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술은 편리함과 효율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 혜택이 특정 계층에 집중되면, 불평등은 심화되고 사회적 갈등은 더 깊어진다. 이런 구조 속에서 기술 발전이 오히려 대중의 지지를 잃는 일도 발생한다. 기술은 산업과 시장을 위한 도구를 넘어, 더 나은 정부와 사회를 만드는 수단이어야 한다.
필자는 미국의 대표적 시빅 테크 단체인 ‘코드 포 아메리카(Code for America)’에서 데이터 과학자로 일했다. 지금은 다시 대학으로 돌아와, 기술이 어떻게 더 신뢰할 수 있는 공공 서비스를 만들 수 있는가를 연구하고 있다.
‘시빅 테크(civic tech)’는 공익을 위한 기술(public interest tech)의 한 분야로, 시민이 경험하는 정부 서비스를 기술로 개선하는 일을 말한다. 복지 신청에 걸리던 한 시간을 10분으로 줄이는 것, 시민이 법안에 직접 의견을 낼 수 있도록 플랫폼을 설계하는 일, 지역 문제 해결에 시민이 참여할 수 있게 하는 도구 설계 등이 대표적이다.
2006년 MIT 오픈코스웨어를 국내 대학에 도입하며 시작한 내 시빅 테크 활동은 올해로 19년째다. 2014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에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현 C.O.D.E.)’에서 활동하며 오픈데이터와 디지털 전환, 사회혁신을 주제로 다양한 프로젝트를 해왔다.
이후 지난 10년 가까이 미국의 학계와 공익 기술 현장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민간 재단들이 기술 생태계 설계자 역할을 자처했다는 점이다. 단순한 후원자가 아니라, ‘공공을 위한 기술’이라는 실험의 출발점이자 성장 플랫폼 역할을 해낸 것이다.
◇ 코드 포 아메리카와 미국 기업 재단의 실험
전자상거래 기업 이베이 창업자가 만든 ‘오미디야 네트워크’는 2000년대 중반부터 시빅 테크 분야에 꾸준히 투자해 왔다. 2010년 설립된 ‘코드 포 아메리카’가 초기 단계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도 이 재단의 결정적인 지원 덕분이다. 코드 포 아메리카는 현재 200명에 가까운 직원이 연방·주·지방 정부와 협력해 공공 서비스를 개선하고 있다.
하지만 출발은 소박했다. 설립 초기에는 실리콘밸리의 기술자, 디자이너, 기획자 등 10여 명이 1년간 각지 지방정부에 파견돼 지역 문제를 해결하는 펠로우십 프로그램이 활동의 전부였다. 이 프로그램은 2010년부터 2020년까지 운영되며 100명이 넘는 펠로우를 배출했다. 이들은 물, 주거, 교통, 복지 등 지역 사회 현안을 새로운 디지털 도구와 플랫폼을 통해 풀어냈다.
이후 코드 포 아메리카는 복지 서비스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프로젝트를 정부기관과 함께 다수 추진해 왔다. 대표 사례는 미국 최대 빈곤층 지원 제도인 식품보조제(SNAP)의 온라인 신청 절차를 간소화한 ‘겟캘프레시(GetCalFresh)’다. 캘리포니아주에서 개발된 이 사이트는 평균 1시간 걸리던 신청 과정을 10분 이내로 줄였다. 필자 역시 코드 포 아메리카 재직 당시 이 플랫폼의 최적화를 위한 데이터 실험과 분석에 참여했다.
미국 민간 재단들은 지역 기반 투자도 활발하다. 맥아더 재단은 2014년부터 2018년까지 7개 도시에서 저소득층을 위한 지역 데이터 실험을 운영했다. 블룸버그 재단은 2017년부터 100개 도시와 함께 ‘성과 기반 행정’을 확산하는 프로젝트를 후원하고 있다. 포드·휴렛·뉴아메리카 재단은 2019년 ‘공익 기술 교육 네트워크(PIT-UN)’를 출범시켰다. 이를 통해 수십 개 대학에서 공익 기술 교육과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시빅 테크가 대학 교과과정에 도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 시빅 테크로 옮겨간 美 재단의 자본
미국 주요 대학들도 시빅 테크의 연구와 실험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는 조지타운대학교 멕코트 공공정책대학원과 미시간대학교 포드 공공정책대학원이 공동 운영하는 ‘더 나은 정부 연구소’, 그리고 조지타운대학교의 ‘비크센터’다. 두 기관은 디지털 행정, 복지 개선, 데이터 기반 정책 실험 등을 주도하며 시빅 테크의 허브 역할을 하고 있다.
비크센터는 발머 그룹으로부터 800만 달러(한화 약 113억 원)를 지원받아 디지털 정부 역량 강화를 위한 연구와 실무 프로젝트를 수행한다. 더 나은 정부 연구소는 게이츠 재단의 230만 달러(약 32억 원)를 기반으로, 복잡한 복지 행정 절차를 간소화하고 제도 접근성을 높이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필자 역시 현재 더 나은 정부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미국 민간 재단들의 시빅 테크 투자는 더욱 확대되는 추세다. 2022년에는 슈미트 퓨처스가 복지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디지털 서비스 개발 스튜디오에 1300만 달러(약 184억 원)를, 오더셔스 프로젝트와 블루 메리디언이 코드 포 아메리카의 복지 혁신 실험실에 1억 달러(약 1418억 원)를 공동 투자했다. 코드 포 아메리카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직원 수를 두 배 가까이 늘렸고, 필자도 이 시기에 입사할 수 있었다.
이 밖에도 시겔 패밀리 재단, 월마트 재단, 로버트 우드 존슨 재단, 발머 그룹 등 다양한 재단이 시빅 테크 분야에 수천만 달러 규모의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이들은 데이터 기반 행정, 공공보건, 디지털 복지 등의 분야에 자금을 집중하며, 기술이 공공서비스를 혁신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필자는 최근 코드 포 아메리카와 더 나은 정부 연구소 연구자들과 함께 미국의 식품보조제도(SNAP) 복지 서비스 개선에 관한 공동 연구를 진행했고, 그 결과는 정책학계 최상위 저널(JPAM)에 게재됐다. 해당 연구는 월마트 재단과 게이츠 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됐다. 초기 입사 당시 맡았던 미국 전역의 디지털 복지 신청 서비스 분석 프로젝트 역시 게이츠 재단의 지원을 받았다.
◇ 산업만 보는 기술에서, 공공을 향한 투자로
한국에도 다양한 기업재단이 있다. 삼성미래기술육성재단, SK행복나눔재단, LG복지재단, 현대차 정몽구 재단, 포스코1%나눔재단, 네이버 커넥트재단, 카카오임팩트 등은 교육, 복지, 예술, 스포츠 등 여러 분야에서 의미 있는 사회공헌을 해왔다. 필자 역시 미국 박사 유학 시절, SK고등교육재단의 장학 지원을 받아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처럼 인재 양성과 공익 활동에 앞장서 온 한국 재단들이 정작 ‘공익을 위한 기술’, ‘시빅 테크’ 분야에 충분한 관심과 투자를 기울이지 못하고 있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IT 강국, 인공지능 선도국을 자처하는 한국에서 기술은 여전히 산업의 도구다. 기술이 공공의 문제를 해결하고, 시민의 삶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활용되는 사례는 아직 드물다.
이제는 변화가 필요하다. 한국의 기업재단들이 나서서 공익 기술 생태계를 여는 마중물 역할을 해야 할 때다.
김재연 미국의 공공 영역 데이터 과학자
필자 소개 학계와 실무를 모두 경험한 미국의 공공 영역 데이터 과학자입니다. 존스홉킨스 SNF 아고라 연구소의 연구교수이며 하버드 케네디 스쿨 공공 리더십 센터의 연구위원입니다. 이전에는 미국의 대표적 시빅 테크 단체인 코드 포 아메리카(Code for America)의 데이터 과학자로 미국 정부와 협력하여 가난한 사람들이 더 쉽고, 빠르고, 편하게 복지 혜택을 누리도록 돕는 일을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KDI 정책대학원에서 데이터 과학 담당 교수로 일했고, 공익 목적의 데이터 과학을 소개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다른 데이터가 필요하다(세종서적 2023)’란 책을 썼습니다. UC 버클리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수여했고, 미국 정치학회(APSA)로부터 도시, 지역 정치 부문 최우수 박사학위상(2022), 시민참여 부문 신진학자상(2024)을 받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