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에 맞는 여름 날씨에 다들 화들짝 놀랐다. 살아온 인생이 길든 짧든 낯선 경험일 수밖에 없었다. 극한기상이 주는 당황스러움은 일회성이 아니라 앞으로 자주 겪게 될 기후 변덕의 일부에 불과하다. 4월 초에 갑자기 찾아온 무더위를 지날 때만 해도 약간의 희망을 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제는 공포영화처럼 어디서 기후 괴물이 뛰쳐나와도 이상하지 않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마음을 놓지는 말자. 이제 겨우 도입부가 시작되었을 뿐이다.
너무 이른 더위와 너무 늦은 더위는 선진국 시민들에게 냉방기 덮개를 다시 벗겨야 하는 번거로움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대부분 생물에게 이런 변화가 날벼락에 가깝다. 예민한 생물시계를 가진 과수와 부지런한 꿀벌은 계절 변동 범위를 벗어난 무더위와 연이은 냉해의 습격을 고스란히 받았다. 생물계절의 이상은 농업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과일의 생산량을 많게는 40%까지 떨어뜨렸고 쌀 생산량마저 줄어들 전망이다.
육상 식물종의 약 40%는 희귀종으로 분류되는데, 기후변화는 이 분류군의 식물종을 멸종 위기로 내몰고 있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적합한 기후대로 서식지를 옮겨야만 하는데, 식물종은 10년마다 고도는 11.0m, 북으로는 16.9km를 이동한 것으로 나타났다. 농작물은 더 빠르게 이동한다. 생존 한계보다 품질하락과 생산성 감소로 인한 경제성 한계에 먼저 도달하기 때문이다. 에티오피아에서는 커피 산지가 점점 더 고지대로 옮겨가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제주에서 재배되던 아열대 작물이 남해안을 지나 남부지방으로 북상하고 있다.
기후변화와 극한 기상이 농산물 수확량을 크게 줄이기는 하겠지만 버틸 수는 있다. 하지만 과학기술 투자로 인해 증가한 농업 생산성은 기후변화로 상쇄되어 투입비용 증가에도 불구하고 생산성은 정체될 수밖에 없다. 극한기상으로 인한 재해 규모는 커지고 빈도는 늘어나면서 식량 공급망의 불안정성이 증가한다. 이런 변화는 모두 식량 가격을 높이는 압력으로 작용한다. 이런 흐름 속에서 정보력이 뛰어난 글로벌 식량기업은 더 큰 수익을 올리겠지만, 식량산업을 등한시한 우리나라는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 역시 지속될 것이다.
이렇듯 기후변화로 인한 여파는 공평하지 않다. 이미 충분한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대부분의 선진국은 생물다양성을 증가시켜 기후재난의 충격을 완화하는방향으로 농업을 바꾸고 있다. 반면에 개도국은 부족한 식량을 늘리기 위해 생물다양성을 훼손하는 방향으로 토지 이용을 늘리면서 오히려 기후재난에 대한 취약성도 더 커지고 있다. 특단의 조치 없이 이런 상황을 반전시킬 수는 없다. 인정하기 싫지만, 이런 우울한 상상이 우리가 보게 될 미래와 훨씬 더 가깝다. 그럼 우리나라는 어느 군에 속할까?
우리나라는 일본과 함께 1인당 농경지 면적이 세계 최저 수준인 0.03헥타르에 불과하다. 대부분 농산물을 수입해야만 국민에게 필요한 영양을 공급할 수 있다. 두 국가 모두 식량 가격이 오르더라도 추가로 부담할 수 있는 경제력은 충분하지만 식품물가 상승은 감내해야 한다. 우리나라 하위 20% 국민의 가처분소득대비 식비 지출은 40%를 넘어선다. 하위 10%로 국한하면 그 수치는 이미 50%를 넘겼다. 소득계층에 따라 식품 가격 상승에 대해 느끼는 불안감이 다를 수밖에 없다. 만약 여기서 식품 물가가 더 가파르게 오른다면 무슨 일이 생길까? 이건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의 최근 보고서 역시 식량부족 인구가 이미 전 세계 인구의 9.2%, 약 8억 명에 이르렀다고 경고한다.
생물계절의 변화는 천천히 일어난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그 자리에 멈춰있다고 느낄 만큼 천천히 일어난다. 그러다가 문득 주변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걸 느끼는 순간이 온다. 그때쯤에 이르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된다. 또 하나 알게 되는 게 있는데, 그동안 우리가 준비해 놓은 게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먼 미래의 일이라 생각하겠지만 불과 10년도 채 남지 않았다. 2023년은 계절의 변덕이 극심했던 해로 기억될 것이다. 미래 세대를 위해 식량 문제를 본격적으로 대비하기 시작한 해로 기억되게 할 수는 없을까?
남재작 한국정밀농업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