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2일(금)

[기차에서 일합니다] 뉴욕 지하철, 살아 숨 쉬는 책들의 비밀기지

정유미 포포포 대표
정유미 포포포 대표

빅애플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뉴욕의 애플화. 코로나19 이후 4년 만에 찾은 뉴욕의 가장 두드러진 변화였다. 대중교통은 물론 키오스크 같은 일상의 영역이 애플페이로 움직인다. 타고 있던 지하철 호선이 갑자기 바뀌거나 연착되는 건 여전하지만. 차량 공유 플랫폼 우버, 리프트의 새로운 대항마로 등장한 테슬라 전기차 레벨까지 앱마다 목적지를 입력하고 가격을 비교하다 지쳐 옐로캡을 잡아도 애플페이 결제는 웰컴.

지하철 여기저기서 버스킹하는 뮤지션을 만날 때마다 뉴욕을 실감하지만 그사이 승강장에서 묻지마 떠밀기 같은 불특정 다수를 향한 범죄도 증가했다. 현지인에게 목적지로 가는 방향을 재확인할 때면 ‘Safe Trip’이라는 인사가 뒤따랐다. 브로드웨이의 뮤지컬보다 더 가슴을 웅장하게 만들었던 할렘 교회의 가스펠은 다음을 기약했다. 그 방향의 지하철에서 탄피를 발견했으니 조심하라는 친구의 조언을 무시하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나는 뉴욕의 지하철에서 아이들과 책 읽는 사람들이 자아내는 평화로운 풍경을 꽤 자주 목격했다. 뉴욕의 독서율이 높은 건 지하철 와이파이가 먹통이기 때문이라는 의견에 동의하지만, 가방에 가벼운 페이퍼백 하나 정도는 가뿐히 넣어 다니는 일상이 부럽기만 하다. 화창한 날의 센트럴파크나 길가의 카페에서 종이책을 펼쳐 든 사람을 쉽게 목격하는 것도.

우주 삼라만상이 그러하듯 우리는 관성의 절대적 영향을 받는 존재다. 조금 무겁고 귀찮더라도 가방의 한 자리를 내어준다는 것. 시간의 빈틈에 접어두었던 페이지를 다시 초대하고, 곁에 두고 틈틈이 들여다보면 오래오래 음미하고 싶은 문장이 쌓인다. 읽고 보는 대상이기 전에 책을 대하는 마음에 대해 생각해본다. 두서없는 발걸음으로 오래된 서가 사이를 종횡무진하다 고른 건 ‘지금 여기’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책들이었다. 바래고 헤져 너덜너덜하나 누군가에겐 빈티지로 불릴 해묵은 종이들. 항공 수화물의 무게를 고민하면서 신중하게 고른 책들을 품에 안고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사진가 레이니어 게릿슨은 뉴욕의 지하철에서 책 읽는 사람들의 순간을 ‘The Last Book’ 시리즈로 기록했다. 그가 사라져가는 아름다운 현상이라 칭했던 시점으로부터 10년 가까이 지난 오늘. 여전히 종이책과 함께인 뉴요커들을 지하철에서 마주친다. 그 수가 줄어들었다 해도 여전히 읽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끊임없이 멸종론에 시달렸음에도 종이책은 계속해서 생명력을 이어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더불어 글, 그림, 사진, 영상 할 것 없이 자신의 콘텐츠를 공개하는 플랫폼에서 역설적으로 종이책을 향한 욕망을 읽는다.

우후죽순 쏟아지는 인플루언서의 책은 영향력이 곧 자본으로 연결되는 현재의 바로미터다. 수익분기점이 확보된 팬덤을 통해 책은 굿즈로 소비되고 있다. 수상이 곧 출간으로 이어지는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는 디지털 시대의 신춘문예가 됐다. 브런치 작가 도전에 재수, 삼수는 기본이라는 경험담과 함께 작가 등업을 위한 온라인 강좌가 성행한다. 출판사에 간택당하지 않아도 자비 출판으로 누구나 출간 작가가 될 수 있는 시대. 내 이름 석 자가 박힌 종이책에 대한 열망에서 ‘인정’을 갈구하는 한국 특유의 문화적 특수성을 발견한다. 포포포 매거진의 정체성을 응집한 ‘지면을 드립니다’를 공모할 때도 마찬가지. 아쉽게 탈락을 전하며 온라인 채널에서 글을 소개하는 대안을 제시하면 대부분 반응은 하나로 모였다.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종이책이 아니면 글쎄…’

그도 그럴 것이 한 권의 책이 세상의 빛을 보기까지 거치는 과정은 수십 가지에 달한다. 탈고가 끝난 글을 전문 교열가와 편집자가 다듬고 디자이너가 이미지로 구현해 인쇄소로 파일을 넘긴다. 종이를 고르고 일정과 사양을 조율해 출력이 끝나면 진짜 시작. 배본, 유통, 홍보, 마케팅, 판매, 재고 관리 등 하나의 과정이 끝나는 골목마다 다음 작업이 고개를 내민다. 그 모든 것을 오롯이 혼자 해결하는 1인 출판사와 창작자도 늘고 있지만 가장 어려운 관문은 판매. 하물며 모든 페이지를 디자인하고 판형도 제각각인 잡지는 높은 제작비에 비해 판매량은 가장 소소한 분야다. 아트북 못지않은 자사 매거진을 매장에서 무상 증정하는 에르메스가 그러하듯 자본의 규모를 필요로 한다. 인지도가 곧 기회와 영향력으로 이어지는 현실을 이해하면서도 문학, 사회, 역사적으로 가치있는 작품들이 빛도 못 보고 사라질 때면 속이 쓰리다.

이것만 따라 하면 누구나 단기간에 부자가, 전문가가 될 수 있다고 외치는 자극적인 카피로 도배된 책 표지는 갈수록 유튜브 썸네일을 닮아간다. 유엔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SDSN)가 국제 행복의 날에 공개한 2023 ‘세계행복보고서’ 149개국 중 57위. OECD 국가 중 뒤에서 네 번째라는 초라한 민낯은 2022 국내 총생산 GDP 13위에 오른 한국의 초상이다. 소셜미디어 전파력과 행복 지수는 반비례한다. ‘남들처럼’이라는 기준점은 최단 시간 초고속 성장의 견인차가 됐다. 음악, 뷰티, 음식을 비롯해 K-컬처는 신뢰의 상징이자 워너비 아이콘이 됐다. 그러나 현실에 발을 내딛고 사는 우리는 여전히 불안하고 불행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도달할 수 없는 신기루처럼 사는 건 팍팍하기만 하다.

결혼과 출산을 엄두도 못 내는 현세대에게 ‘이렇게까지 지원을 늘렸는데’라는 국가의 기대는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부모의 항변처럼 부담스럽기만 하다. 사회 경제적 자본으로 점점 더 견고하게 계층이 분리되는 현실 속에 남은 희망은 인플루언서가 돼 부와 명예를 한 방에 거머쥐는 것. ‘잘 살아보세’라는 열망이 깃든 현대판 새마을 운동인 셈이다. 16부작 드라마를 60분 요약 영상으로 보는 시대. 누구나 알지만 끝까지 본 사람을 찾기는 어려운 책 ‘총, 균, 쇠’처럼 당장 도움이 안 되는 것에 시간을 쓰는 것은 사치가 돼버렸다. 영화 ‘기생충’의 주인공이 반지하에서 공짜 와이파이를 찾아 헤매다 저택 정원에서 독서를 즐기는 것처럼 책은 여유와 자본의 상징이 됐다.

그런데 왜 뉴욕에서는 아직 책 읽는 사람과 북적이는 서점이 건재한 걸까. 전 세계에서 가장 비싸고 인구 집약적인 도시. 애플페이는 도입해도 줄을 당겨 알리는 하차 벨을 고수하는 버스와 도어락 대신 열쇠를 고집하는 사람들. 편리함보다는 오래된 믿음에 가치를 두는 문화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성공을 좇아 뉴욕에 입성하더라도 이들의 꿈과 목표는 저마다 다르다. 아이비리그처럼 보장된 미래가 기다리는 계단을 착실히 올라도 모두가 기업가나 월스트리트의 금융가를 꿈꾸진 않는다. 성공의 기준으로 차나 집의 브랜드 명사를 열거하기보다 건강, 취미, 삶의 방향성에 대한 동사와 형용사 표현이 먼저 등장한다. 누군가는 세계 평화를 위한 기금 마련이나 개발도상국의 식수 시설 개발과 같은 이상적인 모델을 현실에 구현한다. 매년 휴가지에서 가장 많이 버리고 온 책 순위가 아마존 판매량과 직결되는 것만 봐도 휴식의 영역에 책이 존재한다. 인스타그램 각이라 불리는 사진 한 컷에 총력을 기울이는 한국 특유의 보편적인 휴가와는 다른 모습이다.

왜 우리는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읽고 버리지 못할까. 책을 읽는 사람은 찾기 어려운데 왜 절대다수가 자신의 책을 출간하고 싶어 할까. 호랑이 가죽 같은 인생의 버킷리스트, 지적 허영이라는 욕망이 책이라는 물성으로 발현된 것은 아닐까. 독서가 행위예술이 된 시대.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콘텐츠를 만들고 사람과 사물의 특별한 순간을 기록하는 동안 나는 책의 내일이 곧 인간의 미래와 맞닿아 있음을 목도했다. 이런 생각에 잠겨 내려야 할 정거장을 지나칠뻔했다. 문이 닫히기 전에 서두르다 잡지를 두고 내렸다. 누구의 손을 거쳐 어디까지 가게 될까. 시간의 바퀴를 데굴데굴 굴리다 어느 중고 서점에서 재회하게 되진 않을까. 멀어져가는 지하철을 보며 즐거운 여행이 되기를 바랐다. 책에 발이 달려 스스로 가방을 걸어 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열린 결말로 비워둔 마지막 페이지가 어떻게 채워질까 궁금해하는 독자의 마음으로 호기심과 애정을 담아 손을 흔들었다.

정유미 포포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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