웹사이트를 열었어요. 사이트를 운영하면서 비영리단체 컨설팅을 했어요. 기부나 모금에 관한 자료들을 모아 시리즈형태로 책을 출간할 계획을 세웠는데, 시리즈 첫 권으로 쓴 게 바로 이 책 ‘사회적기업’이에요.

기부단체에 관한 책이 아니라 사회적기업에 관한 책을 먼저 썼다는 것도 신기하네요.

“마음이 그쪽으로 더 끌렸던 것 같아요. 예나 지금이나 가장 좋아하는 사회적기업을 하나 꼽으라면 미국의 ‘파이어니어 휴먼 서비시즈’를 이야기해요. 약물중독자나 전과자 등 직업을 갖기 어려운 사람들을 고용하는 곳이에요. 재밌는 건 ‘취약계층 지원’과 ‘비즈니스’를 완벽하게 분리한다는 점이죠. 취약계층을 돕는 건 돕는 거고, 이들이 생산하는 제품이나 서비스는 엄격하고 철저하게 관리해요. 미국 항공기 제조사인 보잉사와 장기적인 계약을 맺고 부품을 납품하고 있는데, 품질이 뛰어난 걸로 유명해요. 사회문제를 해결하면서 수익도 지속적으로 창출하는 모델이죠. 이런 혁신 사례들을 우리나라에 소개하고 싶었어요.

책 나오고 반응이 좋았나봅니다.

“청년들이 많이 찾아왔어요. 지금 성수동에서 활약 중인 한상엽 소풍벤처스 대표, 도현명 임팩트스퀘어 대표 등도 책을 계기로 알게 됐어요. 정부 기관에서도 연락이 오기 시작했어요. 사회적기업에 대한 교육과 조언을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고, 정부의 사회적일자리 사업 연구도 맡게 됐어요.

2007년 ‘사회적기업육성법’이 제정되자 할 일이 더 많아졌다. 정부가 주최하는 자문회의, 공청회 등에 수시로 참여했다. 같은 해 그는 사회적기업을 돕는 전문가들의 모임인 ‘세스넷’을 설립했다. 전문가 네트워크를 만들어 사회적기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는 취지였다. 회계사·노무사·기업인·언론인 등 각계 전문가들이 자신의 지식과 기술로 사회적기업을 돕는 국내 최초의 ‘프로보노(Pro Bono)’ 운동이 세스넷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처음에는 기업 임원 출신들에게 재능나눔 형태로 사회적기업의 경영 컨설팅을 부탁했어요. 당시 사회적기업들이 대체로 경영이나 회계에 취약했거든요. 대형 회계법인도 연결하고 세무법인도 연결하면서 전문가 풀을 확장했어요. 대학생도 참여시켰어요. 국민대 테크노디자인학과 학생들이 사회적기업의 CI를 직접 디자인해주기도 했어요. 사회 곳곳의 자원들을 사회적기업에 채널링하면 임팩트를 낼 수 있겠다고 생각하면서 연결, 또 연결했어요.” 세스넷은 사회적기업 지원의 마중물 역할을 다한 뒤, 2018년 해산했다.  

더 크게 보이는 방법

사회적기업을 지원하는 일을 하다가 2013년에는 직접 사회적기업을 만들었습니다. ‘1호 사회적협동조합인 카페오아시아를 설립했죠.

“세스넷을 운영하면서 2011년 포스코(POSCO)결혼이주여성 취·창업 프로젝트를 제안했어요. 이 프로젝트를 통해서 카페에 취업하거나 카페를 창업하는 이주여성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골목마다 개인 카페들이 늘어나면서 이주여성들이 일하는 카페들이 점점 어려워지는 거예요. 그냥 두면 망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포스코에 ‘규모화’를 해보자고 새롭게 제안했어요. 카페들을 모아서 ‘사회적협동조합’을 만들자고 했습니다. 커피 등 원부자재를 공동으로 구매하고 메뉴 개발도 함께, 홍보도 같이하는 거죠.”

연대 전략이군요.

“그렇죠. 작은 물고기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는 이유와 같아요. 더 크게 보이기 위해서죠. 소규모 사회적기업들이 연대하면 대형 업체와의 경쟁에서도 밀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규모를 키우면 입점 문의도 늘어날 거고 시장에서도 공신력을 가질 수 있으니까요.

1호 사회적협동조합이라는 타이틀도 계획적으로 준비한 결과겠죠?

“물론입니다. 2011년 협동조합기본법이 제정됐고 2012년 법이 시행됐어요. 그때부터 치밀하게 1호가 되기 위한 준비를 했어요. 1호 타이틀이 좋긴 하던데요. 그해 카페오아시아 기사만 100개가 나왔어요. 홍보에 큰 도움이 됐습니다(웃음). 지금은 카페오아시아 직영점이 6, 조합 카페가 20곳입니다. 조합원은 70여 명 가까이 되죠. 바리스타들은 모두 결혼이주여성, 한부모가정여성 등 취약계층이에요.

고비도 있었을 텐데요.

“초반에 겁 없이 로드숍을 냈다가 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대기업과의 협력 모델로 다시 전환했어요. 직영 1호점인 포스코센터 사내카페가 대표적이에요. 포스코 직원들은 저렴한 가격에 커피를 마실 수 있고, 우리는 안정적으로 일자리를 유지할 수 있으니 서로 좋은 거죠. 우리는 많이 버는 것보다 안정적인 게 중요해요. 카페오아시아의 목표가 취약계층 고용이니까요.

취약계층 일자리나 고용 문제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일 년에 두세번씩 카페오아시아 조합원들을 불러모아 작은 파티를 합니다. 같이 이야기도 나누고 고기도 구워먹어요. 너무나 사랑스럽고 성실한 친구들이죠. , 외로운 친구들이기도 해요. 카페오아시아는 그들에게 일터이자 소통의 공간이에요. 직업이라는 매개를 통해 동료를 만나고 고객과 친해지고 그러면서 사회에 스며들게 되는 거예요. 직업은 취약계층 사회통합의 가장 중요한 수단입니다. 장애인, 노숙인도 마찬가지예요.

정선희 이사는 카페오아시아를 8년째 안정적으로 이끌고 있다. 그는사회적기업이 지속가능하려면 ‘Win-Win(윈윈)’하는 파트너십을 가져가야 한다고 말했다. “한쪽만 희생하는 파트너십은 지속가능하지 않아요. ‘우리가 선한 일을 하니까 대기업이 도와줘야 한다’는 식의 접근은 올바른 방식이 아닙니다. 포스코가 8년간 임대료와 관리비를 받지 않고 매장을 내준 이유는 우리가 제공하는 커피의 품질과 서비스에 만족하기 때문이에요. 포스코와 우리의 계약 관계는 기부자수혜자가 아니라 비즈니스 파트너 관계입니다. 

정선희 카페오아시아 이사가 2004년 출간한 책 ‘사회적기업’은 우리나라에 사회적기업의 개념을 소개한 최초의 책이다. /이경호 C영상미디어 기자

다시 책을 쓴다

인터뷰 요청했을 때 첫마디가 ‘몸 둘 바를 모르겠다’였습니다.

“훈장을 받은 건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저보다 훨씬 더 혁신적이고 열정적으로 일하는 분이 이 분야에 너무 많아요. 초창기에 사회적경제를 함께 일궜던 1세대들 생각도 났습니다.

어떤 분들이죠?

“부산대 조영복 교수,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 김인선 원장, 함께일하는세상 이철종 대표, 씨즈 이은애 이사장 등 너무 많죠. 그때는 그들과 이 분야를 새롭게 구축해나가는 게 너무 신이 나서 밤을 새워 일해도 피곤하지 않았어요. 여태 한국에 없던 분야였는데, 그걸 우리가 만들어 간다는 게 너무 재미있었어요. 새로운 정책을 제안하고, 우리가 만든 제안을 정부에서 채택하고, 평가하고, 달라져 가는 모습을 함께 지켜봤어요. 그렇게 신나고 설레는 건 아마 내 인생에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아요.

정선희 이사는 올 초 카페오아시아 이사장직을 내려놨다. “예전보다 여유가 생겼으니 다시 책을 써볼까 한다”고 했다. “큰 나무들이 있어야 숲이 울창해지고 주변 생태계가 풍성해지는 법인데 지금 사회적기업 생태계에는 큰 나무가 많지 않아요. 정부의 사회적기업 지원은 5년으로 종결되는데, 스케일업을 고민해야 할 5년 차에 지원이 끊기는 셈이죠. 소규모 비즈니스만 늘어나면서 그들끼리 서로 경쟁하는 형국이에요. 큰 기업이 생겨야 내부 거래가 생기고 또 다른 시장이 형성될 수 있겠죠. 사회적기업의 스케일업 전략에 대한 책을 쓰고 싶어서 자료를 모으고 있어요.

젊은 사회적기업가들, 혹은 사회적기업가를 꿈꾸는 이들에게 조언하자면요.

“훈수는 안 두기로 했는데…(웃음). 사회적기업이나 사회적경제 말고 다른 공부를 좀 하면 좋겠어요. 이를테면 진화생물학이나 철학 등을 들여다보는 거죠. 사고가 유연해져야 다양성이 생깁니다. 좋은 것이 나쁠 수도 있고, 나쁜 것이 좋은 것이 될 수도 있어요. 더 말랑말랑해져야 해요. 생각의 문을 닫지 않아야 혁신할 수 있습니다.”

 

[김시원 더나은미래 기자 blindletter@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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