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은 일관된 방향성을 가진 서사가 아니다. 줄어들기만 하는 것도 아니고, 악화하기만 하지도 않는다. 소득(income)과 평균(averages), 현재(today)를 넘어서 폭넓게 살펴야 고무줄 같은 불평등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다.”
페드로 콘세이상 유엔개발계획(UNDP) 인간개발보고서국(Human Development Report Office·HDRO) 국장은 최근 더나은미래와 만나 이같이 밝혔다. 지난 3일 ‘2019 인간개발보고서’ 한국 발간회에 참석한 그는 국제사회가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로 불평등을 지목하고 “세계 각지에서 ‘공정’에 대한 요구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유엔의 개발도상국에 대한 원조를 총괄하는 UNDP는 지난 1990년부터 인간개발보고서를 펴내고 있다. 세계 189개국을 대상으로 경제·사회·문화·교육·보건·여성 등 다양한 분야의 지표를 비교해 인간개발의 성취 수준을 평가하고, 국제개발 실태를 진단하는 연례 보고서다. 소득 격차(1992년), 젠더(1995년), 인권(2000년), 국제협력(2005년), 일자리(2015년) 등을 인간개발보고서 주제로 제시했던 UNDP는 불평등을 새로운 화두로 던졌다.
“불평등, 전 세계 시위대를 묶는 연결고리”
‘2019 인간개발보고서’는 소득 수준, 평균 수명, 지니 계수 등을 수평 비교하는 기존의 불평등 연구 방법론이 현실을 왜곡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번 보고서는 ▲소득을 넘어서 ▲평균을 넘어서 ▲현재를 넘어서 등 3개의 챕터로 구성됐다. 초등학교 중퇴율, 교사 수급률, 조혼율, 여성 취업률, 인터넷 사용률, 이산화탄소 배출량, 취약계층 고용률 등 200개가 넘는 지표를 활용해 불평등 실태를 조명했다. 이와 함께 ‘기술 혁명’과 ‘기후 위기’ 등을 불평등을 심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위협 요인으로 지목했다.
―‘불평등’을 인간개발보고서 주제로 선정한 이유가 무엇인가.
“인간개발보고서는 매년 국제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논의되는 주제를 다룬다. 불평등은 수년간 각국 정부와 정책입안자, 국제기구, 시민단체 등이 치열하게 토론한 주제였다. 다만 기존의 논의는 주로 ‘부(富)’에만 집중됐다. 각국 정부의 대응도 조세 제도 등을 활용한 부의 재분배에 치중됐다. 인간개발의 관점에서 불평등 문제를 살펴보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담론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소득·평균·현재를 넘어서야 불평등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소득은 불평등과 연관성이 크지만, 여기에만 집중하면 기술에 대한 접근성과 같은 인간개발과 관련한 다른 중요한 부분을 간과하게 한다. 평균을 넘어서자는 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활용했던 숫자들을 바꿔보자는 것이다. 지니계수 등 요약 측정값만 봐서는 전체적인 그림을 파악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현재를 넘어서자는 것은 미래의 변화에 대비해야 한다는 의미다. ‘기후 위기’와 ‘기술 혁명’ 등이 새로운 차원의 불평등을 만들어 내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기초 수준’의 불평등은 감소하고 있다.
“세계은행(WB)이나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기관에서 내놓는 자료만 보면 불평등이 머지않아 사라질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하루 수입이 1.9달러(약 2300원) 미만인 절대 빈곤 인구의 비율은 1981년 42.1%에서 2015년 10%로 떨어졌다. 중남미 국가들의 지니계수도 매년 줄어들고 있다. 하지만 절대적인 부의 격차는 오히려 벌어지고 있다. 교육과 보건 등 다른 분야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목격된다.”
2019 인간개발보고서에 따르면 2017년 기준 선진국과 저개발국가 국민의 초등교육 이수율은 각각 93.5%와 42.3%로 약 2.2배 차이가 났다. 고등교육 이수율은 각각 28.6%와 3.2%로 격차가 8.9배로 크게 벌어졌다. 기술 격차도 양상이 비슷했다. 휴대전화 이용률의 경우 개발도상국이 선진국의 절반 수준까지 따라잡았지만, 초고속인터넷 이용률은 격차가 35배 이상 벌어졌다. 콘세이상 국장은 “가난과 기아, 질병에 대한 진전에도 평등에 대한 요구는 더욱 거세지고 있다”며 “전 세계 거리를 가득 메운 시위대를 묶는 연결고리가 바로 불평등”이라고 말했다.
―국제개발 차원에서 불평등은 대개 ‘생존’의 문제와 연결되곤 했다.
“과거에는 ‘최저 수준’을 충족하는 데 집중했다면 이제는 ‘삶의 질’과 연결 지어 고민할 필요가 있다. 개발도상국이나 저개발국가의 국민이 생존 그 자체로 만족하던 시대는 지났다. 기술·문화·교육 등 다른 부분에서도 선진국을 따라잡고 싶다는 열망이 폭발하고 있는데 오히려 고등 수준의 불평등이 점점 심화하고 있다. 여기서 ‘공정’의 문제가 대두하는 것이다.”
“한국, 교육·보건·기술 인프라 뛰어나…불평등 해소 모범 사례”
―기후 위기를 불평등을 가속하는 위협 요인으로 지목했다.
“경제·사회적 지위가 낮을수록 기후 위기와 환경 파괴에 따른 피해를 크게 입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기후 위기를 막을 해결책도 다 나와 있다. 화석연료에서 재생에너지로 전환하고, 탄소 사용에 대한 대가를 부담하게 하는 것이 최선이다. 문제는 기득권층의 저항 때문에 실효성 있는 대책이 시행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경제력을 바탕으로 국제사회에서 위력을 행사하는 기업이나 정부가 기후 위기 대응에 동참하도록 압박해야 한다.”
―지난해 미국이 파리기후협정 탈퇴를 공식 선언한 것을 두고 비판이 많았다.
“특정 국가를 표적으로 삼고 싶지는 않다. 다만 경제적인 파워가 정치적인 파워로 연결되면서 불평등이 고착화하는 현상이 곳곳에서 목격된다. 경제력과 정치력을 동시에 가진 집단이 불평등 해소의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원론적인 이야기이지만 이럴 때일수록 국제사회의 협력이 필수다. 일시적으로 후퇴했다고 해서 대화를 포기하면 안 된다.”
―기후 위기와 함께 기술 혁명이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위협 요인으로 꼽혔다.
“기술 자체가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양상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휴대전화 사용 비율이나 금융 서비스 접근성 등 기초 기술에 대한 격차는 크지 않지만, 초고속인터넷·인공지능(AI) 등 강화된 기술의 혜택은 대부분 선진국이 누린다. 이런 기술을 개발도상국과 저개발국가도 일상적으로 누릴 수 있어야 불평등을 줄일 수 있다.”
―불평등 해소를 위한 정책 제언을 한다면.
“소득 확대와 경제 성장을 위한 정책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불평등은 생애 전 주기에서 축적된다. 교육과 보건, 기술에 대한 정책이 뒷받침돼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한국의 사례는 개발도상국과 저개발국가의 정책입안가들에게 모범이 될 만하다.”
한국은 UNDP가 매년 집계해 발표하는 2019년도 ‘인간개발지수(Human Development Index)’ 순위에서 조사 대상 189개국 가운데 22위에 올랐다. 프랑스(26위), 이탈리아(29위) 등 7대 주요선진국(G7) 일부 국가들보다 순위가 높았다. 한국은 인간개발지수에 불평등 정도를 반영하는 ‘불평등 조정 인간개발지수(Inequality-adjusted Human Development Index)’에서도 22위를 기록했다.
―불평등 해소의 측면에서 한국을 평가한다면.
“베스트 프랙티스(best practice)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경우 1인당 국민총소득(GNI)을 비롯한 경제 지표만 놓고 보면 프랑스에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교육 수준이나 기대 수명, 기술 접근성 등 지표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을 웃돈다. 교육과 보건, 기술에 대한 투자가 불평등 해소에 얼마나 이바지하는지 잘 보여주는 희귀한 사례다.”
[장지훈 더나은미래 기자 jangpr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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