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그린스완’ 대비하는 중앙은행들
이달 초 한국은행 홈페이지에 조금 특별한 채용 공고가 올라왔다. ‘기후’와 ‘경제’의 관계를 분석할 박사급 전담 연구원을 뽑는다는 내용이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이번에 선발되는 인력은 금융안정국 연구원으로 근무하면서 기후변화가 금융 안정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게 된다. 기후변화가 실물경제와 금융시스템에 어떤 충격을 가져올지 예측하고 대비하는 보고서를 작성하는 게 주요 업무다.
이번 채용 공고가 눈길을 끄는 이유는 우리나라 금융기관에서 기후변화 관련 연구원을 뽑는 것 자체가 이례적이기 때문이다. 영국·프랑스·네덜란드 등 유럽 국가들은 이미 수년 전부터 기후변화를 ‘환경 문제’가 아닌 ‘경제 문제’로 인식하고 대비해왔지만, 한국은 이런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각국 중앙은행들이 기후변화를 가장 중요한 금융 이슈로 내세우고 있지만 우리나라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의 대응은 줄곧 소극적이었다.
기후가 금융을 망친다?
중앙은행들이 기후 문제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간단하다. 기후변화가 금융 위기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이런 식이다. ▲기후변화로 인한 폭염·홍수·폭설 등의 자연재해가 ▲농업·관광·에너지·보건 등 실물경제에 피해를 주고 ▲이런 피해가 보험·대출·투자 등 금융 부문으로 파급되면서 ▲금융 위기가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 저탄소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도 리스크가 발생할 수 있다. ▲탄소배출 규제 정책이 시행되면 ▲탄소배출 관련 산업의 가치가 급격히 하락하면서 ▲여기에 돈을 투자한 은행들의 손실이 확대돼 ▲금융시장에 충격을 줄 수 있다는 설명이다.
‘중앙은행들의 중앙은행’이라고 불리는 BIS(국제결제은행)는 올 초 ‘그린스완(Green Swan)’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통해 “다음번에 금융 위기가 발생한다면 환경파괴로 인한 기후변화 때문일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린스완은 미국 경제학자 나심 탈레브가 제시한 블랙스완(Black Swan)이라는 용어에서 따온 개념이다. 블랙스완이 ‘일어날 가능성은 낮지만 발생하면 엄청난 충격을 가져올 수 있는 위험’을 뜻한다면, 그린스완은 ‘발생 시기를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발생할 위험’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기후변화가 바로 그린스완이라는 것이다. BIS는 “기후변화가 예상치 못한 시점에서 세계경제에 큰 충격을 주고 금융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면서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 금융기관들이 그린스완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금융으로 기후를 살린다!
그린스완에 가장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나라는 영국이다.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BOE)은 최근 자국 금융기관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스트레스 테스트’(건전성 평가)에 기후변화 관련 위험성을 측정하는 항목을 추가했다. 금융기관이 기후변화로 인한 악재에 얼마나 잘 대비하고 있는지를 측정해 건전성을 평가하기로 한 것이다. 지난 2017년에는 영란은행 주도로 ‘녹색금융네트워크(NGFS)’가 출범되기도 했다. NGFS는 전 세계 중앙은행들이 모여 만든 협의체로 기후변화가 금융시장에 가져올 리스크를 논의하고 감독하는 역할을 한다. 현재 54개 중앙은행과 감독 당국이 가입돼 있다.
한국은행도 지난해 11월 NGFS에 가입하며 그린스완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기후변화 전담 연구원을 채용하기로 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전문가들은 한국은행의 이런 움직임을 긍정적 신호로 받아들이고 있다. 김지석 그린피스 기후에너지 스페셜리스트는 “유럽 국가들에 비해서는 한발 늦은 감이 있다”면서도 “한국은행이 우리 경제와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이제부터라도 기후변화 대응에 속도를 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종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사무국장은 “본격적인 ‘기후금융(Climate Finance)’ 시대가 한국에서 열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기후금융은 기후와 금융의 보이지 않는 연결 고리를 이용해 환경과 경제를 동시에 살리는 금융지원체계로, 유럽 국가들을 중심으로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 석탄 산업으로 들어가던 돈의 흐름을 재생 에너지 쪽으로 향하게 만드는 게 기후금융의 대표적인 사례다. 경제성이 떨어지는 석탄 산업에 대한 투자를 막아 금융권의 손실을 줄이고, 온실가스를 줄여 환경도 개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종오 사무국장은 “기후금융은 세계적인 흐름”이라며 “환경 때문에 금융이 망하지 않게 하는 것, 그리고 금융을 통해 환경을 개선하는 것. 이 두 가지를 함께 달성하는 게 기후금융의 목표”라고 말했다.
[김시원 더나은미래 기자 blindletter@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