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30일(수)
그저 취향이라고? 우리의 ‘채식할 권리’ 보장하라

[Cover Story] 채식의 미래

채식도 ‘기본권’, 생존의 문제로 봐야
입대 예정자, ‘軍 채식권 보장’ 진정서
녹색당은 공공 급식 채식권 보장 주장
이스라엘에선 비건 전투복·식단 제공

지난 2~3일 서울 마포구 문화비축기지에서 열린 ‘비건 페스티벌’에는 1만5000여 명의 인파가 몰렸다. 음식과 생활용품 등 비건 제품 판매 부스 100여 개와 비건이나 동물권, 환경을 주제로 한 강연회와 다큐멘터리 상영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채워졌다. ⓒ비건 페스티벌 제공

‘채밍아웃’. 채식주의자(vegetarian)들이 자신의 식생활을 주변에 알리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성적 지향을 밝히는 ‘커밍아웃’에 빗대 채식을 고백하기까지의 어려움을 드러낸 것이다. 환경운동가이자 작가로 활동하는 김한민도 ‘아무튼 비건’이란 책에서 ‘한국에서 비건을 하면 도 닦는 심정이 된다’고 썼다. 한국채식연합이 추산한 우리나라 채식 인구는 지난해 기준 100만~150만명으로 10년 전과 비교해 10배나 늘었지만, 여전히 전체 인구의 3%를 차지하는 ‘소수자’다.

“그래, 나 채식한다!” 지난 2~3일 서울 마포구 문화비축기지에서 열린 ‘비건 페스티벌 현장’은 당당하게 채식주의자임을 밝히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가득했다. 1만5000명이 모여 채식의 즐거움을 공유했다. 채식이 식생활이나 취향을 넘어 ‘신념의 표현’이자 ‘인간의 기본권’이라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 군대와 병원, 학교처럼 공공급식을 시행하는 곳에서도 ‘채식권’ 논쟁이 불붙고 있다.

①비건 페스티벌 현장에 붙은 포스터. “나는 음식이 아니다”라는 문구 아래 동물 그림이 그려져 있다. ②미군은 지난해부터 일부 부대에서 채식 매뉴를 제공하고 있다. ⓒ비건 페스티벌, 미공군

채식권은 취향 아닌 ‘인권’ 문제… 녹색당 헌법소원 제기

내년 초 입대하는 정태현씨는 오늘(12일) 오후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한다. 정경두 국방부 장관을 상대로 한 진정서에는 ‘국군 장병의 채식권을 보장하라’는 내용이 담겼다. 현재 우리나라 국군 장병은 약 58만명. 채식 인구를 3%라고 잡았을 때 1만7400명이 ‘채식하는 군인’이라는 계산이 나오지만, 국방부는 장병의 건강 상태나 기호에 관계없이 똑같은 식단을 제공하고 있다. 육류·어패류는 물론 동물성 원료가 들어간 조미료조차 먹지 않는 정씨에겐 고역이다.

육군훈련소 11월 식단표를 보면 비건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쌀밥’뿐이다. 정씨는 “김치조차 액젓이 들어가 있어 먹을 수 없다”고 했다. 이 때문에 대다수의 비건이 군 생활 중 몸무게가 심각하게 줄어든다. 억지로 일반식을 먹다가 구토와 복통을 겪거나, 우울증에 걸려 고생하는 경우도 많다. 이에 대해 국방부는 “단체 급식에서 개인 취향을 맞추기는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정씨는 “동물권이나 환경 등 신념을 이유로 채식하는 사람에게 동물성 식품은 음식이 아니라 ‘동물 사체’로 느껴질 뿐”이라며 “취향이 아닌 생존의 문제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해외에서는 군대를 포함한 공공 급식에서 채식권을 보장하는 사례가 많다. 우리처럼 징병제를 채택한 이스라엘은 지난 2014년부터 동물 가죽을 쓰지 않은 신발 등 ‘비건 전투복’을 지급했고, 2017년부터는 비건 식단도 제공하고 있다. 캐나다와 리투아니아도 군대 내 채식 메뉴가 따로 마련됐다.

국가인권위가 정씨의 진정을 심사하는 데는 최대 1년이 걸릴 예정이다. 진정에 힘을 싣기 위해 정씨 외 3명이 이미 추가 진정을 준비 중이다. 정씨의 법률대리인인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장서연 변호사는 “진정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높다”고 말했다. 다만 군이 이를 받아들일지는 미지수다. 국가인권위가 “채식주의자를 배려하라”고 권고해도 법적 구속력이 없기 때문에 국방부가 이를 이행하지 않아도 제재할 방법이 없다. 지난 2012년에도 “교도소 내 채식권을 보장하라”는 국가인권위 권고가 나왔지만 확인 결과 현장 상황은 달라진 게 없었다. 법무부 교정국 관계자는 더나은미래와의 통화에서 “당시 국가인권위에 불수용하겠다는 답변을 냈고, 앞으로도 반영할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녹색당은 채식권 보장을 요구하는 ‘헌법소원심판청구’를 준비하고 있다. 내년 초 ‘모든 공공 급식에서의 채식할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내용의 헌법소원을 제기할 예정이다. 이는 공공 급식에서 채식권을 보장하기 위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함이다. 채식주의 의료인들이 만든 비영리단체인 ‘베지닥터’의 이의철 사무국장은 “채식권이 헌법에 명시된 양심의 자유와 행복 추구권, 건강권과 연계되는 권리라는 인식 전환을 이끌어 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공공 급식으로 식사를 해결하는 채식주의자는 먹을 수 없는 것을 억지로 먹거나 장기적으로 굶어 극심한 정신적·신체적 고통을 겪게 된다”며 “채식권 보장을 건강권, 행복추구권 침해로 보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녹색당원을 비롯해 동물권·환경 운동가, 의료인, 청소년, 학부모 등이 이 움직임에 동참하고 있다.

채식 인구가 급격하게 늘면서 채식 식품이나 비건 원칙을 지킨 상품을 판매하는 ‘비건 비즈니스’도 주목받고 있다. 시장조사기관 아큐먼리서치앤컨설팅에 따르면 전 세계 비건 식품 시장 규모는 지난해 126억9000만달러(약 14조6900억원)에 달했다. 2026년 243억달러(약 28조1300억원)로 급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비건 페스티벌

광주 지역 시민단체, 초·중·고서 ‘채식급식’ 이끌어

광주광역시는 학교급식에서 채식급식을 시행 중인 유일한 지역이다. 광주전남녹색연합, 참교육학부모회광주지부, 광주생명의숲, 광주인권운동센터 등 16개 시민단체가 연합한 초록급식연대(지금의 기후행동비건네트워크)가 2010년 6월 장휘국 광주시교육감 당선자에게 ‘주 1회 유기농 완전채식급식제 도입’을 요구했고 시교육청이 이를 수용하면서 이듬해부터 관내 300여 개 초·중·고등학교에서 일주일에 한 번 채식급식이 시행되고 있다.

지역사회의 반응이 처음부터 호의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학생들에게 채식을 먹게 하는 것이 옳으냐” “채식 급식을 위한 추가 예산 투입은 낭비다” 등 비판에 부딪혔다. 학생들조차 거부 반응을 보였다. 한 고등학교에서는 채식급식을 하는 날에 학생들이 급식실 방충망에 숟가락을 꽂고 달아나는 ‘급식 거부 시위’가 벌어졌다. 학교 홈페이지에는 “고기를 달라”는 글이 쏟아졌다.

기후행동비건네트워크에 따르면 현재는 교사와 학생, 학부모 모두 채식급식에 대한 만족도가 높은 편이다. ‘식생활교육 강사단’을 양성해 ▲비건 요리 ▲공장식 사육의 폐해 ▲축산업이 지구온난화에 끼치는 악영향 등을 주제로 학생과 시민 대상 교육을 꾸준히 진행한 결과다. 조길예 기후행동비건네트워크 대표는 “채식 해도 건강할 수 있고, 과도한 육식은 지구 환경의 지속가능성을 낮춘다는 객관적인 사실만 알려줘도 인식이 달라진다”며 “인간의 식생활이 환경과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려주고서 스스로 삶의 태도를 선택할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기후행동비건네트워크는 채식급식을 시작으로 광주 시민의 채식 대중화를 이끌겠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지난 2016년에는 지역 정치인들과 협력해 전국 지자체 최초로 ‘녹색식생활 실천·지원 조례’를 만들었다. 주 1회 채식을 권장하는 ‘녹색의 날’ 지정, 채식 교육 강화, 채식 식당 지원 등 내용이 담겼다. 조 대표는 “채식의 중요성을 알리고 권장하는 것은 시민사회의 역할이지만, 제도화가 되지 않으면 확산하기 어렵다”며 “광주뿐 아니라 다른 지자체에서도 채식 관련 제도적 근거가 마련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비건 페스티벌 현장에는 동물의 털이나 가죽 등을 사용하지 않은 비건 패션 제품도 전시됐다. 위쪽 사진은 다회 용기를 세척하는 축제 참가자의 모습. ⓒ비건 페스티벌

채식 넘어 비건… “공존 위한 삶의 태도 확산할 것”

최근에는 채식에서 한발 더 나아가 삶의 전반에서 인간과 환경의 공존을 모색하는 ‘비건 지향적’ 사람이 늘고 있다. 국내 최대 채식 축제 ‘비건 페스티벌’의 올해 행사는 각종 비건 음식과 제품을 판매하는 부스 100여개가 들어섰다. 3년 전 1회 축제 때보다 참가자와 판매 부스 모두 2배 이상 증가했다. 2016년 행사를 처음 만들고 지금까지 이끈 강소양(42)씨는 “단순한 채식을 넘어서 환경과의 공존을 모색하는 ‘비건다운’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국제채식인연맹(IVU)은 지난 1981년부터 덴마크, 독일, 스웨덴, 미국, 인도 등 국가에서 비건 베스티벌을 개최하고 있다. 우리나라 비건 페스티벌도 해외 사례를 본뜬 것으로, 일체의 동물성 원료 사용을 금지하는 엄격한 ‘비건 원칙’이 적용된다. 강씨는 “호떡, 케이크, 음료, 화장품, 의류, 식기 등 판매 품목이 수십 종에 달한다”며 “조금만 신경 쓰면 누구나 비건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을 알리는 자리다”고 말했다.

비건 페스티벌 참여를 희망하는 판매자는 품목부터 원재료, 포장 방법까지 주최 측에 점검받는다. 주최 측과 판매자가 소통하는 과정에서 일종의 ‘비건 컨설팅’이 이뤄지기도 한다. 페스티벌에 참여했다가 비건 사업체를 차린 경우까지 나왔다. 비건 디저트를 만드는 카페 ‘베가니끄’나 ‘소이로움’ 등이 대표적이다.

행사 참가자들은 “비건 문화가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올해 운영 자원봉사단으로 참여한 김연주(27)씨는 “처음엔 ‘비건들의 축제’로 생각해 참여했는데 지금은 환경과 동물까지 생각하는 삶의 태도를 나누려는 사람들이 연대하는 장으로 변했다”고 말했다.

축제의 메시지도 ‘비건으로 살아도 괜찮습니다’에서 ‘미래 세대를 위한 비건한 삶’으로 바뀌었다. 사회적인 메시지가 짙어진 셈이다. 특히 올해는 부대 행사로 공장식 축산과 환경오염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가 상영돼 큰 관심을 받았다. 강소양씨는 “단순한 채식이 아니라 ‘비건한 생활’에 대해 알리고 싶어하는 축제 참가자들의 요청으로 강연이나 다큐멘터리 상영 등의 부대 행사를 마련하게 됐다”면서 “환경을 위해 비건 식기, 비건 화장품을 사용하는 삶이 시민의 기본 소양이 될 날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장지훈 더나은미래 기자 jangpro@chosun.com] [박선하 더나은미래 기자 sona@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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