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5일(목)

[기차에서 일합니다] 유괴 미수 사건의 전말

정유미 포포포 대표
정유미 포포포 대표

“선생님! 오늘 은성이(가명)가 유괴될 뻔해서 경찰서에 다녀오는 길이에요!” 부재중 통화를 이제 발견했다는 A선생님의 목소리는 격양돼 있었다. 유괴라니. 9시 뉴스에 등장할 법한 일이었다. A선생님이 부리나케 경찰서에 달려갔을 때 은성이는 잔뜩 겁을 집어먹은 채 떨고 있었다. 꼬치꼬치 상황을 캐묻는 어른들 앞에서 아이의 진술은 조금씩 흔들렸다. 혼비백산한 아빠를 대신해 A선생님은 경찰과 인근의 CCTV를 확보하러 나섰다. 자초지종은 이러했다. 돌봄센터에 간다던 아이는 방향을 틀어 놀이터에서 홀로 놀고 있었다. 낯선 사람이 다가와 처음에는 말로 그다음에는 완력으로 아이를 끌고 가려는 시도가 수면 위로 드러났다.

그날의 일은 단순 유괴 미수 사건이 아니었다. 전지적 시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었다. 지역의 결혼이주여성들과 그림책을 만드는 ‘그림과 치유’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아이들을 두고 본국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엄마들의 사연을 처음 접하게 됐다.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타국에서 가정 폭력, 향수병 등 여러 상황에 노출된 여성들이 도움의 손길을 청할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고민 끝에 본국에 홀로 돌아가는 그 발걸음이 가벼웠을 리 없다. 그렇게 남겨진 아이들과 양육을 떠맡게 된 아빠는 이중고에 처했다. 생계에 쫓겨, 정보의 부재로 어쩔 수 없이 방임된 아동의 숫자는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다. 돌봄센터나 보육 지원 정책을 알게 된다면 그나마 운이 좋은 케이스. 제도권 안에서 받을 수 있는 혜택을 찾을 여력조차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정보 접근성의 허들을 넘었다 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사회보장제도의 혜택은 건강보험료를 기준으로 결정되는데 단 몇백원 차이로 은성이네는 지원 대상에서 탈락했다. A선생님이 시청과 관련 기관을 오가며 읍소한 끝에 은성이 형제는 돌봄센터에 다닐 수 있게 됐다. 운이 좋았다. 형제 곁에는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지나치지 않고 앞장서 돌보는 어른이 있었다. 그렇다면 제도권 안에 편입되지 못하거나 홀로 집에 남겨진 아이들의 상황은 어떨까.

코로나로 등교가 어려웠던 지난 2년 동안 학력 격차는 더욱 심하게 벌어졌다. 한글을 모른 채 3학년이 돼서야 학교를 제대로 다니게 된 아이들은 수업을 따라가지 못했다. 같은 교실 안에서 진도는 물론 문해력 격차가 날로 벌어져만 갔다. 친구들로부터 놀림의 대상이 되어 등교를 거부하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렸다. 그나마 집 밖에 갈 만한 곳인 놀이터 역시 더는 안전한 공간이 아니었다. 대다수 또래는 학원에서 교우 관계와 학습을 선행한 다음 학교로 향했다.

지난 5년간 A선생님과 ‘그림과 치유’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나는 형제의 성장을 지켜보았다. A선생님은 타인으로부터 존중받고 사랑받는 경험을 충분히 누릴 수 있도록 살뜰히 형제를 보살폈다. 다만, 아이들이 선생님을 엄마라 부르기 시작할 무렵 한 가지 원칙을 정했다. 엄마가 돌아오실지도 모르니 선생님에게 엄마라는 호칭은 쓰지 않을 것. A선생님은 엄마와의 기억이 흐릿한 둘째 아이에게는 헌신적인 양육자의 역할을 자처했고, 엄마가 그리운 첫째에게는 엄마가 처했을 상황에 대해 충분히 이해시켰다. 좋은 어른이 곁에 있어 형제는 밝고 튼튼하게 자랄 수 있었다.

그야말로 운이 좋았다. 중요한 것은 아이들의 미래를 운에 맡길 수 없다는 사실이다. 수십 년을 한국에 살았어도 의사소통이 어려워 사회와 가족으로부터 소외되는 결혼이주여성이 과반수를 차지한다. 언어를 습득하는 데 교육과 실습은 필수 요건이지만, 집안일만으로도 벅찬 엄마가 집 밖에 나오려면 남다른 각오가 필요하다. 가족 하나만 보고 평생을 헌신해 온 이들이 온전히 이 땅에 뿌리 내리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엄마, 결혼이주여성이라는 수식어에 가려져 있던 한 개인의 역사성과 고유성을 조명해 고향의 도서관으로 보내는 그림책 제작 프로젝트는 이렇게 시작됐다. 엄마를 돌보는 것이 곧 아이를 돌보는 것이라는 우리의 미션은 이상이 아니다. 철저히 현실에 기반한 증언이다.

정유미 포포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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