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금)

고단한 학생의 짐 나눠 드는 게 ‘장학’…한 인생 바꾸고 나라도 바꿀 수 있는 일

[인터뷰] 이정우 한국장학재단 신임 이사장

“교수 시절, 학기 말이 되면 학생들과 장학금 문제로 면담을 했습니다. 가정 형편 조사도 하고 이런저런 상담도 했죠. 어려운 학생이 너무 많았습니다. 어떤 학생은 일주일에 ‘알바’를 수십 시간씩 한다더군요. 그런데도 성적은 ‘올 A’였어요. ‘대체 언제 공부를 하느냐?’ ‘그게 가능하냐?’ 대견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재차 물었던 기억이 납니다.”

대학 강단을 떠난 지 3년이 넘었지만, 이정우(68) 한국장학재단 이사장은 어제 일처럼 제자들과의 인연을 떠올렸다. 그는 경북대학교 경제통상학부 교수로 38년을 보낸 뒤 2015년 은퇴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 대통령 정책실장(2003),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2004~2005), 대통령 정책특보(2004~2006) 등의 중책을 맡아 잠시 학교를 떠나 있던 때를 제외하고는 늘 학생들과 함께였다.

지난 10일 만난 이정우 한국장학재단 이사장은 “가난한 학생이 안심하고 공부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양수열 C영상미디어 기자

한국장학재단 이사장 취임 한 달여 만인 지난 10일, 재단 서울사무소에서 그를 만났다. 국가장학금 4조원, 학자금 대출 2조원 등 연간 6조원을 움직이는 준정부기관의 수장으로 돌아온 이정우 이사장은 “30년 전 부교수 시절부터 장학금 제도에 대해 관심이 컸고, 잘못된 제도를 바꾸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면서 “우리나라 장학금 제도를 제대로 들여다보고 재정비할 기회를 얻게 돼 열의에 불타고 있다”며 웃었다.

 

◇성적순에서 형편순으로…교수 시절 학부 내 장학금 제도 고쳐

―대학에 있을 때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맞는 얘깁니다(웃음). ‘불평등의 경제학’이란 과목으로 수업했는데, 330명 들어가는 가장 큰 강의실이 늘 꽉 찼습니다. 인기 비결을 꼽자면 ‘잡담’이죠. 절반이 영화·소설 이야기, 젊었을 때의 경험담, 청와대 시절 이야기 등이었죠. 재미있는 건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들은 ‘진담’은 잘 잊어버리지만, 잡담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저는 그걸 ‘잡담의 교육 효과’라고 불러요. 잡담 속에 가르치고 싶은 내용을 집어넣었죠.”

―잡담 속에 담아 전한 메시지는 무엇이었나요.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사회와 제도가 잘못돼 엄청난 불평등이 발생했을 뿐이다. 그것을 바로잡는 게 배운 사람들의 의무다.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경제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한 것도 비슷한 이유였어요. 고 2 때 일반사회 수업 시간이었는데, 선생님이 칠판에 ‘경국제민(經國濟民)’이라고 쓰시더군요. ‘나라를 다스리고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는 것. 그걸 줄여 경제라 부른다’라고 하셨죠. 그게 어린 제게 엄청난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때부터 경국제민이 제 꿈이 됐죠.”

― ‘불평등의 경제학’을 주전공으로 택한 이유도 경국제민과 연관이 있겠네요.

“그렇다고 볼 수 있죠. ‘불평등의 경제학’은 하버드대에서 박사과정을 할 때 선택한 전공입니다. 서른 살 무렵이었죠. 장학금 제도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유학 시절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성적 좋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데, 미국은 가난한 학생들에게 주고 있었죠. 교육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장학금 제도에 개혁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경북대 교수로 임용된 후, 그는 교내 장학금 제도를 바꾸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다.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이 수업료를 못내 학업을 포기하는 상황을 지켜보며 교내 신문에 ‘성적 위주의 장학금제도, 과연 옳은가?’라는 칼럼을 기고하기도 했다. 장학금은 성적순으로 받는 게 아니라 형편순으로 받아야 한다며 동료 교수들을 설득했다.

“쉽지 않았어요. 그나마 하나 성공한 건 제가 있던 경제통상학부 안에서는 장학금 지급 기준을 바꿨다는 겁니다. 하지만 다른 학부에서는 계속 성적 중심으로 운영됐죠. 답답한 상황이었는데 2009년에 한국장학재단이 생긴 겁니다. 국가가 장학금을 관리하면서 많이 달라졌습니다. 평균 B 학점 이상이라는 성적 기준이 있지만, 주요 기준이 가정형편으로 바뀌었죠.”

―살아온 과정이 한국장학재단 이사장직과 맞아떨어집니다.

“오랜 시간 약자를 위한 경제를 연구했습니다. 한국장학재단은 매년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수백만 명의 학생에게 고등교육의 기회를 주고 있어요.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고, 나라를 바꿀 수 있는 일이죠. 보람도 크고 중요한 자리를 맡았습니다.”

ⓒ양수열 C영상미디어 기자

 

◇ “사각지대 놓인 저소득층 고등학생에게도 국가장학금 주고 싶어”

―재단의 사업비 규모가 연간 6조원에 달합니다. 그 돈을 ‘잘’ 쓰고 있다고 보십니까.

“한국장학재단에 대해 얘기하면 사람들이 의외로 규모가 커서 놀랍니다. 직원이 420명이나 돼요. 장학금 규모만 4조원입니다. 정부 연간 예산의 1%에 달하죠. 지난해에는 전국 400여 개 대학의 110만명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했습니다. 학자금 대출 규모도 2조원이나 됩니다. 잘 쓰고 있는지 묻는다면 대체로 잘되고 있다고 대답하겠습니다. 숲으로 치면 아주 울창하게 잘 자라고 있죠. 하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말라 죽는 나무들도 있을 겁니다. 그걸 잘 들여다보고 바로잡아야겠죠.”

―취임해서 한 달간 지켜봤는데, 발견된 문제점은 없었나요.

“국가장학금에 몇 가지 유형이 있는데, 대표적인 두 가지가 학생에게 직접 지원하는 ‘Ⅰ유형’과 대학을 통해 지원하는 ‘Ⅱ유형’입니다. Ⅰ유형은 크게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Ⅱ유형을 좀 더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대학별로 자체 기준을 두고 장학생을 선발하는데, 성적 우수자 위주로 주려는 관행이 남아있어요. 장학금은 교육 사각지대에 있는 소외계층에게 평등한 기회를 주기 위해 존재합니다. 대학 총장과 교수들이 생각을 바꿔야 해요.”

한국장학재단은 지난해 경기 고양에 ‘1호 대학생 연합기숙사’를 개관했다. 치솟는 월세 때문에 주거 불안에 시달리는 학생들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서다. 현재 1000여 명이 이곳에 입주해 있다. 입주비도 월 15만원으로 저렴하다. 앞으로 5호 기숙사까지 건립해 5000명에게 혜택을 주는 게 재단의 목표다. 재단 설립 때 시작한 ‘멘토링 사업’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올해는 320여 명의 각계 멘토를 2700여 명의 대학생과 연결해줬다. 멘토와 멘티는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인생과 진로에 대해 조언을 주고받는다.

―최근 청년 실업과 일자리 문제가 국가적인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대학생들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문제인데, 이를 풀기 위한 재단 차원의 노력이 있습니까.

“대학생들이 중소기업보다 대기업을 선호하는 게 원인 중 하나겠죠. 물론 이걸 나무라긴 어렵습니다. ‘눈높이를 낮추라’는 건 너무 일방적인 이야기죠. 구조를 개선해야 합니다. 재단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중소기업에서 일하겠다는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고 취업으로 이어질 수 있게 도와주는 것입니다. ‘중소기업 취업연계 장학금’이죠. 지난해 이 장학금의 혜택을 받은 학생이 6200여 명입니다. 올해부터는 대학에 가지 않고 중소기업으로 바로 취업하는 고등학생에게 300만원씩 지원하는 ‘고교 취업연계 장려금’을 주고 있습니다.”

―신임 이사장으로서 새롭게 추진하고픈 사업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고등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것에 대해 고려하고 있어요. 고등학교는 대학교보다 학비가 싸지만 저소득층에겐 그마저도 부담이죠. 고등학교까지 의무교육이 되면 가장 좋겠지만, 그러려면 큰 예산이 소요되고 오랜 논의가 필요할 테니 우리 재단이 그 빈틈을 메워주면 어떨까하는 생각입니다.”

이정우 이사장은 “치열하게 사는 요즘 대학생들을 보면서 나태했던 대학생활이 떠올라 부끄러웠던 적이 많았다”고 고백했다. “고단하게 살아가는 학생들의 짐을 사회가 나눠 져야 합니다. 집안의 아픈 환자를 돌보면서 밤늦도록 알바를 뛰어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학생들에게 일주일에 10시간의 여유를 주는 것. 그게 장학이죠.”

 

[김시원 더나은미래 편집장 blindletter@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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