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말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고액 기부자 모임인 ‘아너소사이어티’가 11년 만에 2000번째 회원을 맞았다(2019년 1월 기준 2025명). 누적 가입자 수가 1000명을 넘겼던 2015년 이후 불과 3년 만에 두 배로 규모가 커졌다. 10억원 이상 기부하면 별도의 기금을 만들어 운용하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초고액 기부 모델 ‘한국형 기부자 조언 기금’도 지난해 2명이나 배출됐다.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 국민의 기부 참여율은 2011년 36%를 기록한 이후 매년 하락세를 거듭해 2017년 26.8%로 내려앉았다. 이처럼 사회 전반에 기부 참여가 줄어들고 있지만, 개인 고액 기부는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고액 기부는 통상 개인이 내는 연간 기부금의 10~25배 되는 규모 또는 전체 모금 규모 상위에 있는 기부를 말한다. 국내 1인당 기부 금액이 120만원임을 감안할 때, 1000만원대부터는 고액 기부로 볼 수 있다. 더나은미래가 주요 비영리단체 10곳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진행한 결과, 고액 기부자 모임을 운영 중인 8곳의 누적 가입자 수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비영리단체 고액 기부자 모임, 최근 5년 사이에 늘어
국내에서 고액 기부자 모임을 가장 먼저 도입한 곳은 사회복지공동모금회로, 2007년 12월 시작됐다. 홀트아동복지회가 2010년 1월 ‘탑리더스’를 선보이며 두 번째로 테이프를 끊었다. 이후 최근 5년간 비영리단체들이 앞다퉈 개인 고액 기부자 모임을 만들기 시작했다. 정기 후원 1세대인 베이비붐 세대가 은퇴 시기를 앞두게 되면서, 단체들이 한발 앞서 이들의 사회 환원에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분석이다.
2014년 기아대책과 푸르메재단이 각각 필란트로피클럽과 더미라클스를 론칭했고, 유니세프(아너스클럽), 굿네이버스(더네이버스클럽) 등이 뒤를 이었다. 2017년에는 밀알복지재단(굿서번트클럽)과 초록우산어린이재단(그린노블클럽)도 가세했다. 월드비전은 1000만원 이상 기부자 모임(비전소사이어티)과 누적 1억원 이상 기부자 모임(비전아너스 클럽)을 각각 2015년과 2017년 설립했다. 세이브더칠드런과 한국컴패션의 경우 고액 기부자 모임을 별도로 운영하지 않았다.
단체들의 고액 기부 기준은 크게 ▲1억원 이상(다년간 약정 기부 포함)과 ▲연간 1000만원 이상으로 나뉘었다. 기아대책, 사랑의열매, 어린이재단, 유니세프, 푸르메재단 등 5곳은 1억원 이상을 기부했거나 약정한 후원자를 대상으로 모임을 구성했다. 굿네이버스, 밀알복지재단, 월드비전, 홀트 등 4곳은 연간 1000만원 이상이 기준이었다. 컴패션은 고액 기부자의 기준을 두지 않으나, 20명 이상의 아동과 결연을 한 기부자를 지원하는 특별후원팀을 최근 신설했다. 10개 단체 중 6곳이 별도의 고액 기부자 전담팀을 두고 있었다. 밀알복지재단과 세이브더칠드런, 푸르메재단, 홀트만 기존의 모금 부서가 업무를 맡는다.
고액 기부자들은 ▲후원자 간 네트워크 구축 ▲맞춤형 보고 및 컨설팅 ▲단독 사업 연계 등의 지원을 받았다. 사랑의열매는 지역별 회원 모임을 지원하고, 최근에는 여성 회원들로 구성된 ‘W아너’ 모임 등 특성화 모임을 구성했다. 사랑의열매 담당자는 “젊은 연령의 참여가 확대되면서 다양한 모임을 꾸리고 있다”고 말했다.
기아대책과 푸르메재단은 연중 후원자 모임과 해외 봉사 활동 등을 지원한다. 굿네이버스와 세이브더칠드런, 월드비전 등은 고액 기부자에게 단독 사업을 제안해 함께 실행한다. 우물이나 화장실 건축 등 긴급한 사업이 생기면 관심이 있을 만한 고액 기부자와 매칭해 기부를 요청하고 현지 모니터링 등으로 진행 과정을 상세히 알리는 방식이다.
◇고액 기부 한 번으로 못다 한 숙원 사업도 이뤄
설문 결과, 해당 단체에서 정기 후원을 하다가 고액 기부로 넘어간 경우가 대다수였다. 어린이재단의 그린노블클럽은 설립 1년여 만에 무려 142명의 고액 기부자를 모았다. 재단에 장기간 후원해 온 고액 기부자가 대거 유입된 것이 발판이 됐다. 진성주 그린노블팀 과장은 “장기 고액 기부자들이 지인들에게 후원을 권유하며 가입자가 늘고 있다”며 “지난해 모금액은 첫해보다 2배 이상 증가한 것으로 추산된다”고 말했다. 기아대책의 필란트로피클럽도 지난해 42명이 고액 기부자 모임에 가입해 회원 수 120명을 넘겼다. 월드비전의 단독 사업 기부에도 매년 90여 명의 기부자가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 이 외에 굿네이버스, 푸르메재단 등도 개인 고액 기부자 수가 두 자리대로 올라섰다.
고액 기부 덕에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단체의 숙원 사업이 단번에 해결되기도 했다. 푸르메재단은 지난해 11월 넥슨어린이재활병원에 ‘수(水)치료실’을 열었다. 물 안에서 자유롭게 근육을 쓰면서 치료를 받을 수 있어 부모들의 요구가 많았지만, 비용 문제로 엄두를 못 냈던 시설이었다. 2016년 한 고액 기부자와 그의 자녀가 각각 1억원씩을 병원에 기부하면서 병원 건립 2년 만에 길이 열렸다. 백해림 푸르메재단 모금팀장은 “어린이 재활 병원이나 돌봄농장(케어팜)처럼 꼭 필요하지만, 기존에 없던 것은 대중에게 사업의 필요성을 설명하거나 관심을 얻기가 쉽지 않다”며 “단체를 꼼꼼하게 평가해 관계를 맺어 온 고액 기부자의 결정이 큰 힘이 된다”고 말했다.
몽골, 필리핀 등 아시아 11개국 아동의 교육을 지원하는 유니세프의 ‘스쿨 포 아시아’는 한 고액 기부자가 100억원을 쾌척하면서 시작됐다. 여기에 다른 고액 기부자들과 기업 등이 동참하면서 해당 사업에만 150억원이 넘는 후원금이 쓰였다. 유니세프 담당자는 “누군가 큰 금액을 기부하고 그 성과가 알려지고 나면 기부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 확산하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요새는 익명 기부자가 줄었다는 증언도 나온다. 사랑의열매 담당자는 “초기에는 고액 기부에 대한 편견으로 다들 익명 기부를 선호했으나, 긍정적 인식이 확산하면서 점차 그 수가 감소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액 기부는 단체가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다. 월드비전 담당자는 “연간 17억원 규모의 사업이 고액 기부로 진행되고 매년 사업 규모가 커지고 있다”며 “단기간에 많은 에너지를 투입하니 의미 있는 변화들이 나타나 재후원을 결정하는 기부자들이 계속 늘고 있다”고 말했다. 기아대책 담당자는 “대중 모금에만 집중하면 개별 후원자의 욕구와 생각을 파악하기 어렵다”며 “고액 기부자 모임을 통해 기부 환경의 변화와 다양한 후원자의 욕구에 대응할 가능성이 생겼다”고 말했다.
◇고액 기부 넘어 초고액 기부 이루려면… 기부자와 원활한 소통이 우선
강철희 연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이제 고액 기부의 싹이 텄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너소사이어티로 고액 기부의 가능성이 확인되면서 다른 단체들도 고액 기부 실험에 뛰어들었다”며 “고액 기부의 저변을 견고하게 다진 뒤, 다음 단계인 초고액 기부로 넘어가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고액 기부가 확산되기 위해서는 기부자와의 정확한 소통이 우선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비영리단체의 미션과 사업 내용 등을 제대로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너소사이어티의 초기 설계와 론칭을 담당했던 이민구 고려대 기금모금본부 수석컨설턴트는 “단체들이 미션과 프로그램, 목표 등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자 많은 기부자가 원하는 것”이라며 “여전히 기부할 역량은 되지만 기부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잠재 기부자들이 있기에 성장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기부자와의 신뢰 관계 형성도 핵심적 요소다. 특히 기부로 현장에서 무엇이 바뀌었는지 ‘임팩트’ 위주의 소통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기부자 3000명을 분석한 영국 뉴 필란트로피 캐피털의 관련 연구(‘Money for Good UK’)는 “기부자는 단체가 제대로 역할을 수행했는지를 가장 신경 쓴다”며 “성과를 증거로 보여줘야 한다”고 소개한다. 김효진 사랑의열매 아너소사이어티 본부장은 “과거에는 기부자들이 기부하는 그 자체로 만족감을 느꼈다면 이제는 기관이 어떤 일을 해줄 수 있고 기부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등 임팩트에 대한 관심이 많다”면서 “기부금 사용 내역에 대해 제대로 피드백하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유산 기부나 부동산·보험·주식 기부 등 고액 기부자가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기부 방식에 대응해야 한다는 과제도 있다. 강철희 교수는 “고액 기부 문의가 오면 세금, 법 등 전문성을 갖춘 컨설턴트가 서비스를 제공하는 시스템이 구축돼야 하는데 국내 비영리단체들은 아직 미흡한 수준”이라며 “기부 금액이 커지는 만큼 조직 내 전문가를 유치하거나 외부의 전문 어드바이스 그룹과 연계해 상당한 서비스를 제공할 준비를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혜연 더나은미래 기자 honey@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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