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7일(목)

1세대 사회적기업, 건물 매입 나섰다

사회적기업, 자산 마련위해 뛰는 사연

건물·땅값 오르자 철새 신세돼 “월세 대신 대출 이자 내겠다”
공동 출자로 건물 매입해 공동사업

사회적기업 2세대 위한 기금 마련 민관 협력으로 대안 모색 필요

지난해 봄,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사회적기업 5곳이 긴급 회동을 가졌다. 친환경 패션기업 ‘오르그닷’, 취약계층에 간병서비스를 제공하는 ‘다솜이재단’, 역사기행·문화체험 전문기업 ‘㈜우리가만드는미래’, 문화기획사’티팟(teapot)’, 책으로 주민들에게 소통 공간을 제공하는 ‘㈔와우책문화예술센터’ 등 모두 최소 5~8년 이상 사업을 지속해온 1세대 사회적기업이다.

이날 모임의 안건은 ‘부동산 대책’. 매년 오르는 보증금·월세를 감당하느라 이사를 반복해야 했던 사회적기업들은 “차라리 공동으로 건물을 매입해 대출 이자를 나눠 내자”고 입을 모았다. 같은 공간에서 서로의 역량을 모아 공동사업을 한다면 시너지도 낼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한 사회적기업당 최소 1억원 이상 공동 출자해 1000평 규모의 땅·건물을 매입하고, 지역에 필요한 식당·카페·커뮤니티 공간을 마련하자는 등 실행 계획도 세웠다. 매주 꾸준히 만나 출자금·대출금을 공동 관리하는 법인 설립도 준비하고, 각자 비용도 마련했다. 이후 이들은 1년 넘게 마포구·양천구·서초구 등 서울 전역을 돌아다니며, 공동 출자가 가능한 땅·건물을 알아보고 있다.

“서울에선 최소 40억원은 있어야 건물 매입이 가능하더군요. 그래도 10년치 월세로 20년간 건물을 사용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오니 해볼 만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향후 사회적기업들의 공동 자산이 되니, 후배 사회적기업가들을 위한 기금으로 활용할 수도 있고요. 국가 소유 부지 입찰이 뜰 때마다 공모도 하고, 구청에 정보를 물어가며 발로 뛰고 있는데, 마땅한 땅·건물이 보이질 않아 고민입니다.”(김인선 사회적기업 ㈜우리가만드는미래 대표)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성장기 사회적기업의 새로운 모색…자산화 전략 뜬다

최근 사회적기업·협동조합 사이에서 부동산 이슈가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전월세 비용 부담이 커지자 땅·건물을 매입해 이를 사회적기업의 자산으로 활용하는 전략이 논의되고 있는 것이다.

장애인 웹 접근성 진단 및 인증을 전문으로 하는 7년차 사회적기업 ‘웹와치주식회사(이하 웹와치)’는 지난달 서울 영등포구청 인근에 지하 1층, 지상 6층짜리 건물(시가 41억원)을 매입했다. 기존 웹와치가 보유했던 10억원과 사회투자기금 및 시중은행 대출을 통해 마련했다. 4층과 6층을 사무실 공간으로 쓰고, 5층은 장애인서비스 전문형 사회적기업을 인큐베이팅하는 교육·컨설팅 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이범재 웹와치 대표는 “그동안 매달 임차료로 700만~800만원을 지출했는데 이젠 1~3층에 입주해 있던 상가들로부터 매년 1억원씩 임대료를 받을 수 있어서 대출 이자를 고려하더라도 안정적인 수익 구조 마련이 가능하다”면서 “제2, 제3의 웹와치를 만들어내려면 신규 사회적기업을 위한 공간과 자금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과감히 투자했다”고 말했다.

지역 주민들과 함께 기금을 마련해 건물을 매입한 협동조합 사례도 있다. 지난달, 대구 안심1동에는 4층짜리 빨간 벽돌 건물이 들어섰다. 1층에는 발달장애 아동의 언어·물리치료를 지원하는 협동조합 ‘마음애(愛)’, 2~3층은 발달장애인 주간보호센터, 4층에는 발달장애인 자립지원센터와 주민들을 위한 무료 강당이 문을 열었다.

장애 아동을 키우는 부모들과 지역 복지의 필요성에 공감한 주민 60명이 십시일반 자금을 모아 건물주택협동조합 ‘공터’를 설립하고, 190평짜리 땅과 10억짜리 건물을 매입한 것. 이곳에서 치료 및 교육받는 발달장애인들은 마을 카페, 유기농 매장, 도서관, 어린이집 등으로 연결돼 직원으로 일한다. 윤문주 한사랑 사회복지법인 이사장은 “한 건물에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센터와 공간들이 마련되니 주민들의 만족도도 높다”면서 “대출금을 감안해도 매달 200만원씩 모이는데, 이는 우리 마을을 위한 기금으로 활용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땅값 올려주고 새로운 둥지 찾아다니는 사회적기업들

반면, 하루가 무섭게 올라가는 부동산 가격 때문에 주변 땅값만 올리고 쫓겨나는 사회적기업 사례도 늘고 있다. 지난달, 경북의 한 사회적기업은 건물 주인으로부터 ‘당장 나가달라’는 통보를 받았다. 지난 5년간 이 사회적기업이 다양한 교육·문화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사람들이 몰리고 상권이 형성되자, 건물값이 몇 배로 뛰어오른 것. 이에 건물 주인은 해당 공간을 카페로 운영해 당장 수익을 올리겠다는 뜻을 밝혔다. 정상훈 사회혁신공간 데어(there) 이사는 “최근 서울의 대표 마을공동체인 ‘성미산 마을’도 작은 카페나 상점들까지 14억 넘게 건물값이 올라, 마을 내 협동조합들이 연합해 자립 기반을 새로 마련하고 있다”면서 “특히 아직 수익성이 낮은 초기 사회적기업의 경우 임대료 때문에 철새처럼 사무실을 옮겨다니거나, 자립 기반을 마련 못한 채 전전긍긍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지적했다.

상황이 이러하자 최근 신용협동조합(이하 신협) 차원에서 사회적 경제 조직의 자립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임정빈 동작신협 이사장은 “지난해부터 동작구에 필요한 보육·노인 일자리·건강한 먹거리 등 다양한 협동조합들을 한자리에 모아 협력할 수 있도록, 신협중앙회 자금운용팀 및 동작구청과 700~800평 이상 부지 마련을 위해 논의 중”이라면서 “개별 협동조합이 고군분투하는 구조를 뛰어넘어 협동조합이 제대로 된 협력을 할 수 있도록 최근 동작신협, 성남신협 등 지역의 많은 신협들이 자금 지원을 고심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공간을 기부하는 독지가도 나타났다. 농산물 유통 사회적기업인 둘밥의 한민성 대표는 “창업지원센터 사무실 공간을 옮겨다니다가 한 독지가 선생님의 건물 기부로 지난해 5개 사회적기업의 입주 공간이 생겼다”면서 “사회적기업 5곳이 1500만원 모아 인테리어 비용을 마련하고, 100평 공간을 사무실·카페·창고 등으로 꾸몄는데, 임대료가 따로 없는 데다가 이사 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니 한시름 놓았다”고 말했다.

◇기금 조성, 민관협력 모델로 돌파구 마련해야

그러나 더 큰 시너지를 위해서는 민관협력 모델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정부나 지자체가 지역의 비어있는 건물을 오픈하고, 사회적기업·협동조합들이 이를 20~30년 후 기부채납(공공기여)하는 방식이 효율적이라는 것. 이은애 서울시 사회적경제지원센터장은 “영국 런던시는 급격한 도시화로 인해 지역 주민들이 쫓겨날 위기에 처하자 도시 재생을 위해 주민들이 만든 ‘코인 스트리트 지역공동체’에 3만~4만평의 땅을 주민들에게 싼 가격에 팔았고, 덕분에 이 지역은 주민 주도로 협동조합형 임대주택·커뮤니티센터·공예품 상점들이 들어섰고 그 수익금은 고스란히 마을을 위해 재투자되고 있다”면서 “사회적 경제 조직들끼리 경제적 연대 기반을 만들고, 정부는 공공의 유휴부지를 제공하는 좋은 모델을 함께 고민해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유진 기자

권보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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