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2일(금)

보지도 듣지도 말할 수도 없지만 손끝 하나 의지해 세상 나섭니다

[동행 취재] 시청각 장애인의 하루

수화하는 김 통역사의 손(오른쪽)을 만지며 대화를 하는 태경씨. ⓒ김종연 C영상미디어 기자

부산 수영구에 사는 이태경(38)씨는 상대방의 손을 잡아야만 소통할 수 있다. 앞을 볼 수도, 들을 수도, 말을 할 수도 없는 태경씨는 시청각 장애인이다. 시청각 장애인들은 상대의 수화(手話) 동작을 손으로 만져가며 대화한다. 이를 ‘촉수화’라고 한다.

이태경씨의 하루를 동행 취재했던 지난 18일 태경씨가 김윤선(64) 촉수화 통역사의 손을 잡으면서 대화를 시작했다.

“오늘 태경씨와 하루 동안 같이 다닐 기자가 왔어.”(김윤선)

태경씨는 통역사의 손가락 하나하나를 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입 모양과 수화로 “부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다”면서 “만나서 반갑다”고 했다.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시청각 장애인 태경씨의 외출

지난 18일 김윤선 통역사(왼쪽)와 이태경씨가 국제수화를 배우러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김종연 C영상미디어 기자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태경씨는 세 살 때 열병으로 청력을 잃었다. 설상가상으로 초등학교 입학 이후 점점 시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중학생 때부터는 혼자 외출할 수 없을 정도로 시력이 나빠졌다. 망막색소변성증이었다. 지금은 어둠과 빛 정도만 구분할 수 있다.

태경씨의 어머니는 “안 가 본 병원, 안 해 본 치료가 없다”고 말했다. “현재로선 치료 방법이 없대요. 다행히 어릴 때부터 서서히 시력이 안 좋아진 거라 농아인학교와 맹아인학교 두 곳에서 점자와 수화를 배웠죠. 만약 점자를 배우지 않은 상태에서 시청각 장애가 왔다면 세상과 완전히 단절됐을 거예요. 지금은 김윤선 선생님이 도와주고 있어서 태경이가 사람들과 얘기할 수 있게 됐고요.”

김윤선 통역사는 지난 2016년 제주도에서 열린 시청각 장애인 세미나에서 태경씨와 처음 만났다. 17년간 수화 통역 봉사를 해온 김씨도 마침 부산에 살았다. 그는 첫 만남 이후 지금까지 태경씨를 돕고 있다.

김 통역사가 태경씨에게 촉수화로 “나가자”고 하자 태경씨는 가방을 챙겼다. 이날은 국제 수화를 배우는 날이다. 집에서 약 5㎞ 거리에 있는 교회에서 국제 수화 교실이 열린다. 태경씨는 집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는 망미역에서 지하철을 타기로 했다. 교회와 가까운 벡스코역으로 가려면 수영역에서 갈아타야 한다. 이날 태경씨는 “목적지까지 활동 보조인 도움 없이 갈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두 달 전부터 동네 교회, 헬스클럽 등 즐겨 찾는 장소를 갈 땐 혼자 다니는 연습을 하고 있다. 태경씨는 자신 있다고 했지만 기자의 눈에는 불안하기만 했다.

집 밖 나선 지 1분도 안 돼 장애물… 지하철 문에 손대고 목적지 찾아

태경씨는 집 앞을 나선지 1분도 안 돼 장애물에 부딪혔다. ⓒ김종연 C영상미디어 기자

태경씨는 지팡이를 움직이면서 전방에 장애물이 있는지 확인했다. 걷기 시작한 지 1분도 안 돼 난관에 부딪혔다. 도로에 불법 주차된 차량에 자꾸 몸이 부딪혔다. 태경씨는 “늘 있는 일”이라며 “인도와 차도 구분이 없는 길에는 점자 보도블록이 없고, 자동차도 지나다녀서 특히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망미역에 도착한 태경씨는 점자 보도블록을 따라 역 안으로 들어갔다. 지하철이 오고 가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지하철 방송도, 안내판도 그에게는 무용지물이다. 오로지 촉감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태경씨는 스크린 도어에 손을 댔다. 그는 지하철을 탄 뒤에도 출입문에 손을 대고 있었다. 문이 몇 번 열리는지 알아야 목적지에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2호선과 3호선이 교차하는 수영역에는 사람이 붐볐다. 그때 태경씨의 지팡이가 사람들의 다리를 치며 약간의 소동이 벌어졌다. 태경씨는 사람들이 이미 떠나버린 자리에 혼자 서서 손을 모으며 미안하다는 입 모양을 그렸다. 김 통역사는 “시각 장애인이라면 말로, 청각 장애인은 눈으로 보며 설명할 수 있지만 시청각 장애인인 태경씨는 어느 방법으로도 표현할 수 없어서 쉽게 사람들의 오해를 산다”고 말했다.

이태경씨가 부산 망미역 지하철 스크린 도어에 손을 대고 있다. 시청각 장애인인 이씨는 촉감을 통해서만 지하철이 오고 가는지, 문이 열리고 닫히는지 알 수 있다. ⓒ김종연 C영상미디어 기자

우여곡절 끝에 벡스코역에 도착했다. 이제 4번 출구에서 도보로 5분 거리의 교회로 가면 됐다. 마침 점심때라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고 가기로 했다. 그런데 태경씨가 당황하기 시작했다. 개찰구 위로 올라가자 점자 보도블록이 끊기고 시각 장애인용 출구 안내판도 없었던 것. 잠시 고민하던 태경씨는 통역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식당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12시 30분. 비장애인이라면 20분 안에 도착할 거리를 1시간이나 걸려 왔다.

◇“시청각 장애인이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헬렌켈러법’ 통과돼야”

오후 2시. 식사를 마친 뒤 국제 수화 수업이 있는 교회에 도착했다. 교회 안 교실에 들어서자 한 남자가 일행을 반겼다. 이충우(52) 해운대온누리교회 목사다. 청각 장애인인 그는 4년 전 농아인협회 부산 수영지부에서 태경씨를 알게 됐다. 태경씨가 국제 수화를 배우고 싶어해 1년 전부터 매주 월요일마다 1시간씩 국제 수화를 가르치고 있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영어 알파벳부터 숫자, 사계절, 요일, 시간 등을 연습했다. 이 목사가 태경씨의 손을 잡고 자신의 얼굴로 가져가 땀을 훔치는 동작을 했다. 국제 수화로 ‘여름’이라는 뜻이다. 태경씨가 고개를 끄떡이며 가을은 무엇이냐고 묻자 이 목사는 손가락을 잎사귀처럼 둥글게 모아 나뭇잎이 떨어지듯 S자를 그렸다. 태경씨는 이 목사의 손을 잡으며 따라 했다.

태경씨는 “촉수화를 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했다. 자신은 맹농학교에서 점자와 촉수어를 배워 어느 정도 소통할 수 있지만 대다수 시청각 장애인은 ‘세상에 없는 사람’처럼 살아간다고 했다. 장애를 갖고 태어나거나 아주 어릴 때 시청각 장애를 얻게 되면 글자, 점자, 수화 등의 의사소통 수단을 가르치기 매우 어렵다. 이 때문에 가족과도 ‘밥’ ‘화장실’ ‘아프다’처럼 기본적인 소통만 하는 경우가 많다.

현재 국내의 시청각 장애인 수는 약 1만명으로 추산된다. 시청각 장애인들은 소통에 어려움이 커서 평생 집 밖을 나서지 못하고 숨죽여 지내는 경우가 많다. 정확한 집계가 쉽지 않은 이유다. 제도나 법의 보호를 받기도 어렵다.

부산 벡스코 역 인근에 있는 교회 안 교실에서 청각 장애인인 이충우 목사에서 국제수화를 배우는 이태경씨. 태경씨는 외국인 시청각 장애인들과의 교류를 위해 1년 전부터 국제수화를 배우고 있다. ⓒ김종연 C영상미디어 기자

시청각 장애 전문가인 김종인 나사렛대 인간재활학과 교수는 지난 11일 이명수 자유한국당 의원과 함께 ‘시청각 장애인 지원에 관한 법률안’인 일명 ‘헬렌켈러법’을 발의했다. 헬렌켈러법은 시청각 장애인의 특성 및 복지 요구에 적합한 지원이 체계적이고 효과적으로 제공될 수 있도록 필요한 사항을 규정하고 있다. 법안에는 3년마다 시청각 장애인과 그 가족에 대한 실태 조사를 하는 내용도 담겼다. 또 통합적 지원 체계를 마련하기 위해 시청각장애인지원센터를 설치·운영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김 교수는 밀알복지재단과 함께 시청각 장애인 지원 기관인 헬렌켈러센터를 설립하고 촉수화 전문 통역사와 전문 활동 보조인도 양성할 예정이다.

현재 정부는 장애인을 위해 활동 보조인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대다수 활동 보조인이 수화를 모르기 때문에 식사 준비, 청소 등 단순 생활 보조만 하는 상황이다. 시청각 장애인을 위한 통합 교육 시설도 없다. 시청각 장애인들은 맹학교 또는 농아인학교를 선택해 다녀야 한다. 그러나 특수학교에도 시청각 장애인 전문 특수교사는 거의 없기 때문에 태경씨처럼 학교를 두 번 다니거나 촉수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을 수소문해 따로 교육받는 수밖에 없다.

수업을 마치고 태경씨는 통역사의 손을 잡고 무엇인가를 표현했다. 일행들과 헤어지기 전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시청각 장애인이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헬렌켈러법이 통과되고 통역사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태경씨의 따뜻했던 손이 떠오르며 시청각 장애인 남편과 척추 장애인 아내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달팽이의 별’의 대사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우리는 가장 값진 것을 보기 위해 잠시 눈을 감고 있다. 가장 참된 것을 듣기 위해 잠시 귀를 닫고 있다. 가장 진실한 말을 하기 위해 잠시 침묵 속에서 기다리고 있다.’

[박민영 더나은미래 기자 bada@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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