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2일(금)

정영일 이랜드재단 대표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집, 그리고 곁에 있어줄 어른”

사각지대 가정밖청소년
‘플랫폼’ 구축해 지원

청소년 직접 돕는 대신
‘돕는 기관’ 발굴해 서포트

아이들이 위태롭다. 가정이라는 울타리에서 밀려난 아이들이 갈 곳은 뻔하다. 제약이 많은 ‘쉼터’ 대신 거리로 나선다. 먹고살기 위해 돈을 벌기로 한다. 쉽게 돈을 벌 방법이 참 많다. 도박, 성매매, 마약 배달 등 각종 범죄가 아이들을 유혹한다.

이랜드재단이 ‘가정밖청소년’을 돕는 사업을 시작한다. 가정밖청소년을 재단의 핵심 사업 분야로 선언하고 장기적인 지원을 공표했다. 당사자를 직접 돕는 방식이 아니라 ‘청소년을 돕는 기관’을 찾아내 지원하는 방식을 택했다. 지난 8일 만난 정영일(60) 이랜드재단 대표는 “위기에 빠진 아이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는 작은 단체들이 전국 곳곳에 있다”면서 “단체들이 지치지 않고 활동을 이어갈 수 있게 필요한 부분을 찾아 메워주는 역할을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지난 8일 만난 정영일 이랜드재단 대표는 "가정밖청소년을 돕는 단체들이 연대하고 교류할 수 있는 플랫폼을 구축한다"고 밝혔다. /양수열 C영상미디어 기자
지난 8일 만난 정영일 이랜드재단 대표는 “가정밖청소년을 돕는 단체들이 연대하고 교류할 수 있는 플랫폼을 구축한다”고 밝혔다. /양수열 C영상미디어 기자

―가정밖청소년은 일반적으로 민간 기업에서는 지원을 꺼리는 영역이죠.

“가출 청소년, 비행 청소년이라는 부정적 이미지 때문이에요. 성과가 안 나는 분야이기도 하고요. 아이들이 사고 안 치고 평범하게 살게 됐다는 것 정도가 가정밖청소년 사업의 성과니까 자랑하기도 애매하죠. 사실은 그래서 시작한 겁니다. 성과 안 나는 일, 남들이 안 하는 일이라 우리가 하기로 했어요. 그게 이랜드재단이 일하는 방식이니까요.”

―어떤 방식인가요.

“재단이 설립된 게 1991년입니다. 박성수 이랜드그룹 회장께서 재단을 설립하면서 ‘이 시대의 가장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서 도우라’는 미션을 주셨어요. 성과를 자랑하기 위한 활동이 아니라 진짜 사각지대를 찾아 돕는 일에 몰두하라고 하셨죠. 이런 철학에 따라 30여 년간 위기 가정에 주거비, 치료비, 생계비, 교육비를 지원하는 사업을 해왔습니다. 이번에 재단의 사업 방향을 새롭게 정비하면서 가정밖청소년에게 집중해야겠다고 마음먹고 회장님을 뵈러 갔어요. 아이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 돕는 사람들의 헌신에 대해 설명해 드렸습니다. 지원해주실까? 조금 걱정했는데 괜한 고민이었습니다. 잠시 생각하시더니 꼭 필요한 일인 것 같으니 열심히 잘해보라고 하셨어요. 이랜드그룹도 돕겠다고 하셨죠.”

―2023년 현재, 가정밖청소년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나요.

“보육원, 그룹홈, 쉼터, 소년원 등 시설에서 지내는 아이들도 있고 ‘가출팸’을 이뤄 생활하거나 고시원, 모텔 등에서 불안정한 생활을 이어가는 아이들도 있죠. 최근에는 다문화 아이들이 늘어나면서 가정밖청소년 중 다문화 비율이 늘어나고 있어요. 이 부분도 곧 이슈가 될 겁니다. 가정밖청소년 중에 판단력이나 학습 능력이 떨어지는 경계선 지능 아동이 많다는 것도 주목해야 해요. 범죄 조직의 표적이 되기 쉽거든요.”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뭘까요.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는 ‘집’과 곁에 있어줄 ‘어른’이죠. 특히 좋은 멘토를 만나게 해주는 게 중요합니다. 가정밖청소년 대부분이 마음에 상처를 안고 있어요.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주고 믿어주는 한 사람의 어른을 만나면 아이들은 바뀝니다.”

―청소년을 직접 지원하지 않고 ‘돕는 단체’들을 지원하기로 한 이유는요.

“지난 몇 달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가정밖청소년을 돕는 많은 단체를 만났습니다. 공동체를 이뤄 아이들의 부모가 되어주기도 하고 문제가 생기면 경찰처럼 달려가 구조해오기도 하죠. 아이들이 겪는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고 필요한 제도와 정책이 무엇인지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전문가들입니다. 진정성과 전문성을 가지고 청소년을 돕는 좋은 단체가 이미 많이 있는데 재단이 굳이 같은 일을 할 필요는 없죠. 단체들이 일을 잘할 수 있게 지원하는 역할을 하는 게 가정밖청소년 문제를 해결하는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지원이 이뤄지나요.

“대부분의 단체가 정부 지원금을 받지 못하고 있어요. 주변의 후원과 도움, 자원봉사자들을 통해서 어렵게 단체를 꾸려나가고 있죠. 재정이 열악한 단체에는 활동지원금을, 아이들을 도우며 정신적으로 소진된 직원들에게는 회복 프로그램을 지원할 계획입니다. 또 멘토 양성에 어려움을 느끼는 단체들을 위해 ‘고잉 투게더’라는 멘토링 역량 강화 프로그램을 제공할 예정입니다.”

―가정밖청소년 지원 단체들을 위한 ‘플랫폼’을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각개전투하던 현장 단체들이 모여서 네트워킹도 하고 정보와 노하우도 공유하는 플랫폼이에요. 이랜드재단이 주인 노릇 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선한 일을 하고자 하는 모두가 주인이 되는 플랫폼이에요. 단체를 돕고자 하는 시민, 재단, NGO 등이 플랫폼에 들어와서 상호작용하며 임팩트를 만들어내는 형태가 될 겁니다.”

김시원 기자 blindletter@chosun.com

관련 기사

Copyrights ⓒ 더나은미래 & futurechosun.com

전체 댓글

제262호 창간 14주년 특집

지속가능한 공익 생태계와 함께 걸어온 1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