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나 지자체 공무원들과 일해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겪었을 일이다. 이제 말 좀 통하나 싶으면 담당 공무원이 바뀌어서 새로 호흡을 맞추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것. 말이 잘 통하면 다행인데 가끔 자신의 고집을 앞세우는 공무원을 만나면 정말 난감하다. 갑자기 사업의 방향이 바뀌고 그동안 쌓은 경험자산이 한순간에 쓸모 없어지기도 한다.
순환근무를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부정부패 방지다. 한 부서에서 오래 일하면 유착이 생기기도 하고 제도의 맹점을 이용하기도 쉬워진다. 반대로 통합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한 가지 업무만 하던 사람보다는 여러 업무를 해본 사람의 시야가 넓을 수 있다. 현대 사회의 문제는 복합적으로 얽혀있는 경우가 많아서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관점과 변수를 고려해야 한다. 행정은 더욱 그렇다. 이럴 때 여러 업무를 두루 거친 사람이 조금 더 나은 해법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지방 인구 감소는 출산, 육아, 교육, 일자리, 주거, 교통, 여가 등 모든 문제가 얽혀 있다. 모든 분야를 근무했던 사람이 이 업무를 맡는다고 해서 모범 답안이 나올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한 가지 업무만 했던 사람보다는 좀 더 넓은 시야로 정책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모든 부서를 두루 거친 사람도 없을뿐더러, 있다 해도 순환보직으로 몇 년 후면 떠나야 한다. 순환보직이 아니라도 문제다. 어떤 사람도 매번 성공할 수는 없다. 메이저리그의 3번 타자도 열 번 중에 여서 일곱 번은 출루하지 못한다.
근본적인 문제는 순환보직이 아니라 경험자산이 사람에게 축적되는 것이다. 1년이든 10년이든 정책을 실행하면 경험이 쌓인다. 어떤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하기 쉽다거나 핵심 이해관계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 어떤 사업이 효과적이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도 잘 알게 된다. 이런 경험을 가진 사람이 떠나면 그동안 쌓은 경험자산도 함께 떠난다. 후임자를 위해 그간의 문서를 잘 정리해서 전달하지만 그것은 기록일뿐 경험자산은 아니다.
◇ 맥킨지의 핵심 자산 ‘지식 DB’
세계적인 컨설팅회사 맥킨지 앤 컴퍼니도 유사한 문제를 갖고 있다. 컨설팅 회사의 핵심 자산은 사람이다. 그런데 맥킨지를 비롯한 컨설팅 회사들의 근속연수는 2년에서 4년으로 매우 짧다고 한다. 업무 강도가 상상을 초월하며 정기적으로 승진하지 못하면 회사를 나가야 하는 암묵적인 룰도 있다고 한다. 더군다나 맥킨지 출신이라면 더 좋은 조건으로 이직을 하기도 쉬우니, 어쩌면 오래 일하는 것이 더 손해일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맥킨지의 핵심 자산은 사람이 아니다. ‘지식 DB(database)’가 경쟁력의 원천이다. 공개된 자료가 거의 없어서 구체적인 사항은 알 수 없으나, 과거의 문헌과 맥킨지에서 근무했던 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신입 컨설턴트도 하루 만에 해당 분야의 전문가급으로 될 수 있는 지식 DB’가 있다고 한다.
어제 입사했는데 오늘 정유회사의 ESG 전략 컨설팅을 맡았다. 당황하지 않고 일단 Practice DB에 들어간다. 여기에는 매년 수천 건의 컨설팅 프로젝트에서 도출된 경험, 지식, 노하우 등이 집약되어 있다. 정유회사에 관한 프로젝트 사례와 ESG 전략 컨설팅에 관한 사례가 있고, 해당 프로젝트에서 제시된 해법과 도출 과정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어떤 분석도구가 사용되었고 산업의 특성이 무엇이며 전략을 수립하기 위해 무엇이 고려되었는지 등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 당시 업무를 맡았던 컨설턴트의 연락처도 있어서, 언제든 의견을 구할 수도 있다. 맥킨지에는 일종의 동문(alumni) 문화가 있어서 맥킨지를 떠났다 하더라도 ‘한 식구’처럼 도움을 준다고 한다.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긴다. 수십 년간 쌓은 지식자료가 엄청나게 많을 텐데 그중에서 유용한 자료를 어떻게 검색할 수 있을 것인가. 너무 많이 검색되면 다 읽기 전에 지칠 테고 너무 좁게 검색되면 학습이 제한될 수 있다. 맥킨지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해법은 태깅(tagging)이다. 프로젝트에 관한 기록을 남길 때, 이 자료를 어떻게 분류하는지가 중요하다는 의미다. 정유회사의 ESG 전략 컨설팅이라면 기본적으로 #정유산업 #ESG와 같은 태깅은 하겠지만 더 높은 수준의 데이터 분류 역량이 필요할 거다. 최근에는 인공지능을 활용해 데이터를 구조화하는 역량을 강화하고 있다고 한다.
◇ 경험자산의 축적의 중요성
매년 1조원의 지방소멸대응기금이 투입된다. 최근에는 예산을 다 쓰지 못해서 문제라고 하지만, 효과적으로 쓰일 수 없다면 차라리 안 쓰는 게 맞을 수도 있다. 더 큰 문제는 경험자산이 축적되지 않는 것이다. 수조원을 쏟아붓고도 효과적인 정책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으니 언론에 공개된 타 지역의 성공 사례를 모방하는 수준에 그친다. 실제로 성과가 있었는지, 어떤 요인과 환경이 작용했는지, 다른 지역에서도 성공 가능성이 있는지를 모른 체 피상적인 학습을 할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저출산, 고령화, 지방인구감소는 우리 모두 처음 겪는 일이다. 무엇이 해법인지 장담할 수 없고 이 분야의 경험을 가진 사람도 없다. 실패도 성공도 모두 자산이다. 지금부터라도 경험자산을 차곡차곡 쌓아가야 한다.
필자 소개 마케팅은 더 많은 사람을 위해 쓰여야 한다는 믿음으로 ‘지역의 미래’를 탐구하는 오래된 마케터입니다. 현재 공익마케팅스쿨 대표이자 공익 싱크탱크 그룹 ‘더미래솔루션랩’의 전문위원으로, 공익 마케팅 전략과 지역경제 정책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주요 저서로는 ‘슬리퍼 신은 경제학’이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