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 11일(화)

뮤지컬 ‘스윙 데이즈’로 본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 박사

일제강점기 첩보작전 ‘냅코 프로젝트’에 투입된 요원
‘스윙 데이즈_암호명 A’ 초연 폐막, 2026년 본 공연 예정

“나 같은 사람 하나 뛰어들어서 하루씩, 또 누군가 뛰어들어서 하루씩, 그렇게 하루씩 앞당길 수 있을 것 같아서.”

제국주의 시대인 20세기 초, ‘유일형’(유준상·신성록·민우혁)은 소꿉친구이자 사업 파트너인 ‘황만용’(정상훈·하도권·김승용)에게 독립운동을 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 이같이 말한다.

뮤지컬 ‘스윙 데이즈_암호명 A’의 주연 배우 유준상. /올댓컴퍼니·컴퍼니연작

지난 9일 초연을 마친 뮤지컬 ‘스윙 데이즈_암호명 A’의 주인공 ‘유일형’은 유한양행(대표 조욱제) 창업자인 고(故) 유일한(1895~1971) 박사를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유일한 박사는 일제치하였던 1944년, 미국 OSS(전략첩보국·CIA의 전신)가 주도한 첩보 작전 ‘냅코 프로젝트(NAPKO Project)’의 요원으로 활동했다. 이 프로젝트는 한국인 요원들을 훈련시켜 일본 내 정보 수집과 지하 조직 구축을 목표로 진행된 작전이었다.

당시 19명의 한국인 요원 중 유일한 박사는 ‘A’라는 암호명을 사용하며, 사격·공중 폭파 등의 훈련을 받았다. 미국에서 성공한 사업가였던 그는 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을까.

“사람이 죽으면서 남기는 것 중 가장 값진 것은 사회를 위한 무언가다.”

유일한 박사가 생전에 남긴 발언에서 그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다. 1971년 타계한 유일한 박사는 자신의 주식을 전부 공익법인에 기증하며 기업의 사회적 역할을 끝까지 실천했다.

그의 뜻을 이어온 유한양행은 대한민국 ESG 경영의 효시로 평가받으며, ‘사회를 위한 기업 경영’의 대표적인 모범 사례를 만들어왔다. 그중 하나가 2023년 진행된 국산 폐암 신약 ‘렉라자(성분명 레이저티닙)’ 무상 제공이다. 조욱제 사장은 약 900명의 폐암 환자에게 6개월간 신약을 무료로 공급하며, 총 311억 원 이상의 경제적 지원 효과를 냈다.

유한양행은 창립 100주년(2026년)을 맞아 유일한 박사의 정신과 역사적 이야기를 대중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이번 뮤지컬 제작에 일부 투자했다고 밝혔다. 제약업계에 따르면, 이번 뮤지컬은 현재 이사회 의장인 이정희 전 대표이사 시절부터 기획되어 현 조욱제 사장이 ‘암호명케이문화산업전문 유한회사’를 설립해 제작됐다.

이번 작품에는 영화 실미도 각본으로 대중에 깊은 인상을 남긴 김희재 작가와 제이슨 하울랜드 작곡가, 김태형 연출, 김문정 음악감독 등이 참여했으며, 출연진으로는 유준상, 신성록, 민우혁, 고훈정, 이창용, 김건우, 정상훈, 하도권, 김승용, 김려원, 전나영, 이아름솔, 장현성, 성기윤, 최현주, 이지숙 등의 배우가 총출동했다.

◇ 미국에서 ‘성공한 사업가’ 유일한, 조선에 제약회사를 세운 이유

뮤지컬 ‘스윙 데이즈_암호명 A’는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더해 완성됐다. 김희재 작가에 따르면, 극 중 내용은 실제 역사와 약 15~20% 일치한다. 프로젝트가 세상에 알려진 게 50년 후인 1993년인 만큼, 관련 정보가 많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유일한 박사가 미국에서 사업을 정리한 뒤 조선에 들어와 냅코 프로젝트에 합류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그대로 반영됐다.

극 중 유일형은 미국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후방에서 자금을 지원하며 독립운동을 돕는 인물로 처음 등장한다. 그러던 그가 독립운동 전선에 나서게 된 계기는 파티에서 숨겨주었던 독립운동가 베로니카의 죽음이다. “안전한 곳에 머문 채 독립운동에 돈만 몇 푼 쥐여주며 죄책감에서 벗어나려 한다”는 베로니카의 뼈아픈 지적을 되새기던 유일형은 ‘자금 제공자’에서 OSS의 스파이가 되기로 결심, 조선에 들어온다. 이때 시작한 사업이 제약회사다.

실제로 유일한 박사는 미국에서 동양 식료품을 중국 음식점에 유통하는 회사 ‘라 초이(La Choy)’를 운영한 사업가였다. 하지만 그는 재료 수급을 위해 방문한 조선에서 병든 민족의 현실을 마주하고, 직접적인 독립운동과 의약품 공급의 필요성을 깨달았다.

“미국의 값싸고 좋은 약을 우리나라로 가져오자.” 그렇게 1926년, 유일한 박사는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뮤지컬 ‘스윙 데이즈_암호명 A’의 유일형과 호미리 여사. /올댓컴퍼니·컴퍼니연작

유일한 박사의 아내 호미리 여사의 이야기는 비슷한 듯 다르다. 극 중에서 유일형과 그의 약혼녀인 소아과 전문의 호미리는 환자들의 건강에 진심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조선 땅에서 사랑에 빠진다. 호미리는 유일형의 고민상담소이자, 더불어 약의 효과를 널리 알린 바이럴 마케터, 신약에 들어가면 좋을 성분을 일러주는 조언자 역할까지 톡톡히 한다.

현실에서의 유일한 박사와 호미리 여사는 미국에서 만나 결혼한 뒤 함께 조선 땅으로 넘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3년 개발된 유한양행의 대표 의약품 ‘안티푸라민’은 호미리 여사의 도움으로 만들어졌다.

◇ “기업은 사회의 것” 제약업계 최초 주식회사 전환

유일한 박사가 평양 출신인 것을 반영하듯, 이북 사투리를 쓰며 톡톡히 감초 역할을 하는 고향 친구 캐릭터 황만용 역시 창작된 인물이다. 그는 유일형의 버팀목으로서 친구를 위해 자신의 삶을 내건다. 극 중 황만용은 유일형에게 “너처럼 주식회사를 세우고 회사를 맡아 이끌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이 대사는 유한양행이 국내 제약업계 최초로 개인기업에서 주식회사로 전환된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 것이다.

유한양행 창업자인 고(故) 유일한 박사. /유한양행

1936년, 유일한 박사는 “기업은 사회의 것”이라는 신념으로 유한양행을 주식회사로 바꾸고, 1962년엔 국내에서 두 번째로 기업공개(IPO)를 단행했다.

유일한 박사는 기업공개를 두고 많은 반대에 부딪혔다. 주식을 공개상장하면 민간에서 자금을 동원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당시 유한양행은 이미 충분히 성장해 외부 자본이 필요 없는 재정적으로 안정된 기업이었다. 실제로 공개된 주가보다 회사의 실제 자산이 최대 6배 많았다고 한다.

작품 속 유일형은 하루라도 독립을 앞당기기 위해 회사의 존망과 자신의 목숨까지 바칠 수 있다는 결심을 한다. 실제로 미국 OSS의 기록에는 “암호명 A는 회사의 존망을 무릅쓰고 사업 조직망을 작전에 이용하는 데 기꺼이 동의했다”고 적혀 있다.

지난해 11월 19일 개막한 뮤지컬 ‘스윙 데이즈_암호명 A’는 약 3개월간 101회 공연을 진행했다. 작품은 ‘나의 생을 걸고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메시지를 관객에게 던지며 역사적 서사를 재해석했다. 공연은 관객 평점 9.6점을 기록하며 호평을 받았고, 제9회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대상·작품상·주연상 등 10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다. 유한양행은 창립 100주년을 맞는 2026년, 본 공연을 다시 선보일 계획이다.

조유현·채예빈 더나은미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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