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 “주요국 공시 유예·완화 고려해 도입 고려해야”
시민단체 “시장 신뢰 잃고 기업 전환 동력 꺾인다”
금융위원회가 ESG 공시 제도 도입 시점을 2029년 이후로 늦출 수 있다는 방침을 시사했다. 지난달 23일 열린 ESG 금융추진단 제5차 회의에서 금융위는 “EU 등 주요국의 공시 유예 흐름을 감안해, 제도 도입 시점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EU는 역외기업에 대해 2029년부터 공시를 의무화할 예정이며, 현재 ‘옴니버스 패키지’를 통해 공시 대상 기업 수를 줄이고 시점을 유예하는 방안도 논의 중이다. 금융위는 이를 참고해 국내 시행 시점도 재검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스코프3(간접 배출) 항목에 대해서는 데이터 측정의 어려움을 고려해 일정 기간 공시를 유예하거나 추정치를 허용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연결 기준 공시는 유지하되, 재무적 중요성이 낮은 자회사는 공시 대상에서 제외하는 방안도 논의 중이다.

◇ ESG 공시, 시장 신뢰를 위한 최소 조건
금융위 발표 직후 시민사회단체에서는 비판이 잇따랐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은 지난달 23일 논평을 내고, “공시 의무화를 2029년으로 미루는 것은 정책적 오판”이라며 “우리 기업들이 갈라파고스처럼 국제 지속가능 투자 자본에서 고립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트럼프 행정부에서 미국 우선주의에 따라 기후·인권 등 지속가능성 이슈를 무역장벽 수단으로 활용할 가능성 ▲ESG 법·제도·정책 정비가 완료된 EU의 지속가능경제 인프라 ▲공시 규제와 무관한 글로벌 기업의 공급망 ESG 요구 확산 등을 근거로 들며, 자본시장법을 개정해 2027년부터 법정 공시를 시행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종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사무국장은 “미국에서는 공화당이 자국 기업 경쟁력을 보호하기 위해 온실가스 감축을 목표로 한 ‘외국 오염물질 부담금법’을 발의했다”며 “한국도 저탄소 산업 전환을 서둘러야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ESG 시장에서 자본은 정보를 따라 움직인다”며 “공시는 시장 신뢰를 위한 최소 조건”이라고 덧붙였다.
녹색전환연구소도 지난달 29일 입장문을 통해 “금융위가 해외 동향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공시 유예를 정당화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연구소는 “EU 공급망에 포함된 수출기업들은 이미 고객사로부터 공시 요구를 받고 있다”며 “미국과 캐나다는 공시 기준과 로드맵을 명확히 한 상태여서, 둘 다 불투명한 한국과는 비교 대상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한, 지난달 글로벌 싱크탱크 E3G가 15개국 1500명의 경영진을 대상으로 진행한 조사 결과 97%가 재생에너지 기반 전력 시스템 전환을 지지한 사실을 들며 “공시 시점을 확정해야 기업들의 장기적 대비가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지현영 녹색전환연구소 부소장은 스코프3(간접 배출) 완화 조치에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제조업 온실가스 배출의 80~90%가 스코프3에서 나온다”면서 “2027년부터 공시를 시작하는 일본조차 유예 기간을 1년으로 제한해 감축 압박을 유지하고 있는데, 한국은 완화 조치로 인해 오히려 기업의 공급망 전환 유인을 스스로 없애고 있다”고 비판했다.
◇ “단순 시점 논쟁보다 정부·기업의 체계적 준비가 중요”
한편, 금융위의 입장은 글로벌 ESG 투자 흐름의 약화와 국내 경제 불확실성도 반영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1분기 글로벌 지속가능펀드에서는 사상 최대 규모인 86억 달러(한화 약 12조 3200억 원)가 순유출됐으며, 42개 국내외 기관이 한국의 올해 경제 성장률을 평균 1.41%로 전망하는 등 경기 둔화 우려도 커지고 있다. ESG 공시 의무화가 기업에 과도한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속도 조절이 불가피하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공시 시점을 둘러싼 논쟁과 별개로, 기업과 정부가 준비해야 할 실질적 대응 전략이 더 중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김민석 지속가능연구소 소장은 “공시는 목적이 아닌 수단”이라며 “기업들은 최소 3년치 데이터를 축적하고 각 항목별 의미를 파악해 실질적인 개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통적 공시 방식에 대한 실효성에 대한 지적도 있다. 문철우 성균관대 경영대 교수는 “규제 중심 방식보다는 인센티브 구조를 설계해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ESG를 실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AI 기반 ESG 리스크 평가 시스템이 확산되면서 전통적인 연간 공시보고서의 영향력은 줄어들 수 있다”고 분석했다.
정도진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는 “ESG가 국내 기업에겐 ‘기회’보다 ‘위기’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기에, 관련 업계가 공동으로 대응하는 위험 관리 전략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이어 “산업부 등 정부는 기업의 ESG 리스크를 줄일 수 있는 정책을 주도적으로 마련한 후, 금융위가 공시 제도를 연계하는 방식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채예빈 더나은미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