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목)

용암이 삼킨 마을… 새집과 함께 희망이 싹튼다

르포_ 굿피플, 필리핀 아이따족 새 보금자리 건축1991년 화산폭발 10년 뒤 마을서 교전… 빈곤속에 뿔뿔이 흩어져
움막서 가축과 함께 생활… 굿피플·코이카 협력해 주택개발사업 착수
주민의 일자리와 함께 자부심·의욕도 생겨나

필리핀 원주민 ‘아이따족(Aeta)’을 만나러 가는 길은 험했다. 개울을 건너고, 바위길을 지나 끝없이 산으로 올라갔다. 사륜구동차 바깥으로 튕겨져나가려는 몸을 가까스로 추스르며 그렇게 두 시간 반을 달렸다. 구름 아래로 독수리가 날고, 수풀 사이로 물소의 뿔이 보이는 이곳은 밀림 속에 숨겨진 아이따족의 터전이다.

“마니바악 마을, 산 끝자락에서 금방이라도 스러질 것 같은 움막들을 발견했습니다. 한 평 남짓한 공간에서 15명의 대가족이 돼지, 염소, 닭과 함께 생활하고 있었어요. 굶주림과 각종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이들의 눈 속엔 외부인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국제개발 NGO 굿피플(Good People) 조윤수 필리핀 지부장의 얼굴엔 만감이 교차했다. 아이따족의 마음을 열고, 이들의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하기까지 꼬박 5년이 걸렸다. 마니바악 마을에 불어 닥친 두 번의 재난 때문이었다.

언덕 위에 지어진 아이따족의 새 보금자리. 필리핀 국기를 본떠, 주택에 파랑, 노랑, 빨강을 입혔다.
언덕 위에 지어진 아이따족의 새 보금자리. 필리핀 국기를 본떠, 주택에 파랑, 노랑, 빨강을 입혔다.

“20세기 두 번째로 컸던 1991년 피나투보 화산 폭발이 아이따족의 터전에서 시작됐습니다. 100억 톤의 용암이 분출되고, 화산재가 40㎞까지 퍼져 올랐습니다. 원주민을 향한 차별과 핍박을 피해 화산 밑에 자리 잡았다가 평생 잊을 수 없는 아픔을 겪게 된 것이죠.”

그로부터 10년 뒤,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다. 마니바악 마을에서 필리핀 정부군과 새인민군의 교전이 벌어진 것이다. 쏟아지는 총탄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아이따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빈곤 속에 방황하는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새로운 보금자리였다.

굿피플은 지난해 5월, 코이카(KOICA)와 협력해 아이따족을 위한 주택개발사업에 착수했다. 필리핀 카파스시와 양해각서(MOU)를 체결해 땅을 마련하고, 위생시설과 내구성을 갖춘 주택을 지었다. 지난 2월 27일, 완공식 현장에선 하얀 구름과 맞닿은 파란 지붕들이 눈에 들어왔다. 노랑, 빨강 옷을 입은 70채의 아담한 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필리핀 국기 색상을 본떠 만들었다”는 굿피플 필리핀 지부 직원 에디슨(Edison Ramos)씨의 설명이 이어졌다. “마니바악 마을에는 태풍과 폭우가 잦습니다. 내구성을 위해 시멘트로 바닥을 두껍게 깔고, 지붕을 양철 판으로 댔습니다. 산속 깊이 재료를 운반하기 어려워, 간단한 조립식 모형을 만들어 합체했죠.”

새로운 보금자리 앞에서 하얀 이를 드러내고 미소 짓는 아이따족 아이들. 외부인을 향한 두려움도, 상처도 조금씩 아물어가고 있었다.
새로운 보금자리 앞에서 하얀 이를 드러내고 미소 짓는 아이따족 아이들. 외부인을 향한 두려움도, 상처도 조금씩 아물어가고 있었다.

기존 아이따족의 건축 방식과 주변 자원도 최대한 활용했다. 통풍이 잘 되고 자주 교체할 수 있도록 대나무를 엮어서 벽을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아이따족의 일자리도 마련됐다. 대나무를 엮은 롤 하나당 1500페소(4만5000원)가 주민들에게 돌아갔다.

오랜 시련 끝에 다시 돌아온 마을, 아이따족은 웃음을 되찾았다. 마을 원로 앨더(Alder·72)씨는 “집이 생기면서 흩어졌던 부족들이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에게 자부심과 의욕이 생겨났다”면서 감사함을 전했다.

원주민 지원 사업의 핵심은 ‘출구전략’이다. 향후 지원 없이도 이들이 자립해서 먹고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굿피플 해외사업운영팀 이지영 본부장은 벌써 다음 단계 구상에 들어갔다. “아이따족의 소득증대사업으로 염소 분양과 농업 프로젝트를 구체화하고 있습니다. 마을 전체에 소득이 돌아갈 수 있도록, 주변 환경과 부족의 생활 방식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연 아이따족, 마니바악 마을에 희망의 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카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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