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법] 전염병과 국가의 보호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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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탁건 재단법인 동천 변호사

출근길 지하철을 타니 주변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있다.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릴 때도 보기 힘든 풍경이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불러온 공포를 실감한다. 외부에서 오는 전염병에 대한 공포는 종종 ‘바깥’으로 인식되는 사람들에 대한 배타와 차별로 이어진다.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후진적인 중국의 식문화를 성토하는 글들이 가득하다. “NO CHINA”를 선언하며 중국인 출입을 막는 가게들도 생겨났다. 미지의 병에 대한 공포와 생존에 대한 갈망은 본능에 가깝다. 문제는 공포가 타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로 이어지는 기제다. 혐오 정서에 편승하고 부추기는 몇몇 언론의 모습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대림동을 가보니 실로 위생상 문제가 많았다”는 ‘르포’ 기사가 버젓이 언론매체에 실리고 있다.

전염병에 대한 공포는 구성원들을 보호해야 할 국가의 존재 이유를 소환한다. 몇 년 전 메르스 방역의 실패는 지난 정권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았다는 근거 중 하나로 제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즉흥적인 여론에 즉각 호응하는 것만이 국가의 보호의무일까. 정확한 정보를 전달해 불필요한 공포의 확산을 막고, 방역에 가장 효과적인 방안을 수립하는 것이 지금 국가가 해야 할 일이다.

국가 3부 기관 중 하나인 입법부의 모습은 어떠한가. 일부 국회의원은 혐오 여론에 재빨리 편승해 ‘중국인 입국 금지’ 법안을 발의했다. 2018년 제주도 내 예멘인 난민신청이 불러온 ‘법안 발의 러시’와 비슷한 행태다. 당시에도 ‘대중 추수주의’를 넘어 ‘혐오 추수주의’에 가까운 법안들이 우후죽순으로 발의됐다. 대부분 난민의 권리와 생존을 제한하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국회 본회의에 올라간 법안은 전무하다. 이번 입국금지 법안 등도 혐오정서의 불쏘시개로 쓰임을 다한 뒤 비슷한 길을 갈 것이다.

2000년대 초·중반에도 한국사회는 비슷한 소요를 겪었다. 외국인 원어민 강사들이 마약과 에이즈 전파의 주범이라는 공포와 편견이 퍼져나갔고, 2007년부터 외국인등록 시 이들을 대상으로 마약과 HIV(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 검사 결과를 제출하도록 의무화했다. 2009년부터는 원어민 교사들이 교육청과 근로계약을 체결할 때도 같은 검사 결과를 제출해야 했다. 그러나 내국인 교사나 한국계 외국인 교사에 비해 이들이 에이즈 감염률이 더 높거나 감염 가능성이 더 크다는 근거는 전혀 없었다.

2008년 여름 한국에 입국해 초등학교 원어민 영어보조교사로 1년 동안 일한 뉴질랜드 국적의 A씨도 계약 연장을 위해서는 HIV 검사를 제출해야 했다. A씨는 끝내 HIV 검사를 거부하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이 검사의 차별성을 주장하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진정이 각하됐지만 A씨는 포기하지 않고 유엔인종차별철폐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했다. 2015년 유엔인종차별철폐위원회는 “국가기관에 의한 의무적 HIV 검사가 인종차별철폐협약이 보장하는 인종·피부색과 관계없이 만인에게 인정되는 근로 및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했다”면서 “대한민국 정부는 이 정책 때문에 A씨가 입은 정신적 및 실질적 손해에 대해 적절한 손해 배상을 하라”고 권고했다.

‘적절한 손해 배상’이 이뤄지지 않자 2018년 A씨는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했고 2019년 10월 29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사실상 A씨의 청구를 모두 받아들였다. “해당 정책은 감염인으로 오해받아 불이익을 입을 처지에 놓인 사람에 대한 보호의무를 저버린, 위법성이 농후한 행위로서 사회질서에 위반되는 행위”라고 판단했다. 국가의 보호의무는 어디까지인지, 공포와 혐오와 뒤섞인 여론 앞에 정부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공동기획 | 조선일보 더나은미래·재단법인 동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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