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 사는 대부분은 봄 가뭄이 얼마나 심각한지 느끼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이 시기에 울진에서 또 산불이 났습니다. 뭔가 심각하게 잘못되어간다는 게 조금씩 실감 나기도 합니다. 예전엔 가뭄이 들면 정치인들이 농촌을 찾는 뉴스가 가끔 나오기도 했지만 요즘은 그것마저 뜸합니다. 요소수 사태가 터지고서야 질소비료를 걱정하기 시작했고,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곡물가가 치솟아야 식량 위기를 떠올립니다.
농사의 반은 하늘이 짓는다고 합니다. 기후가 위기로 치달으니 농사인들 무사할 리 없습니다. 2년 전에는 54일간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된 비로 채소는 밭에서 물렀고 그해 햄버거에서는 토마토가 사라졌습니다. 그 이전 해에는 가을장마로 처마 밑에 걸어놓은 곶감에서 곰팡이가 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렇지 않게 지나갔습니다. 요즘 곶감은 대부분 건조기에서 말리기 때문입니다.
미국 중서부의 곡창지대에서는 1200년 만에 최악의 가뭄이 들었습니다. 그 여파로 작년에는 밀과 옥수수의 생산량이 40%까지 줄었습니다. 가뭄은 올해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호주는 3~5년마다 한 번씩 가뭄이 찾아올 때마다 밀 생산량은 절반까지 곤두박질 칩니다. 다행히 최근 두 해 동안 사상 유례없는 풍작 덕분에 세계는 식량 위기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가끔 이런 걱정도 합니다. ‘미국과 호주에서 동시에 가뭄이 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우리나라 논의 80%는 수리 시설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덕분에 어지간한 가뭄에도 별다른 어려움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어지간한 수준을 넘어서는, 즉 10년 만에 한 번 정도 찾아오는 가뭄의 경우 수리 시설이 있는 논도 절반은 가뭄 피해를 받습니다. 저수지 용량의 한계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뭄은 더 자주 더 세게 찾아오는 듯합니다.
우리나라 수리 시설은 어느 정도 수준일까요? 궁금해서 다른 나라와 비교해 봤습니다. 최대 쌀 수입국인 필리핀은 61%, 이웃나라 일본은 94%입니다. 우리나라는 일본과 필리핀 중간 정도에 머물고 있습니다. 최근에 밀로 인한 식량 위기는 많이 들어도 쌀로 인한 식량 위기는 별로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이런 관개시설 덕분입니다. 한번 설치하기는 어렵지만 한번 투자하고 나면 어지간한 홍수와 가뭄도 거뜬히 지날 수 있게 하는 게 농업 시설입니다. 그런데 1990년대 이후 우리나라 농업 시설에 대한 의미 있는 투자는 거의 없었습니다.
올해 발표된 IPCC 6차 보고서 ‘영향, 적응 및 취약성’ 편에서는 이미 세계 인구의 절반이 기후변화에 매우 취약한 환경에 살고 있으며, 산업화 이전 수준보다 1.5도가 더 상승하면 세계 농지의 8%가 농업에 적합하지 않게 될 것이라 합니다. 아마도 8%라는 수치가 어떤 의미인지 잘 와닿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2013년은 이전해 대비 밀이 6% 적게 생산되었지만 가격은 50% 정도 더 올랐습니다. 8%가 주는 의미를 실감할 수 있죠. 그런데 지난해 발표한 IPCC 6차 보고서 ‘물리적 기초’ 편에서는 빠르면 2030년에 1.5도가 올라갈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전문가들은 현재 수준의 농산물이라도 생산하려면 작물의 재배 시기 변경, 다른 작물로 전환, 물 절약형 관개 시스템의 설치가 필수적이라고 지적합니다. 이 모든 걸 10년 안에 해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농촌경제연구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농업용 저수지의 4분의 3은 50년 이상 노후 되었습니다. 이미 평년 정도의 가뭄에도 논의 4분의 1이 가뭄 피해를 받습니다. 우리나라 밭은 더 심각합니다. 전체 밭 중 18.5%만 안정적으로 물을 끌어올 수 있습니다. 유엔환경계획(UNEP)의 잉거 안데르센 사무총장은 “기후변화는 습격할 때를 기다리며 모퉁이에 숨어 있는 게 아니라 이미 수십억 명의 사람들에게 폭풍우로 몰아치고 있다”고 경고합니다. 우리나라 역시 기후변화의 영향권에 이미 들어섰습니다.
요즘 들어 ‘우리의 식량은 안전한가?’라는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간단하게 답하기가 점점 더 어렵게 느껴집니다. 우리의 식량 생산 시스템을 다시 돌아볼 때입니다. 그리고 다른 나라의 농업에 대해서도 체계적인 분석이 필요합니다. 올해는 식품 물가 상승 정도에서 멈추겠지만 내년은 어떨까요? 이제부터라도 식량 공급망의 불확실성을 줄여나갈 수 있도록 모든 역량을 집중할 때입니다.
남재작 한국정밀농업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