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4일(수)

새벽이, 먹기위해 길러지는 가축이 아닌 하나의 생명

국내 첫 ‘생추어리’ 일일봉사 체험기

새벽이의 모습. /새벽이생추어리 제공

생추어리(sanctuary)는 보호구역, 피난처라는 뜻이다. 미국의 동물권 활동가 진 바우어가 도축장, 공장식 농장에서 구해낸 동물들을 위한 공간을 생추어리라고 명명한 이후 동물들을 위한 안식처라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생추어리의 생명들은 축산동물로서 인간에 의해 삶이 강제로 중단되는 위기에서 벗어나 죽기 전까지 자신의 삶을 계속해 나간다.

우리나라에도 생추어리가 있다. 한 살이 갓 지난 돼지 ‘새벽이’가 거주하는 국내 최초 ‘새벽이생추어리’다. 새벽이는 지난해 7월 경기 화성의 한 돼지농가에서 태어났다. 동물권단체 DxE(Direct Action Everywhere) 코리아가 오물과 쓰레기로 뒤덮힌 농장에서 새벽이를 구출했다. 생후 6개월이면 도축을 당할 운명이었지만, 이제는 돼지의 수명(10~15년)을 채우게 됐다.

지난 8월 19일 오후 3시, 새벽이생추어리 일일봉사를 위해 경기도 모처로 향했다. 새벽이생추어리 일일봉사 겸 취재 허가 이후 받은 안내 문자에는 “생추어리의 공간을 외부에 발설하지 말아달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SNS 상에서 댓글과 DM으로 생추어리에 위해를 가하겠다는 협박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안내 문자를 따라 도착한 곳은 인적이 드문 한적한 시골이었다. 2명의 자원봉사자가 먼저 도착해있었다. “더우시죠? 물 좀 드세요.” 생추어리 활동가의 추천으로 봉사에 참여하게 됐다는 쌩칠(활동명·20)이 기자에게 물을 권했다. 나름 베테랑격인 쌩칠의 안내에 따라 짐을 내려두고 운동화를 장화로 갈아신었다.

새벽이생추어리 SNS를 통해 정기봉사 신청을 한 자원봉사자들은 택배 확인, 냉장고 정리, 새벽이 산책, 생추어리 청소, 식사 준비 등을 맡게 된다. 일일 봉사자였던 기자가 처음 맡게 된 일은 김치냉장고에서 꺼낸 싱싱한 오이를 새벽이에게 건네며 인사하는 일이었다. 사진으로만 봤던 새벽이를 처음으로 대면하는 순간이었다. 새벽이는 사람들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내밀며 킁킁 냄새를 맡았다. 생각보다 덩치가 컸다. 새벽이는 기자가 조심스레 건넨 오이를 맛있게 받아먹었다.

기자에게 주어진 다음 임무는 생추어리 안으로 들어가 새벽이의 ‘응가’를 모아 버리는 일이었다. 난생 처음 돼지의 똥을 가까이서 보고 만질 수 있는 순간이었다. 새벽이의 응가는 야채와 과일을 많이 섭취한 탓인지 섬유질이 많았고, 가볍고 동그랗고 냄새가 없었다. 생추어리 안의 쓰레기를 줍고 새벽이 전용 물통을 수세미로 닦았다.

이왕 봉사를 왔으니 좀더 그럴듯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찰나, 새벽이가 진흙 목욕을 위해 애용하는 웅덩이에 있는 녹조를 제거하는 일을 맡았다. 먼저 삽을 들고 웅덩이의 물을 퍼서 버리기 시작했다. 물을 제거한 다음 녹조가 낀 진흙을 담장 밖으로 퍼냈다. 땀이 비오듯 흘렀다. 한 생명을 책임진다는 것의 의미를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새벽이가 사는 곳. /새벽이생추어리 제공

그늘에서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잠시 땀을 식힌 후 새벽이의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생추어리의 운영팀에 속해있는 향기(25)씨는 “새벽이는 과일과 감자를 좋아하는데, 올해 태풍으로 채소 가격이 2배 이상 오른 상태라 지금과 같은 상태에서는 새벽이를 식비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 걱정”이라고 말했다.

저녁식사 이후, 새벽이는 잠시 울타리를 벗어나 향기씨와 생추어리 주변을 산책했다. 새벽이는 풀을 먹기도 하고, 주변의 농가에 사는 강아지와 함께 뛰어놀기도 했다. 풀밭을 뛰어노는 새벽이는 먹기 위해 길러지는 ‘가축’이 아니었다. 한 생명체로 느껴질 뿐이었다.

현재 새벽이생추어리는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활동가들, 생추어리를 지지하는 후원자들, 정기자원봉사자들의 노력으로 운영되고 있다. 생추어리의 부지를 물색하고 보금자리를 만들고 수도를 설치하기 까지 많은 비용과 노력이 들었지만, 그때마다 생추어리의 취지와 의미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힘을 합쳐 난관을 극복했다. 지금은 새벽이 혼자 생활하고 있지만 앞으로 생추어리를 확장해 더 많은 동물들이 함께 살도록 하는 게 목표다.

현재 새벽이생추어리는 생추어리라는 개념이 한국에서 널리 퍼질 수 있도록 데이터베이스화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한국에서 생추어리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생추어리는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 낯선 개념이에요. 동물의 안전과 삶을 보장한다는 것, 동물이 누군가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더 많은 사람이 알면 좋겠어요.” 일일봉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늘 길, 향기씨의 말이 내내 머리에 맴돌았다.

이다정 청년기자(청세담11기)

관련 기사

Copyrights ⓒ 더나은미래 & futurechosun.com

전체 댓글

제262호 창간 14주년 특집

지속가능한 공익 생태계와 함께 걸어온 1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