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 10여 명이 한데 모인다. 이들은 2시간짜리 영화를 3개월에 걸쳐 만든다. 제작팀 구성은 여느 영화와 조금 다르다. 연출감독 자리에는 제작PD가 앉았고, 대본 작업은 화면해설작가가 맡았다. 배우는 없고 대신 성우가 있다. 제작 막바지에 모니터요원이 따로 투입되는 점도 특이하다. 이 특별한 제작팀의 손을 거쳐 완성되는 영화를 ‘배리어프리(barrier free)영화’라고 부른다. 배리어프리영화는 시청각 장애인들이 영화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게 화면해설 음성이나 자막을 넣어 누구나 즐길 수 있게 한 작품을 말한다. 이들 덕에 시각장애인은 영화를 듣고, 청각장애인은 영화를 읽는다.
영화에 장벽 없애는 데 걸리는 시간 ‘3개월’
배리어프리영화위원회에 따르면, 시청각 장애인을 위한 영화 제작 과정은 크게 ▲작품선정 ▲화면해설 ▲녹음·믹싱 ▲자막작업 ▲최종검수 등 다섯 단계를 거친다. 제작 기간 평균 3개월. 비용은 1000만~2000만 원 이상이 투입된다. 배리어프리영화 제작PD는 전 과정을 조율하고 이끄는 역할을 한다.
첫 단계는 작품선정이다. 배리어프리영화는 다양한 연령층이 모두 볼 수 있는 12세 관람가를 위주로 고른다. 더 많은 시청각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영화를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위원회에서는 완성된 배리어프리영화를 원하는 장소에서 틀어주는 ‘공동체 상영’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제작한 55편 가운데 42편을 공동체 상영으로 볼 수 있다.
작품이 선정되고 나면, 화면해설 대본 작업에 들어간다. 이 단계에서는 원작 영화감독이 투입되는 경우가 많다. 제작PD는 감독의 의도가 훼손되지 않도록 중간에서 조율하는 역할을 한다. 화면해설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부분은 ‘선해설’이다. 이세종(40) 제작PD는 “선해설이란 영화의 특정 장면이 화면으로 나오기 전에 이뤄지는 해설을 말하는데, 다음 내용을 짐작게 하거나 몰입을 방해할 수 있어서 최대한 들어가지 않게 작업한다”고 말했다.
대본 집필에는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영화 본영상의 3분당 평균 1시간 정도 걸린다. 강내영 작가는 “소리만으로 추측 안 되는 부분을 설명해내는 작업이라 비장애인들이 잘 느끼지 못하는 부분까지 담아내야 한다”며 “예를 들어 ‘문이 닫혔다’고 설명하는 게 아니라 ‘문을 누가 닫았는지’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본에 찍힌 ‘타임코드’, 녹음 위한 가이드라인
녹음·믹싱은 완성된 화면해설 대본을 토대로 이뤄진다. 화면해설 대본에는 일반적인 대본과 달리 ‘타임코드(time code)’와 ‘녹음점’이 표기된다. 음향 작업을 위한 조치다. 숫자로 표현된 타임코드는 편집 엔지니어를 위한 편집점이다. 반면 녹음점은 텍스트로 쓰여있는데 이는 성우에게 보내는 일종의 안내 표시다. 업계에서 합의된 의사소통 기호인 셈이다. 강내영 작가는 “타임코드와 녹음점이 꼼꼼하게 표기된다면 편집자도 작업하기 수월해지고, 성우들도 녹음점에 맞춰서 읽으면 되기 때문에 작업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본격적인 녹음은 전문 성우가 한다. 때론 배우들이 재능 기부로 참여하기도 한다. 영화의 장르에 따라 성우 섭외 기준이 달라지는 점도 눈에 띈다. 이를테면 애니메이션은 대부분 여성 목소리로 구성돼 있기 화면해설 내레이션은 남자 성우에게 맡기는 식이다. 녹음 이후엔 믹싱 엔지니어의 손을 거쳐 화면에 목소리를 입힌다. 믹싱 엔지니어는 대사와 대사 사이의 빈 공간에 화면해설을 채우는 작업을 한다. 화면해설이 대사의 소리를 덮지 않도록 사운드 트랙별로 균형 있는 음량조절이 필수다. 믹싱 단계에서는 감독, 제작PD, 화면해설작가 등 제작진을 총동원해 꼼꼼하게 검수한다.
소수자 위한 영화 아냐⋯남녀노소 함께할 ‘모두의 영화’
자막작업은 청각장애인을 위한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화면해설 대본이 시각적인 부분을 텍스트로 전환하는 작업이라면, 자막 작업은 소리를 문자로 바꾸는 단계다. 배우들의 ‘얕은 한숨소리’를 자막으로 그대로 써주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장면에서는 ‘빗소리가 세차게 들린다’라고 표현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자막 작업을 전문으로 하는 인력은 없는 상태다. 이 때문에 자막대본 집필자와 엔지니어가 동시에 협업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위원회에서는 화면해설 대본을 바탕으로 자막작업을 하는데, 작업 전후로 청각장애인 모니터 요원이 반드시 투입된다.
작업을 총괄하는 이세종 제작PD는 “모든 제작이 완료되고 나면 사후 검수를 거쳐 내놓는다”며 “이후 각종 상영회를 통해 시청각장애인과 비장애인의 피드백을 받아 다음 작품에 반영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배리어프리영화 시장은 느리지만 조금씩 확대되고 있다. 이세종 제작PD는 “배리어프리영화는 시청각장애인들을 위한 ‘소수의 영화’가 아니라 남녀노소 모두가 편하게 관람할 수 있는 ‘모두의 영화’”라고 말했다.
[미니인터뷰] “모두를 위한 자막, 누구나 참여할 수 있어요!”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를 위한 자막 제작을 통해 비장애인도 배리어프리영화에 동참시킬 수 있습니다.” 최인혜(22) 오롯 대표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가 즐길 수 있는 폐쇄자막 확대를 위한 대학생 그룹 ‘오롯’을 이끌고 있다. 오롯은 온라인 플랫폼을 통한 배리어프리 자막 제작과 유통 서비스의 상용화를 꿈꾼다. 비장애인들에게도 폐쇄자막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는 믿음 아래 간결·통일·객관성을 갖춘 모두의 제막을 제작한다. 오롯은 자체 제작한 ‘오롯 자막제작지침서’를 통해 누구나 배리어프리 자막을 제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가고 있다. 최 대표는 “자막제작지침서에는 문장부호 사용, 인물의 감정 묘사, 효과음 묘사 등이 상세히 설명돼 있다”며 “자막 제작의 진입장벽을 낮춘 덕에 지난해 12월부터는 부천시 자원봉사자 센터와 연계해 봉사자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오롯을 통해 자막제작에 참여한 이들에게는 영화 러닝타임 5분당 1시간의 봉사시간이 제공된다. 최인혜 대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자막 제작에 참여하면 전날 올라온 드라마도 자막을 통해 바로 즐길 수 있다”며 “온라인 플랫폼을 통한 자막 유통의 활성화가 이뤄지면 청각장애인이 일할 수 있는 ‘자막제작검수자’라는 새로운 직업군도 발굴될 것”이라고 말했다. |
[김지인 청년기자(청세담 10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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