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금)

공과금도 못 내 전기·가스 공급 끊기고…외면 당하는 ‘비수급 빈곤층’

ⓒ일러스트=나소연

#8평 남짓한 원룸. 이지연(가명)씨와 세 자녀는 이곳에서 함께 산다. 이씨는 남편과 이혼한 이후 가계를 홀로 떠안으면서 하루하루 빠듯하게 살았다. 닥치는 대로 일했지만, 생활비와 아이들 교육비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기초생활급여 대상이 아니라 정부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다. 올해 들어 월세가 밀리기 시작했고, 요금이 체납돼 가스 공급도 끊겼다. 사춘기에 접어든 삼 남매를 볼 때마다 이씨는 벼랑 끝에 놓인 심정이다.

지난 2014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송파 세 모녀 사건’이 발생한 지 5년이 지났지만,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의 고통은 여전하다. 세 모녀 사건은 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한 단독주택 지하에 살던 60대 여성과 30대 두 딸이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다. 당시 이들은 수입이 없었지만, 부양의무자 조건 탓에 기초생활급여를 받지 못했다. 이처럼 극도의 빈곤 상황에도 정부 지원을 못 받는 이른바 ‘비수급 빈곤층’은 전국 144만명(2017년 기준)으로 추정된다. 특히 차상위 계층과 같은 잠재적 빈곤 계층은 갑작스레 닥친 실업이나 의료 지출을 감당하지 못해 순식간에 극빈층으로 추락하기도 한다.

공과금 미납, 위기 가정 발생의 첫 신호

보건복지부는 단전·단수 가정, 국민연금·건강보험료 체납 정보, 주택관리비 체납 정보 등을 통해 위기 가정을 발굴한다. 지난 2018년 기준 보건복지부가 빅데이터로 추정한 고위험 취약계층은 36만명에 이른다. 이를 전국 지자체에 전달하면 복지 담당 부서에서 경제적 위기 상황을 판단해 지원 여부를 결정하는 식이다.

위기 가정의 붕괴는 대부분 작은 돈에서 시작된다. 거액의 빚을 한 번에 떠안기보다 지속적인 생활고에 시달리다 월세나 공과금이 밀리면서 빚이 쌓여가는 구조다. 저소득층 지원 업무를 담당하는 서울 지역의 한 공무원은 “100만원으로 막을 일이 500만원으로 커질 때가 있는데, 처음엔 혼자 끙끙대다가 문제가 커지면서 멘털이 무너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주민들에게 ‘아무리 작은 문제라도 말을 해야 도울 수 있다’고 강조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도시가스의 경우 3개월 요금을 체납하면 공급이 끊긴다. 형편이 여의치 않으면 1개월분만 우선 납입해도 재공급된다. 가정에 가스 공급이 중단됐다는 건 그만큼 한계 상황에 도달했다는 얘기다. 현장 전문가들은 “공과금 미납은 위기 가정 발생의 첫 번째 신호”라면서 “잠재적 빈곤층에서 나타나는 이런 신호를 놓치면 재기하기까지 오랜 시간과 비용이 든다”고 강조한다.

정부 손길 닿지 않는 복지 사각지대, 민간이 발굴·지원한다

현재 정부는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위기 가정을 지원하기 위해 ‘긴급복지지원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예를 들어 외벌이 가장이 실직해 가정에 위기가 찾아온 경우, 새로운 직장을 구할 때까지 소득 공백을 어느 정도 채워주는 것이다. 문제는 이 제도가 지원 대상자의 상황을 면밀하게 고려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질병이나 부상으로 인한 실·휴직 상태일 경우에는 경제활동에 복귀하기까지 오래 걸리지만 이런 상황까지 감안하진 않는다.

굿네이버스는 지난해 5월부터 신한금융그룹, 사회복지공동모금회와 함께 ‘위기 가정 재기 지원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정부 지원과 현실의 틈새를 메우기 위한 민간 영역의 지원사업으로, 3년간 60억원이 투입된다.

민간 영역에서 이뤄지는 지원사업의 장점은 정부 사업에 비해 문턱이 낮다는 데 있다. 정부의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수급자 선정 기준은 중위소득 30% 이하지만, ‘위기 가정 재기 지원 사업’의 경우 중위소득 100% 이하 가구를 대상으로 한다. 또 소득 기준을 웃돌더라도 사안의 중대성과 긴급성에 따라 심사를 통해 지원할 수 있게 길을 열어뒀다. 지원 항목도 ▲더좋은내일(생계주거비) ▲더밝은내일(교육·양육비) ▲더편한내일(의료비) ▲더힘찬내일(재해·재난구호비) ▲더안전한내일(학대피해지원) 등 5가지로 다양하고 중복 지원도 가능하다.

사례 발굴 1~2주 내 지원금 지급해

최근 굿네이버스가 발표한 1차연도 사업 결과에 따르면, 지금까지 총 718가구 2273명이 긴급지원금을 받았다. 지원 금액은 16억5200만원 수준이다. 항목별로는 생계주거비가 57%로 절반 이상을 차지했고, 교육·양육비가 21%, 의료비 14%, 학대피해지원 7%, 재해·재난구호비 1% 순이었다. 강인수 굿네이버스 사업기획팀장은 “가구당 최대 1000만원까지 지원 가능하지만 그 정도 목돈이 필요한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며 “가구당 평균 지원금이 230만원 수준인데, 이 정도 금액으로도 재기의 발판을 충분히 마련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현장에서 일하는 복지 담당 공무원들은 사례 발굴 시 즉각적인 지원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정부 지원의 경우 내야 할 서류가 많고 제도 자체도 복잡해 지원이 이뤄지기까지 긴 시간이 소요된다. 유유정 신한금융지주 브랜드전략본부 부장은 “위기 가정 재기 지원 사업은 주 1회 심사로 지원금 대상자를 결정하고 있으며, 보통 1~2주 내에 빠른 입금이 이루어져 대상자들의 만족도가 상당히 높은 편”이라고 말했다.

굿네이버스와 신한금융그룹은 2차연도에 접어든 위기 가정 재기 지원 사업의 영역을 확장한다는 계획도 내놨다. 유유정 부장은 “일회성 경제적 지원으로 위기 가정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기 때문에 사업 지원 대상자의 변화를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다른 사업과도 연계할 계획”이라며 “별도 사회공헌활동으로 진행 중인 청년 대상 재기 지원 프로젝트, 경력 단절 여성을 위한 직업훈련 등을 통해 안정적인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라고 말했다.

더나은미래·굿네이버스·신한금융그룹 공동기획

 

[문일요 더나은미래 기자 ily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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