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4일(일)

[농업의 미래, 미래의 농업] ‘식량안보 정글’을 헤쳐 나갈 내비게이션

남재작 한국정밀농업연구소장
남재작 한국정밀농업연구소장

지도를 보고 길을 찾아가는 걸 ‘독도법’이라 한다. 독도법에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자신의 위치를 찾는 것이다. 나침반으로 방향을 확인하고 지도의 등고선과 지형지물과 대조해 현재 위치를 특정한다. 그 이후는 쉽다. 지도를 따라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가면 된다.

현실 세계에서도 독도법의 원리는 그대로 적용된다. 만약 농업의 미래가 궁금하면 먼저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떤지 알 필요가 있다. 이때 사용되는 방법이 ‘벤치마크’다. 벤치마크는 기업이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다른 회사나 업계의 우수사례를 참고하는 경영 기법을 일컫는다. 물론 기업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방법론이기도 하다. 농업 분야에서는 시범농장, 선진지 견학, 해외연수 등이 벤치마크 목적으로 활용된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벤치마크는 선진국의 사례를 국내에 재현하는 용도로 주로 사용된다. 농업 분야에서도 정책과 제도, 기술과 교육 등 다양한 영역에서 외국의 사례를 국내에 적용해 우수한 성과를 거뒀다. 학계에서는 이를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 전략이라고 명명했다. 벤치마크를 활용한 빠른 추격자 전략은 우리가 따라 할 대상이 있는 한 유효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우리 앞에서 길을 만들어 주던 대상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우리만의 지도가 필요한 때가 도래했다.

해외 사례가 국내에 적용될 때는 필연적으로 부작용도 발생한다.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적 배경을 도외시한 정책과 제도가 다른 나라에서 같은 효과를 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말처럼 외국의 성공 사례는 타국에 이식돼 후유증만 남길 수 있다. 벤치마크를 통해 독일에서 농민이 되기 위해서는 농업직업학교를 졸업한 후 국가자격시험을 통과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는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다. 아마 대부분은 “독일은 농민 자격이 엄격하며 국가가 농업의 전문성에 대해 인정하고 있다”라는 해석을 좋아할 것이다. 이 주장은 농민은 의사, 선생님에 이어 세 번째로 선호하는 직업이라는 말과 결합하면 더 큰 타당성을 갖는다. 그렇지만 “독일은 원래 직업학교를 나와서 자격시험을 통과한 후 직업을 가지는 게 당연한 나라이고, 농업 역시 그 시스템 중 하나다”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물론 둘 다 사실에 부합한다.

우리가 어떤 견해를 지지할지는 우리가 무슨 주장을 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독일 사례를 참고해 농민이라는 직업은 중요하니 국가가 자격 기준을 만들고 교육시스템을 정비해야 한다는 근거로 사용할 수 있다. 그렇지만 농업 부분만 그렇게 하자는 주장은 독일의 교육제도에 대한 불완전한 이해의 결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는 걸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그래도 여기까지 큰 무리는 없다. 가장 난감할 때는 독일, 프랑스, 스위스의 사례를 각각 인용하는 것이다. ‘엄친아’와 비교되면 누구도 멀쩡하기 어렵다. 이런 위험성 때문에 비교는 하지 않는 게 가장 좋다. 그냥 아이디어의 소재로 활용하는 정도가 적당하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 선진국의 선행사례가 없으면 새로운 정책 제안은 타당성을 가지기 어려웠다. 농업 현장에서도 벤치마크라는 이름으로 ‘따라하기’가 장려되면서 지식의 가치는 무시되기 일쑤였다.

다른 나라를 비교 대상으로 삼고 열심히 달려온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 무리한 줄 알면서도 옷이 크면 몸을 키웠고, 신발이 작으면 발을 맞췄다. ‘따라하기’는 지식의 확산을 촉진했지만 창의력을 말살했다. 이제는 우리의 지도를 만들 때다. 외국의 사례를 이식하기에는 우리 사회는 너무 복잡해졌고, 더 이상 참고할 나라도 몇 남지 않았다.

이 역시 외국 사례를 벤치마크 할 수 있다. 선진국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무형의 자산인 지식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고 대안 경로를 제시해 주는 민간 싱크탱크의 역할이 두드러진다는 걸 들 수 있다. 국내에서도 탄소중립 대안 경로를 제시한 사단법인 넥스트 등 민간 싱크탱크의 역할이 눈부시다. 농업 분야에서 우리와 비슷한 구조를 가진 나라를 찾기는 어렵다. 미래 농업을 위한 대안 경로를 제시하고 식량안보의 정글을 안내해 줄 민간 싱크탱크가 필요하다. 독창적인 지식은 미래를 안내해 줄 내비게이션이 될 것이다.

남재작 한국정밀농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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