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24일(목)

소심한 서울대생 기자회견 나선 까닭

지체장애인 이화영씨 대중교통은 그녀에게도 ‘숙제’
“장애인뿐 아니라 노약자도 아기 가진 부모도 누구나 교통 약자 될 수 있어… 저상버스 프로젝트 사례로 약자에게 ‘희망의 불씨’ 됐으면”

서울대학교 장애인 인권동아리 ‘턴투에이블’이 저상버스 재도입을 위해 기자회견을 연 현장. 지난 연말, 8개월간의 긴 싸움 끝에 1년 만에 사라졌던 5516 저상버스는 재도입됐다. /턴투에이블 제공
서울대학교 장애인 인권동아리 ‘턴투에이블’이 저상버스 재도입을 위해 기자회견을 연 현장. 지난 연말, 8개월간의 긴 싸움 끝에 1년 만에 사라졌던 5516 저상버스는 재도입됐다. /턴투에이블 제공

“죄송한데 장소를 바꿔도 될까요? 그 카페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어서요.”

이화영(27·사진)씨와 인터뷰를 하기에 앞서, 장소를 두 번이나 바꿔야 했다. 그녀는 전동휠체어를 이용하는 지체장애인이기 때문이다. 지난 5일 오후, 서울대입구역 근처 카페를 물색했다. 휠체어가 들어가기 쉬운 1층에는 카페가 별로 없었고, 2·3층에 위치한 카페는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빌딩 하나가 통째로 카페인 유명 커피숍에도 이씨가 앉을 만한 자리는 없었다. 빈자리는 노트북 부대가 선호하는 높은 테이블뿐. 몇 번이고 실패를 거듭하다, 1층 빵집 안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차 한 잔 하기 참 어려웠다.

서울대 통계학과(09학번) 출신 취업준비생 이씨를 만난 건 ‘서울대 저상버스 5516번을 되살린’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지난 2012년 서울대에 도입된 5516번 저상버스는 1년 만에 폐지됐다.

“서울대 관악캠퍼스 내부에는 버스 노선 3개가 다녀요. 그중 한 노선이 2012년에 처음으로 저상버스를 도입하기로 했어요. 장애 학생들에게는 굉장히 반가운 일이었죠. 반가움도 잠시, 2013년 저상버스가 전면 폐지됐어요. 교내에 과속방지턱이 너무 많고 높아서 위험하다는 게 이유였어요. 학교 측에서는 교내 과속방지턱을 모두 공사하기는 어렵다고 말했죠. 1년 만에 없던 일이 됐어요.”

지하철 서울대입구역에서 서울대 본부까지는 2.58㎞로, 도보로 40분이 걸리는 언덕길이다. 저상버스가 사라지자 휠체어를 타는 학생들이 지하철역까지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콜택시밖에 없었다. 하지만 서울 장애인 콜택시는 474대, 평균 대기 시간은 약 30분이다. 이용객은 많고 콜택시 수는 적어, 눈이나 비가 오는 날이면 꼼짝없이 서너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서울대 졸업생의 저상버스 재도입 프로젝트

졸업생인 이씨는 후배들의 불편함을 외면하고 모교를 떠날 수가 없었다. 학교 생활 내내 불편함을 그저 받아들이기만 했던 ‘소심함’에 대한 미련도 있었다.

“제가 입학한 2009년에는 장애인 인권 동아리가 없었는데, 후배가 2013년 말 처음 동아리를 만들면서 구심점이 생긴 이유도 컸어요. 사실 사명감을 가지고 들어간 게 아니라 아는 후배가 많으니깐 들어갔거든요. 혼자서는 목소리를 내지 못했지만, 여럿이 뭉치니 해결 방법들이 보였어요.”

이씨는 지난해 장애인 인권 동아리 ‘턴투에이블’에서 ‘돌려줘요, 저상버스’ 태스크포스(TF) 팀장을 맡아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내기 시작했다. 장애 학생 10명, 비장애 학생 20여명의 동아리원도 힘을 보탰다. 힘겨운 싸움이 시작됐다. 먼저 학교를 설득했다.
“처음 학교 측에서는 교내 과속방지턱을 깎으면 보행자 안전에 무리가 있다고 말했어요. 일부 사람은 지금도 과속방지턱이 너무 낮아 차가 빨리 달린다고 주장했거든요. 우리가 학교를 설득할 수 있을지 걱정이 많았죠.”

조인 작가 제공
조인 작가 제공

교내의 교통 약자 학생들을 모두 만나 저상버스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다 비슷한 불편함을 겪고 있었어요. 교통 약자들에게도 이동권이 있는데,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내용이었죠.”

객관적 자료도 제시했다. 버스회사 측의 요구로 초등학교 앞 과속방지턱을 깎은 구로구의 사례를 들었다. “학교 측은 보행자 안전을 이유로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일정한 규정만 맞추면 보행자 안전에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증명한 논문이 있었어요. 그 논문도 같이 제시했습니다. 게다가 서울시가 2025년까지 시내버스를 저상버스로 100% 교체하겠다고 밝힌 점도 강조했습니다.”

동아리원과 교통 약자들의 목소리에, 학교는 과속방지턱 공사에 착수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버스회사가 이들을 가로막았다. 높이를 낮추는 걸로 부족하고 방지턱을 모두 없애야 저상버스를 재도입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여전히 버스 손상의 위험이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과속방지턱을 모두 없애라고 했을 때, 황당해서 버스회사 측에 전화를 걸었어요. 그랬더니 ‘왜 학생들이 전화를 하느냐’며 주제넘게 요구한다는 식으로 무시했어요. 그래서 저는 장애를 가진 당사자라고 밝혔는데도 전혀 귀 기울여주지 않았어요. 학생들은 학교랑 이야기하라고, 우리는 서울시 이야기만 들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결국 학생들은 성명서를 내고 기자회견을 했다. 언론에 보도되고 나서야 회사 측에서는 버스를 제공하겠다고 했다. 작년 11월부터 서울대 캠퍼스 안에서 저상버스 운행이 재개됐다. 2015년 3월부터 진행된 프로젝트는 8개월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여전히 갈 길 먼 교통 약자 이동권

휠체어와 한 몸이 된 지 약 30년이지만 이씨와 같은 지체장애인에게 대중교통 이용은 여전히 ‘숙제’다. 아직 서울 시내 지하철역 307개 중 37개 역에는 엘리베이터가 없다. 엘리베이터 대신 휠체어 리프트만 있는 곳도 있다. 교통 약자들은 리프트 이용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위험해요. 사고도 종종 나고요. 리프트를 타지 않으려고 일부러 돌아가기도 해요. 서울대입구역에서 고속터미널까지 갈 때 교대역에서 3호선으로 갈아타야 하는데, 교대역 환승 구간은 리프트로 돼 있거든요. 저는 리프트를 타지 않으려고 사당역에서 4호선으로 갈아타고, 동작역에서 9호선으로 환승해 고속터미널을 가요. 오래 걸려도 그게 마음이 편하거든요.”

버스 이용은 더 어렵다. 휠체어를 실을 수 있는 저상버스만 탑승할 수 있다. 배차 간격도 길다. 저상버스가 오더라도 무조건 탈 수 있는 건 아니다. 버스기사가 휠체어가 올라갈 수 있는 발판을 내려줘야 하는데, 타고 내리는 사람이 많은 시내에서는 버스기사에게 사인을 보내는 것이 쉽지 않다. “제가 사인을 보냈을 때 일부러 외면하는 기사님도 있었어요. 버스가 정해진 배차 간격대로 움직여야 하는데 휠체어를 태우려면 시간이 지연되니까요.”

서울시는 지난 12월 ‘세계 장애인의 날’을 맞아 ‘장애인 이동권 증진을 위한 세부 실천계획’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2022년까지 서울시 모든 지하철 역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되고 2025년까지 시내버스가 100% 저상버스로 바뀐다. 이씨가 두 번이나 환승을 하게 만든 휠체어 리프트도 철거되고, 엘리베이터로 교체된다. 그녀는 “저상버스 프로젝트가 좋은 예로 남아 약자들에게 희망의 불씨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지체장애인, 시각장애인만 교통 약자가 아니에요. 유모차에 아기를 태운 부모들이나, 보행이 불편한 노약자도 교통 약자예요. 누구나 교통 약자가 될 수 있는 거죠. 어차피 필요하고 해야 하는 일이라면, 더 빠른 시일 내에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것이 좋잖아요. 또 건물에 경사로를 만들거나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것은 건축법상 의무라고 하는데 안 지켜지는 경우도 간혹 있어요. 약자 입장에서 제도가 만들어져야 선진적인 나라 아닐까요? 약자가 편해야 우리 모두가 편해질 테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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