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오대희 서울시사회서비스원 장애인활동지원사
“긴급 상황이야.”
지난 3월 31일. 장애인 활동지원 일과를 마치고 잠시 사무실에 들른 오대희(33)씨를 센터장이 다급히 찾았다. 서울 구로구에 사는 중증장애인이 코로나19 확진자와 접촉해 자가격리에 들어가게 됐다는 이야기였다. 확진자는 장애인의 엄마였다. 엄마는 격리 치료를 앞두고 있었고, 밀접접촉자였던 아들은 14일간 자가격리 생활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센터장이 물었다. “혼자서는 생활이 안 되는 중증장애인인데, 함께 격리시설로 들어가서 돌봐줄 수 있겠느냐”고.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가야죠. 그런데 언제요?” “내일 당장.”
국내 코로나19 확진자가 1만명에 근접하며 맹위를 떨치던 때였다. 중증장애인들 사이에서는 ‘코로나보다 무서운 게 자가격리’라는 말이 퍼지고 있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생활할 수 있는 장애인들에게 자가격리는 사형선고와 같았다. 대구 등 확진자가 많이 나온 지역에서는 자가격리된 장애인을 도울 활동지원사를 구하지 못해 아우성이었다. 감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나서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서울에서도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자가격리 대상자가 된 구로구의 중증장애인은 3세 수준의 지능을 가진 발달장애인 청년이었다. 오대희씨는 집으로 돌아가 곧장 짐을 쌌다. 다음날 그는 서울시내 한 격리시설에 장애인과 ‘동반 입소’했다. 그를 포함해 총 3명의 장애인활동지원사가 퇴소 때까지 2주 동안 장애인 청년 곁을 지켰다. 자가격리 장애인을 지원하기 위해 활동지원사가 시설까지 따라 들어간 건 서울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조용히 잊힐 뻔했던 활동지원사들의 이야기. 세상에 꺼내놓고 싶어서 오대희씨의 일터로 찾아갔다. 지난 3일 서울 미아동의 주택가 골목에서 그를 만났다. 그가 전담하는 중증장애인 부부가 사는 동네였다.
“부모님께는 말 못 했어요”
―자가격리 장애인을 돌보겠다고 ‘자원’해서 간 이유부터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대답을 하려면 먼저 ‘장애인활동지원사’라는 직업에 대해 설명해야 할 것 같아요. 우리는 신체적, 정신적 장애를 가진 분들의 활동을 돕는 일을 해요. 다양한 장애의 유형과 특징을 파악해 그때그때 적절한 도움을 주는 ‘전문가’들이죠. 장애인의 자립생활을 지원할 뿐 아니라 장애인 가족의 부담을 줄여 삶의 질을 높여줍니다. 장애인이 있어서 우리가 존재하는 거고, 우리가 있어서 장애인의 삶이 유지될 수 있어요. 대단한 이유가 있었다기보단 ‘내 일이고, 내가 전문가니까, 당연히 내가 한다’고 단순하게 생각했어요. 저는 우리 일이 소방관, 의사, 간호사와 다르지 않다고 보거든요. 코로나19와 같은 재난 상황에서 직업인으로서 각자 역할과 책임이 있잖아요. 더구나 저는 서울시사회서비스원(서사원)이라는 공공기관에 소속돼 있으니까 책임이 더 크죠.”
―그래도 막상 상황이 닥쳤을 땐 겁도 났을 것 같아요. 자가격리 장애인이 확진자와 한집 살던 가족이었으니까요.
“지난 2월 말 서사원에서 이런 상황을 예측하고 ‘자가격리 장애인 긴급돌봄 TF팀’을 꾸렸어요. 일이 벌어지고 나서 사람을 뽑으면 너무 늦으니까 미리 지원자들을 받아놓은 셈이죠. 긴급돌봄 팀에 지원해놓고 그때부터 혼자 계속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각오를 다졌다고 할까. ‘무조건 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고민은 전혀 없었어요. 아! 딱 하나 걸리는 게 있긴 했어요. 고양이요.”
―고양이요?
“제가 고양이 집사거든요(웃음). 당장 다음 날부터 2주나 집에 못 들어가게 됐으니까 고양이가 제일 걱정됐어요. 지인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고양이 긴급돌봄 지원’을 요청했어요(웃음). 고맙게도 맡아줘서 잘 다녀올 수 있었죠.”
―주변에서 말리진 않던가요.
“사실은 부모님께도 얘기 안 하고 들어갔어요. 저도 우리 집에서는 귀한 자식이라서(웃음). 부모님께 말씀드렸으면 아마 못 가게 했을 거예요. 아직도 모르고 계세요. 이제 신문 기사 보고 아시겠네요. 너무 급박하게 진행되다 보니 준비해야 할 게 많아서 알리고 그럴 시간도 없었어요.”
―준비할 게 많았나요.
“자가격리 장애인을 돌보는 건 처음이었으니까요. 입소 시설이 어떤 환경인지도 알 수 없었고, 앞으로 2주 동안 벌어질 일도 예측하기가 어려웠죠. 장애인에 대한 정보도 부족했어요. 정보가 많을수록 더 좋은 돌봄 서비스를 할 수 있거든요. 특히 이번처럼 발달장애인인 경우엔 ‘정서 지원’이 매우 중요해요. 자가격리 장애인을 돌보는 게 저도 처음이지만, 장애인도 보호자와 떨어져 격리되는 게 처음일 테니 얼마나 불안하겠어요. 뭘 가져가야 할지, 어떻게 일과를 짜야 할지 생각할 게 많아서 밤에 짐을 싸는 내내 머리가 복잡했어요.”
탈북자 엄마와 발달장애인 아들
―장애인은 어떤 상황이었나요.
“다운증후군을 가진 발달장애인이었어요. 행동장애와 정서장애가 동반되고 있었고요. 나이는 스무 살 정도인데 만나보면 그냥 세 살짜리 아이예요. 장애인의 어머니는 탈북자 출신이었고, 장애를 가진 아들과 단둘이 살았다고 해요. 한 번도 아이와 떨어져 지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확진 판정을 받고 무척 괴로워하셨어요. 원래 집에 방문해서 돌봐주던 활동지원사가 있었는데 어머니가 확진 판정을 받으면서 이분도 자가격리에 들어가게 됐어요. 아이를 혼자 두고 입원할 생각에 많이 우울해하셨죠.”
격리시설에서의 생활은 난항의 연속이었다. 입소 절차를 밟을 때부터 벽에 부딪혔다. 입소 업무 담당자들이 ‘자가격리 장애인과 동반 입소’라는 상황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일이 설명해서 풀어야 했다. 첫날부터 나흘간은 2교대로, 닷새째부터는 한 명이 더 투입돼 3교대로 근무했다. 숙소에서는 ‘방호복’을 입고 장애인을 돌봤다. “식사를 가져오거나 상태를 체크하러 들어온 시설 관계자들이 매번 똑같이 물었어요. ‘자가격리인데 왜 둘이 같이 있느냐’ ‘자가격리 대상자가 아닌 사람이 왜 여기 입소해 있느냐’…. 담당자가 바뀔 때마다 설명하느라 입이 아플 지경이었어요.”
―하루 일과는 어땠나요.
“발달장애라는 특성상 무엇보다 ‘안정’이 중요하다고 판단해 루틴을 만들었어요. 6시 정도 기상해서 체조하고 같이 밥 먹고, 8시부터 11시까지는 오전 놀이 프로그램을 만들어 운영했어요. 12시부터 오후 1시까지 점심을 먹고, 또 오후 프로그램을 진행했어요. 종이접기, 클레이, 풍선놀이, 학습지 풀기 등….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서 격리 치료 중인 어머니께 틈틈이 보내드렸어요. 너무 걱정 마시라고. 잘 지내고 있다고.”
―클레이나 학습지 같은 건 미리 준비해서 가져간 건가요.
“필요한 물품은 서사원에 수시로 요청해 지원받았어요. 공공기관 소속이 아니라 민간 활동지원사였다면 정말 힘들었을 거예요.”
―소속이 공공이냐, 민간이냐에 따라 차이가 큰가 봅니다.
“그동안에는 정부가 장애인 활동지원 사업을 모두 민간기관에 위탁해 운영하고 있었어요. 그러다 지난해 7월 서사원이 개원하면서 공공에서 이 사업을 하기 시작했어요. 저도 민간업체에서 일하다가 작년에 입사했고요. 민간 활동지원사는 임금을 시급제로 받지만, 서사원 활동지원사는 모두 정규직이고 월급을 받아요. 훨씬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으니 결과적으로 서비스의 질이 높아지죠.”
“만나자마자 꽉 안아줬어요”
―언제부터 이 일을 했나요.
“대학교 4학년때 휴학하고 이런저런 경험을 하다가 ‘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일하는 친구가 있어서 따라가 봤어요. 거기 일을 조금씩 돕다가 2015년에 본격적으로 활동지원사로 일하기 시작했어요. 처음 맡은 임무는 40년 동안 시설에서만 살았던 60대 장애인의 ‘탈(脫)시설’을 돕는 일이었어요. 저도 그 일이 처음이고 그분도 자립 생활이 처음이라 시행착오도 많았어요. 3년 정도 동고동락했어요. 자립생활주택에 있다가 임대주택에 당첨돼 입주하는 것까지 도와드렸으니까요.”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요.
“사실 돈을 많이 버는 직업도 아니고 몸이 편한 직업도 아니죠. 육체적으로도 무척 힘든 직업이에요. 지금 전담하는 장애인도 손가락만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중증장애를 가지고 있어요. 식사, 용변, 샤워, 병원 치료 등 모든 것을 활동지원사가 도와야 해요. 퇴근할 땐 온몸에 힘이 다 빠질 정도로 지치죠. 그런데 보람이 있어요. 예전에는 무슨 일을 해도 늘 딴생각이 났거든요. 그런데 이 일을 하면서 딴 걸 하고 싶다는 생각이 사라졌어요.”
―6년 차 장애인활동지원사로서 ‘철학’이 있다면요.
“어렵네요. 음…. 이번에 격리시설에서 함께 지냈던 친구(장애인)를 처음 만난 날, 앰뷸런스를 타고 집 앞에 데리러 갔었어요. 확진자인 어머니가 그때까지 집 안에 계셨어요. 아이만 혼자 두고 치료를 받으러 갈 수 없으니까요. 문만 살짝 열어 아들을 밖으로 쏙 밀어 내보냈는데, 아이가 겁에 질려서 울 것 같은 표정인 거예요. 그래서 제가 꽉 안아줬어요.”
―어려운 이야기네요. 어떤 의미인가요.
“마음요. 마음을 들여다보기 위해 노력하는 것. 우리가 꼭 말로만 상대의 생각을 알아내는 게 아니잖아요. 미묘한 표정, 습관, 분위기를 통해 더 많은 걸 알아차리죠. 장애인이 진짜 원하고 필요로 하는 걸 채워주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아쉬운 점은 없나요.
“장애인활동지원사라는 직업을 사람들이 잘 모른다는 게 가장 아쉽죠. 자원봉사하는 사람, 좋은 일 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어요. 그래도 괜찮아요. 점점 좋아질 거라고 믿어요. 코로나19 라는 재난을 겪으며 장애인 등 취약 계층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왔고, 활동지원사라는 직업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느낀 사람도 예전보다는 많아졌을 거예요.”
최근에 ‘춘천 여행’을 다녀왔다고 했다. 미아동 중증장애인 부부와 함께 차를 빌려 나들이를 했다. 효자동 골목길을 휠체어 타고 구경하고 닭갈비도 먹었다. 소양강댐 주변을 훌훌 드라이브하고 카페에 가서 커피도 마셨다.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비장애인이 느끼는 걸 장애인들도 똑같이 느낄 수 있는 날이 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지역사회에서 다 같이 친구처럼 어울려 살아갈 수 있게 그들 앞에 놓인 장애를 치워주고 싶어요.”
―마지막 질문. 만약 자가격리 장애인이 또 발생한다면 어떻게 할 건가요?
“또 갈 거냐고요(웃음)? 저는 1번으로 지원할 건데요. 이번에 한번 해봤으니까 다음엔 더 잘하지 않을까요?”
[김시원 더나은미래 기자 blindletter@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