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일(토)

워싱턴DC 법정… 장애인에 팸플릿 읽어주는 목소리로 가득찬 그곳

미국 찾은 장애청년드림팀
휠체어·전동 스쿠터 타는 장애인 75명 수용하도록 통로 넓히고 구조 재설계
시각장애인 위한 보조인 팸플릿 등의 서류 대독해
청각장애인 전담 경찰서 수화 통역사들 상시 대기 웹캠으로 실시간 수화해

“올바른 의사소통 없이 장애인 체포·취조한다면 위험한 상황 발생할 수도”
지난 8월 23일, 워싱턴DC 법원 1층에 있는 법정. 성인 두세 명이 동시에 지나갈 만큼 통로가 널찍했다. 청중석 맨 앞자리엔 의자가 없었다. 미국장애인법(ADA·Americans with Disabilities Act) 코디네이터로 근무하는 그랜디(H. Clifton Grandy)씨는 “한 장애인 단체에서 휠체어와 전동 스쿠터를 이용하는 장애인 75명이 들어갈 수 있는 법정을 요구한 적이 있다”면서 “법원이 모든 인원을 수용할 수 있도록 구조를 재설계했다”고 밝혔다. 지하 법정 또한 완만한 경사로와 엘리베이터를 갖췄고, 장애인도 배심원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배심원 좌석에도 이 같은 설계가 반영됐다.

“자, 이 팸플릿에 적혀 있는 내용을 읽어 드릴게요. ‘워싱턴 DC 법원에서는 신체 또는 지적 장애인들의 편의를 위한 장비를 무료로 제공해드리고 있습니다'”

그랜디씨가 변호인석에 앉아 팸플릿을 읽었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법정을 가득 채웠다. 박성희(20·이화여대 특수교육과)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박씨는 글을 읽기 위해서는 눈앞까지 책을 끌어당겨야 하는 저시력 시각장애인이다. 워싱턴DC는 시각장애인의 요청이 있으면 서류를 대독하는 보조인을 붙여준다고 한다. 법정 한편의 모니터 스크린에 표시된 글씨는 변호인석과 청중석에서도 쉽게 볼 수 있도록 큼지막했다. 시각장애인 NGO ‘맹인을 위한 미국 출판사'(American Printing House for the Blind)는 저시력 장애인을 위해 18포인트 이상의 글씨 크기를 권하고 있다. 점자는 모든 법정 표시물에 기록돼 있었다. 이뿐 아니라 이 법정에는 청각장애인이 범죄자나 피해자, 증인 자격으로 법정에 서게 될 경우 2인의 수화통역사를 대동해 의사소통을 지원하고 있었다. 청중 중 청각장애인이 있을 경우 이들을 위한 수화통역사가 따로 존재한다고 한다. 박씨는 “우리나라 관공서를 방문할 때마다 저시력 시각장애인이 글을 쉽게 읽도록 돕는 장비를 구하기 어려웠는데, 미국은 세세한 부분까지 장애인을 위한 지원이 갖춰졌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①미국장애인법 코디네이터인 그랜디씨가 법정에서 박성희씨에게 팸플릿을 읽어주고 있다. ②워싱턴 경찰 청각장애인 부서의 조든 경관이 웹캠을 활용한 수화통역 활동을 시연하고 있다. ③캔자스 로렌스 법원을 방문한 에이플러스팀 /한국장애인재활협회 제공
①미국장애인법 코디네이터인 그랜디씨가 법정에서 박성희씨에게 팸플릿을 읽어주고 있다. ②워싱턴 경찰 청각장애인 부서의 조든 경관이 웹캠을 활용한 수화통역 활동을 시연하고 있다. ③캔자스 로렌스 법원을 방문한 에이플러스팀 /한국장애인재활협회 제공

◇웹캠을 활용해 청각장애인과 수화통역사를 실시간 연결하는 경찰서

영화 ‘도가니’로 사건이 공론화되기 이전까지 청각장애인 학생들의 진술 신빙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법원, 청각장애인 체포 과정에서 과도하게 수갑을 채우고 수화통역사를 제공하지 않은 경찰…. 형사사법 절차에서 장애인을 배려하는 인식이 부족한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의 경찰과 검찰, 법원 등의 시스템은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박성희씨와 송수현(21·경기대 교정보호학과)씨는 직접 그 현장을 목격하기 위해 지난 8월 23일부터 8박10일 일정으로 미국 워싱턴DC, 캔자스, 뉴멕시코를 찾았다. 이들은 한국장애인재활협회와 신한금융그룹이 지원하는 ‘장애청년드림팀’에 선정된 에이플러스(A-Plus)팀 소속이다. 올해 9회째를 맞는 장애청년드림팀은 장애 청년이 국제사회 리더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해외 연수 사업이다. 이번 행사에는 총 65명의 장애·비장애 청년이 5개 국가를 방문했다. 송수현씨는 “한국은 아직 장애인을 위한 형사사법 지원이라는 개념이 부족한데, 미국은 형사사법 상황에서 장애인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고 싶었다”고 했다.

같은 날 오후 에이플러스 팀은 워싱턴 동부를 방문했다. 택시를 타고 한적한 콘크리트 도로를 10분쯤 달리자 작은 경찰서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2002년부터 워싱턴DC에서 운영하고 있는 청각장애인 전담 부서다. 이스털린(G. Easterlin) 경관은 “경찰이 장애인을 체포하고 취조하는 과정에서 올바른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위험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조든(M. Jordan) 경관이 컴퓨터 스위치를 눌러 ‘비디오 릴레이 프로그램(Video Relay Program)’을 켰다. 몇 초가 지나자 웹캠에는 일련의 연락처가 주르륵 모니터에 표시됐다. 24시간 상시 대기 중인 수화통역사들의 연락처다. 워싱턴 경찰은 시내에 거주하는 수화통역사들과 계약을 맺고 상시 연락망을 구축했다. 조든 경관은 “과거에는 수화통역사가 경찰서에 올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는데, 지금은 웹캠을 통해 실시간으로 청각장애인의 수화 장면을 전송해 통역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시연을 지켜보는 두 청년의 눈빛이 놀라움으로 반짝였다. 워싱턴은 2010년 7개 경찰서와 2개의 파출소에 비디오 릴레이 프로그램을 전격 도입해 의사소통에 활용하고 있다. 수화통역사·경찰·장애인 간의 원활한 소통을 위한 활동도 병행한다. 워싱턴 경찰은 청각장애 전문학교인 갈라우뎃대학(Gallaudet University)과 제휴를 맺고 1년에 두 차례 교류 행사를 가진다. 행사에서 논의된 내용은 수화통역사 및 청각장애인 교육에 활용한다. 2006년에는 청각장애인 체포 시의 행동수칙을 영상으로 제작해 경찰서와 청각장애인 커뮤니티에 배포했다.

◇경찰학교에서 22주간 장애인 인권교육도 진행해

미국은 장애인 인권 보호를 위한 교육도 강화하고 있다. 캔자스 로렌스경찰서의 아론 하이크마이스터(A. Hachmeister) 경관은 “경찰학교에 입학하면 약 22주간 장애인 인권 교육을 받는다”고 말했다. 학교 수료 이후에도 매년 40시간씩 지적장애인의 특성과 대처 방안에 대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

특히 지적장애인의 장애 여부를 검증하기 위해 미 법원에서는 감정인(Expert Witness) 제도를 운영한다. 특수교육, 발달장애 분야에 종사하는 전문가 중 법적 지식을 갖춘 이들을 초청해 장애 유무와 경중을 검증한다. 검사와 변호사 측의 감정인이 다른 해석을 내놓을 경우, 판사가 한 명의 감정인을 추가 배치해 최종 검증을 진행한다. 캔자스 로렌스 법원의 브랜슨(C. Branson) 검사는 “장애 정도에 따라 처벌 강도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한국은 지난 7월에 대법원에서 ‘장애인 사법 지원을 위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장애 유형별 지원 기준을 마련했다. 그전까지는 사안별로 장애인 권리를 달리 보장해왔다. 캔자스대 특수교육학과의 턴불(R. Turnbull) 교수는 “잘못된 판결로 장애인이 경제·정신적 손실을 보지 않게 체계적으로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수를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 두 청년은 “아직 한국인은 장애인이 형사사건에 휘말릴 때 장애인의 특성을 이해하고 대화하려는 노력이 부족한 것 같다”며 “장애인의 손을 든든하게 잡아주는 형사사법 전문가로 성장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워싱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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