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열한 자본주의 막 내리고 건강한 자본주의 싹틔울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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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인터뷰_사회 혁신의 대가 제프 멀건 네스타 CEO

“사회가 어떤 시점에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떤 변화’를 상상할 수 있는가는 그 사회의 역량에 달렸다. 어떤 혁신을 발견해내는지, 자원을 연결하는지, 사회가 딛고 있는 가치를 고찰하는지에 따라 사회는 새로운 방향으로 도약하기도 하고, 머물기도 하고, 후퇴하기도 한다.”

‘사회 혁신가의 혁신가’, 제프 멀건<사진> 네스타(NESTA) CEO의 말이다. 네스타는 세계적인 사회 혁신 싱크탱크. 2011년부터 네스타를 이끌어 온 그는 ‘사회의 변화’를 키워드로 공공과 민간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일상의 민주주의, 연구와 실천이 결합된 싱크탱크 ‘데모스(Demos)’를 설립했고, 영국 총리실에서 일하기도 했으며, 이후엔 영 파운데이션(Young Foundation) 대표를 맡아 사회적 기업과 비영리 조직, 정부 정책의 사회 혁신을 주도했다. 네스타에선 전 세계의 사회 혁신을 연결하고, 생태계를 짚어 왔다.

‘새로운 사회는 어떻게 가능할까. 변화는 어디에서 올까.’ 더나은미래는 창간 8주년을 맞아 제프 멀건 네스타 CEO를 스카이프로 인터뷰했다. 최근 한국엔 그의 저서 ‘메뚜기와 꿀벌: 약탈과 창조, 자본주의의 두 얼굴’이 번역됐다. 그에게 새로운 자본주의를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변화는 어디에서 가능할지 물었다.

ⓒ조현호 C영상미디어 기자

◇메뚜기와 꿀벌… 건강한 자본주의를 상상하다

―’사회 혁신’의 선두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책을 냈던 이유가 무엇인가.

“2008년 금융 위기가 터진 뒤 원인에 대한 여러 진단이 나왔다. 기업인의 탐욕을 지적하는 이들도, 과도하게 복잡해진 금융 시스템을 문제 삼은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진단에 비해 여러 나라의 대응은 실망스러웠다. 위기의 근본 원인은 건들지 않고, 기존 방식을 답습했다. 국가재정을 들여 금융 위기의 핵심에 있던 은행을 구제하거나, 소비자 지출을 늘리기 위해 세금을 감면하는 등 문제 원인을 심화시키기도 했다. 위기를 불러온 기존 자본주의 체계의 원인을 짚고, 새로운 변화를 상상하고 필요한 논의를 촉구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자본주의를 메뚜기와 꿀벌에 비유했는데.

“자본주의에 대한 입장은 대체로 양극단이다. 한쪽에선 자본주의를 찬양하고, 다른 쪽에선 비난한다. 그러나 양쪽 진단 모두 한계가 있다. 자본주의에는 두 요소가 공존한다. 하나는 다른 이들에게 가치 있는 것을 만드는 사람들을 보상하는 기제다. 아이패드나 하이브리드 자동차가 개발됐고, 사회를 바꾸는 스타트업이 부상하는 것도 이 덕분이다. 사람들의 창조성을 이끌어내고 ‘앙트러프러너(기업가·Entrepreneur)’가 되도록 장려하는 건 자본주의의 큰 강점이다. 한편 자본주의의 문제는 약탈자도 보상한다는 데 있다. 건물주, 금융 투기업, 고리대금업자 같은 ‘메뚜기’들은 좋은 가치를 생산하지 않고도 큰돈을 번다. 개인 정보를 유통해 돈을 버는 데이터 기업이나 설탕 덩어리 시리얼을 건강에 좋은 것처럼 판매하는 곳들도 ‘약탈자’다. 그런데 지난 수십 년간 꿀벌보단 메뚜기 행위를 할 유인이 컸고, 여러 위기를 낳았다. ‘자본주의가 옳다, 그르다’를 넘어 꿀벌을 장려하고 메뚜기를 제약하려면 어떤 합의와 변화가 필요할지 봐야 한다.”

지난 18일, 제프멀건과 진행했던 스카이프 인터뷰.

―금융 위기가 일어난 지 10년이 지났다. 그간의 흐름을 어떻게 보나.

“기존 경제 방식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페이스북 개인 정보 유출 사례가 보여주듯 디지털 세상에서 ‘약탈자’ 성격이 더 두드러졌다. 다만 변화의 흐름도 있다. 올해 초 세계 최대 자산 운용사인 블랙록에서 ‘환경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가치’를 평가하겠다’고 밝혀 화제가 됐다. 이미 전통적인 방식의 자본주의는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한때 자본주의의 ‘정수(精髓)’라 여겨졌던 용어들이 확장된 의미로 쓰인다. 과거엔 ‘성장’은 ‘더 많이, 크게’를 의미했다. 이젠 GDP 외에 행복지수, 관계의 질 등 ‘질적 성장’을 측정하려는 시도들이 이어진다. 소셜 섹터에서 ‘기업가 정신’이란 용어가 쓰인 지도 20여년이 됐다. 이젠 스스로를 소셜앙트러프러너(사회적 기업가)로 인식하는 이들도 전 세계 수만 명이다. 캐나다, 한국 등 사회 혁신을 정부 정책으로 밀기 시작한 국가도 여럿 된다. 곳곳에서 변화 시도가 움텄고, 늘고 있는 추세다.”

―새롭게 방향을 튼 사례도 있나.

“2008년 최악의 경제 위기를 겪었던 아이슬란드가 대표적이다. 당시 금융 위기로 아이슬란드는 국가 빚이 GDP의 10배에 달했다. 은행이 파산하고 통화 가치는 바닥을 쳤다. 당시 아이슬란드 내각에서도 부채를 들여 외국인 투자자를 보상하려고 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들고 일어섰다. 중앙 광장에 모였고, 위기 원인을 뜯어고치기 위한 고민이 시작됐다. 아이슬란드는 전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금융 규제 당국, 기존 내각 등 금융 위기를 초래한 이들을 법정에 세웠고, 책임을 물었다. 새로운 내각이 들어섰고, 시민들의 합의로 ‘새로운 국가 비전’을 설정했다. 양적인 성장 대신 ‘건강한 성장’을 국가와 경제의 핵심으로 잡았고, ‘도덕성, 정의, 동등한 권리’ 같은 가치를 국가 헌법에 반영했다. 여러 북유럽 국가들도 국가 위기를 새로운 질서로 도약하는 기회로 만들었다.”

―”삶과 생명, 창조성을 중심에 둔 건강한 자본주의”라는 게 가능할까.

“19세기를 떠올려보라. 당시 대다수 사람은 ‘왕정체제’가 영원할 거라 믿었다. ‘민주주의’는 ‘불가능한 아이디어’였고, 강한 사람이 약자를 다스리는 게 ‘인간의 본성에 맞는다’고 여겼다. 그러나 한 세기 만에 이 생각은 완전히 뒤집어졌다. 사회제도는 변한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역시 역사적인 경로를 거쳐 지금의 형태가 됐다. 그러나 점차 꿀벌보단 약탈자에게 크게 보상하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새로운 자본주의를 상상해야 한다.”

◇변화의 견인차, 정책의 실험장 필요해

―사회 변화를 상상하고 혁신을 만드는 데 있어 제3섹터의 역할을 짚는다면.

“앞으로의 경제는 생산이나 소비, 폐기보다는 관계와 유지가 더 중요한 가치로 부각될 것이다. ‘관계’ 중심의 경제는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는 영리 기업보다는 협동조합, 필란트로피 기관 등 비영리·사회적 경제 조직의 성격과 잘 부합한다. 세계적으로 사회적 경제는 꽤 단단하게 성장하고 있다. 특히 유럽에서는 상당한 규모의 돈이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으로 흘러간다. 여러 대학 과정이 생겼고, 졸업 후 이 분야 진로를 희망하는 청년도 상당하다. 더는 비주류에 머문다곤 볼 수 없다. 그러나 관계 중심의 경제로 재편된다고 해서 사회적기업이나 비영리 기관이 전체 경제에서 차지하는 ‘규모’가 커질 것이라고 장담할 순 없다. 노년 인구를 위한 돌봄 기업 등 더 많은 영리 기업이 이 분야로 들어올 것이고, 경쟁에서 영리하게 대처하는 곳만 살아남을 것이다. 몇 년 전엔 세계 최대의 협동조합 그룹 몬드라곤의 최대 기업인 파고르(Fagor)가 파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영역의 역할은 규모를 키우는 것보단 해결책을 제시하고, 전체 사회 변화의 견인차 역할을 하는 데 있다고 본다.”

―변화의 견인차 역할이라면.

“새로운 자본주의에선 ‘성장’의 의미를 제고해야 하듯 이 영역에서도 ‘양적 성장’ 자체보다는 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내는 선두에 서야 한다. 조직 자체의 규모를 키우는 게 전체 사회 변화에 있어 좋은 결과를 내진 않더라. 많은 경우 비영리 조직은 규모가 커질수록 관료적이고 혁신과 거리가 멀어져 거대 기업과 별반 다를 게 없어진다. 비영리나 사회적 기업은 ‘양적인 성장’보다는 좋은 설루션을 내고, 궁극적으로 영리 기업이나 정부가 시민경제의 속성을 반영하도록 질적 ‘영향력’을 키워야 한다. 관료적인 거대 조직은 우리 사회에 이미 너무도 많다.”

―사회혁신가나 비영리 단체가 변화를 만들기 위해선 자원이나 영향력이 필요하지 않나. 그러나 영역을 넘어선 협력은 쉽지 않은데.

“나는 정부나 기업 등 자원을 가졌지만 아이디어가 없고 딱딱한 거대 조직은 나무에, 창조적인 사회 혁신가는 벌에 종종 비유하곤 한다. 창의력과 아이디어를 가지고 나무 사이를 날아다니면서 연결시키고, 꽃을 피워 내기 위해 고민한다. 꿀벌을 장려하는 제도를 갖춰야 한다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이런 파트너십을 제도화할 수도 있다. 아직 시작하는 단계이지만 영국 정부에선 ‘포용적인 경제 파트너십’이라는 프로그램을 새롭게 도입했다. 대기업, 시민사회, 정부가 파트너십을 맺고 특정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모델이다. 지난해 처음으로 정신건강 문제, 일의 전환 문제, 금융 접근성 문제 등을 내걸었고, 문제를 혁신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조직을 선정해 1년간 지원한다. 지난해 네스타에선 100곳이 넘는 대기업과 시민사회 조직을 모아 워크숍을 진행하기도 했다. 작은 규모고, 시작하는 단계지만 협력 모델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 혁신과 관련해선 세계적으로 어떤 추세가 있나.

“세계적인 혁신 사상가로 꼽히는 브라질의 로베르토 웅거 교수, OECD와 함께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흐름을 정리 중이다. 크게 세 가지다. 하나는 새로운 기술이 특정 계층이나 지역, 대기업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혜택을 줄 수 있도록 하는 실험들이다. 적은 인구가 사는 시골이나 소기업에서도 정보 접근성을 높이고, 인공지능(AI)을 활용 가능하게 한 사례다. 두 번째는 교육에서의 흐름이다. 전 세계에서 청소년을 단순히 지식을 습득하는 대상이 아니라 변화의 주체이자 메이커(maker·창작자)로 키워내는 교육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세 번째로 정부 자체를 운영하는 방식에 대한 실험도 계속되고 있다. 정부의 속성상 굉장히 혁신적이긴 어렵다. 그러나 위계적이고 관료적으로 운영됐던 정부 조직이 실험을 거듭하고 혁신해가는 사례가 곳곳에 있다. 핀란드, 영국 등 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실험하고, 그 근거를 기반으로 정책을 결정하는 ‘폴리시 랩(정책 실험실)’을 도입한 곳도 늘고 있다. 올해 가을쯤 보고서가 발간될 예정이다. 각 나라의 정부나 정당에서 정책에 직접 반영할 수 있는 방법도 준비 중이다.”

―변화는 어떻게 가능할까. 현 시점을 짚는다면.

“지난 10년간 여러 사회 혁신 실험들이 이어졌다. 고령화 같은 인구 변화나 환경 파괴, 청년 실업 등 기존 자본주의 아래의 여러 문제에 비해 대응 방식은 여전히 미미하다. 미국 트럼프나 러시아, 중국에선 권위적인 리더가 힘을 휘두르고 있고, 이탈리아엔 포퓰리스트 정당이 이끄는 내각이 들어섰다. 영국도 그전보다 후퇴했다. 그러나 위기는 때론 새로운 기회를 연다. 변화는 어떤 시점에서 올지 예측하기 어렵다. 그런 면에서 한국은 그 어느 때보다 주목받고 있다. 국민의 평화 시위로 정권이 바뀌었고, 두 명의 대통령이 구속됐다. 과거의 문법 일부는 통하지 않게 됐다. 한국에서 좋은 실험을 이어나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메뚜기와 꿀벌: 약탈과 창조, 자본주의의 두 얼굴|제프 멀건 지음|김승진 옮김|세종서적|5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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