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금)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작은 가게는 휠체어 경사로 설치 의무 없다”는 법원

국가 상대 손배 2심
“설치 대상 범위 설정
차별이라 볼 수 없어”

지난 6일 서울고등법원 재판정에 출석한 지체장애인 김명학(64)씨는 판결을 듣는 순간 마음이 내려앉았다. 이날은 김씨가 “모든 사람에게 ‘1층이 있는 삶’을 보장하라”며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차별구제청구 손해배상청구 소송’ 항소심 선고기일이었다. ‘1층이 있는 삶’이란 휠체어나 유아차를 타는 사람이 어떤 건물이라도 제한 없이 접근할 권리를 요구하는 활동이다. 원고 측은 일정 면적 이하 시설에 장애인 접근성 보장 의무를 면제하는 정부의 ‘장애인 등 편의법’ 시행령이 기본권을 제한한다고 주장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정부의 손을 들어줬다. “허탈해서 웃음이 납디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또 싸워야죠. 안 싸우면 안 들어주는 걸요.”

현행법에 따르면 50㎡(약 15평) 미만 민간 사업장은 이동 약자를 위한 편의 시설 설치 의무가 없다. 2020년 기준 전국 도·소매업, 숙박·음식점업 민간 사업체 243만2631곳 중 50㎡ 미만인 곳은 96만2542곳이다. 이는 전체의 39.5%로, 10곳 중 4곳이 장애인 접근권 보장 의무에서 면제된 셈이다.

장애인 단체와 공익 변호사들은 휠체어나 유아차를 타는 사람도 모든 건물에 제한 없이 접근할 권리를 요구하는 '1층이 있는 삶' 소송을 5년째 이어오고 있다. 휠체어는 문턱 높이가 3㎝만 돼도 지나기 어렵다. /조선DB
장애인 단체와 공익 변호사들은 휠체어나 유아차를 타는 사람도 모든 건물에 제한 없이 접근할 권리를 요구하는 ‘1층이 있는 삶’ 소송을 5년째 이어오고 있다. 휠체어는 문턱 높이가 3㎝만 돼도 지나기 어렵다. /조선DB

소송은 4년 전 시작됐다. 김씨 혼자만의 싸움은 아니었다. 장애인 단체, 공익 변호사들이 함께 나섰다. 장애인뿐 아니라 노인, 유아차를 끄는 부모도 원고로 함께했다. 피고는 대표적인 생활 편의 시설인 투썸플레이스(카페)·호텔신라(숙박업)·GS리테일(편의점),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였다. 2020년 2월에는 호텔신라와 투썸플레이스가 조정을 받아들여 시설 개선을 약속했다. 이의신청을 했던 GS리테일도 올해 2월 법원 판결을 수용해 관련 시설을 설치하기로 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끝내 대한민국 정부의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사회적 비용’을 접근권 제한의 근거로 들었다. 이번 판결문에서 “국가가 편의 시설 설치 대상을 설정함에 있어 그 범위를 단계적으로 결정할 재량이 있다”며 “국가는 편의 시설 설치 의무를 부담하게 되는 시설주의 경제적 손실, 사회경제적 부담, 사회적 비용 등을 조사해 탄력적으로 대상의 범위를 결정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보건복지부도 지난해 6월 의무 설치 면적 기준을 300㎡에서 50㎡로 변경하는 시행령 일부개정안을 입법예고하면서 “소상공인의 경제적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더나은미래 취재 결과 장애인 편의 시설 설치에 드는 비용은 많지 않았다. 건물 구조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대리석 경사로 설치 비용은 1m에 100만원, 철제 간이 경사로는 10만~20만원 선이다. 경사로를 설치하기 어려운 환경일 때 대체할 수 있는 호출용 벨도 10만원 이하로 구입할 수 있다.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는 2014년, 2022년 한국 국가보고서를 심의하면서 우리나라 건물의 접근권 보장 기준이 바닥 면적, 건축 일자 등에 의해 제한되는 것을 우려하며 모든 공중 이용 시설에 접근권 보장 의무를 부여할 것을 권고했다. 국가인권위원회도 2018년 이 같은 기준으로 헌법에서 보장하는 장애인 행복추구권과 일반적 행동자유권, 평등권 등이 침해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주무 부처인 보건복지부는 여전히 면적을 기준으로 예외를 두는 시행령을 유지하고 있다. 이마저도 2022년 5월 1일 이후 신축, 개축하는 건물만 해당한다.

정다혜 사단법인 두루 변호사는 “유엔과 인권위가 시행령 개정을 지속적으로 권고했는데, 정부가 이를 유지했다는 건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방치한 미필적 고의에 해당한다”며 “재판부가 적은 금액이라도 상징적으로 국가에 배상 책임을 물어야 했다”고 말했다.

국가가 장애인 권리 보장 의무에 면제 조건을 두는 것 자체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홍윤희 장애인협동조합 무의 이사장은 “정부가 모든 사업체에 접근권 보장 의무를 부과하되, 유예 기간을 두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면서 “현재 시행령은 사회 구성원에게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권리 보장을 안 해도 된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고 비판했다.

장애인 인권 선진국으로 꼽히는 미국이나 영국에서는 일괄적으로 접근권 보장 의무를 부여한다. 면적, 건축 연도 등 특수 상황에도 예외는 없다. 문턱을 제거하는 게 불가능한 경우에는 건물 출입구에 호출 벨을 설치해 직원이 나와 도와줄 수 있도록 한다. 특히 영국은 체인점의 경우 경사로가 없는 매장에서 경사로가 설치된 가장 가까운 지점까지 교통편을 제공하기도 한다. 미국에서는 시설주가 접근권 보장에 든 비용을 직접 지출해야 하지만, 이후 세액공제나 소득공제 혜택 등을 제공한다.

이승헌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활동가는 “접근성 향상을 위한 시설은 장애인뿐 아니라 노인, 임신부, 유아차를 끄는 부모 등 다양한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면서 “재판부는 결국 비용을 이유로 모든 국민의 행복할 권리를 제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동석 대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국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행위가 ‘경제활동에 부담을 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됐다”면서 “접근권은 당연히 보장돼야 할 권리이며 혜택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최지은 더나은미래 기자 bloomy@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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