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진 기자의 CSR 인사이트] 대기업 기부금 심사 강화…독 될까, 약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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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기부금 집행 룰’ 재편
주요 그룹도 “내부 규정 검토 중”

 

최근 재계에선 ‘기부금 룰(rule)’ 재편이 한창이다. 삼성과 SK가 10억원 이상 기부금 및 사회공헌기금에 대해 이사회 의결을 반드시 거치도록 결정하면서, 투명성 이슈가 주요 그룹들로 확산되는 분위기다. 이에 대기업 사회공헌팀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우리도 같은 기준을 마련해야하는지 체크하라’는 지시가 내려온 것. 아직까지 기업 내부에선 “이미 잘하고 있는데 굳이 따라할 필요 없다”, “이번 기회에 투명한 절차와 기준을 마련해야 안전하다” 등 의견이 분분하다. 

픽사베이_대기업 기부금_이사회

지난달 24일, 삼성전자는 10억원 이상의 기부금·후원금·사회공헌기금 등을 지출할 때 반드시 사외이사가 과반수를 차지하는 이사회의 의결을 거치도록 규정을 마련했다. 이렇게 결정한 모든 후원금과 사회공헌기금은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DART)과 사업보고서, 지속가능경영보고서에도 공시 및 게재된다. 1000만원 이상의 후원금과 사회공헌기금에 대해서는 법무·재무·인사·커뮤니케이션 부서의 팀장이 참여하는 ‘심의회의’를 신설해, 매주 모여 사전 심사를 강화하기로 했다. 여기엔 외부 단체나 기관의 요청에 따른 기부, 후원·협찬 등의 후원금, 사회봉사활동, 산학지원, 그룹 재단을 통한 기부 등 ‘사회공헌기금’이 모두 해당된다. 벌써 한 달새 1000만원 이상 기부금을 집행하는 심의회의가 몇 차례 열렸다고 한다. 지금까지 삼성전자는 기부금에 한해, 자기자본의 0.5%(약 6800억원) 이상 (특수관계인은 50억원 이상)인 경우에만 이사회를 거쳤다. SK텔레콤과 SK하이닉스 역시 10억원 이상의 기부금·후원금 등에 대해 이사회 의결을 거치기로 결정했다. SK이노베이션을 비롯한 SK그룹 각 계열사에서도 이같은 규정을 마련할 것으로 보인다.

다른 기업들의 상황은 어떨까. 주요 그룹들은 “내부 검토 중”이라고 조심스레 입을 모았다. LG그룹은 “현재까지 기부금·사회공헌 비용은 이사회 승인 대상이 아니었고, 계열사별로 업무 전결 규정이 있었다”면서 “향후 기부금의 투명성과 합리성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국내외 사례 등을 살펴보며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답했다. 두산그룹은 그동안 연간 사업 계획을 세울 때 기부금 및 사회공헌 비용을 사전에 검토하고 편성해왔다. 긴급구호 등 추가 집행이 필요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만, 유관 부서와 경영진 논의를 거쳐온 것. 두산그룹 관계자는 “과거 중앙대학교 재단 참여 등 ‘기타 경영상 중요한 업무 집행에 관한 사항’에 해당될 때 공시해왔다”면서 “보다 세밀한 절차를 만들기 위해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한화그룹은 “임직원 기금에 대해서는 임직원 대표들로 구성된 ‘사회공헌운영위원회’에서 분기별로 의결하고, 사내 인트라넷에 기부금 사용 내역을 공개한다”고 설명했다. 이미 일정 금액 이상의 기부금에 대해 이사회 의결을 거쳐온 기업도 있다. 롯데그룹은 “일부 계열사가 일정 금액 이상의 기부금에 대해 이사회 의결을 거치고 있다”면서 “현재 투명성 강화를 위해 사회공헌위원회 및 이사회 의결 시스템을 구축하는 방안을 검토할 계획이고, 비용 집행시 파트너 선정에 관한 세부 기준을 빠른 시일 내에 마련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대차그룹은 “이사회 의결을 거치는 금액은 대외비라 밝힐 수 없다”며 “투명성을 높이는 절차를 마련하지 않겠다는 건 아니고, 아직까지 검토되진 않고 있다”고 말을 아꼈다. 

이처럼 기부금 심사를 강화하는 트렌드는 3조원에 달하는 기업 사회공헌 영역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전문가들은 “정권의 무리한 요구를 거절할 수 있는 방패막이 역할은 확실히 하겠지만, 일시적으로 기부금과 사회공헌 규모가 줄어들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최순실 사태를 겪은 기업들이 이미 ‘재단’ 명칭이 들어간 공익법인이나 문화예술 관련 비영리단체에 기부금 출연을 꺼리고 있기 때문. 10년차 A기업 사회공헌 담당자는 “10억원 기준이 타당한 것인지, 괜히 도입했다가 역으로 지금까지의 기부금 집행 절차가 불투명했다고 오해받는 건 아닌지, 설왕설래가 이어지고 있다”면서 “일단 깃발을 든 삼성이 기부금 및 사회공헌 규모를 얼마나 줄일지, 경쟁사의 동향은 어떠한지 일단 지켜보자는 분위기”라고 귀띔했다. 그동안 삼성이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등에 전달하는 연말 기부금은 주요 그룹의 후원 규모를 결정하는 기준이 되곤 했다. 이에 대해 삼성전자 관계자는 “기부금을 투명하게 집행하겠다는 거지, 규모를 줄인다는게 아니다”고 반박하며 “오히려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사회공헌 사업일 경우, 이사회 의결을 거치면서 기금 규모가 커질 수도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사외이사의 독립성과 전문성이 인정되지 않으면, ‘제2의 미르·K스포츠재단’ 사태를 막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매출액 상위 100대 기업의 사외이사 663명 중 반대표를 행사해본 경험이 있는 사외이사는 9%, 사외이사 중 한 명이라도 반대한 안건은 0.4%에 불과하다(한국개발연구원, 2015). 김종대 인하대 경영학과 교수는 “정부의 압력을 거절하기 어려운 관료 출신이나 형식상 ‘거수기’ 역할을 하는 사외이사를 대신해, 사회공헌·윤리경영 등 CSR(기업의 사회적책임)에 전문성을 가진 이들이 ‘게이트키퍼(gatekeeper)’ 역할을 해야한다”면서 “이번 기회에 이사진들이 윤리경영과 지속가능경영을 충분히 공부하고 고민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공기업이었다가 민영화된 KT와 포스코의 경우, 일찍부터 각각 10억원 이상·10억원 초과 기부금에 대해 이사회 의결을 거쳐왔지만, 미르·K스포츠재단에의 출연을 막지 못했다. 특히 포스코의 2016년 분기보고서를 보면, K스포츠재단 기금 출연에 대해 7명의 사외이사들이 모두 찬성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포스코 홈페이지에 공개된 2016년 이사회 의결사항을 보면 K스포트재단 기금 출연건이 가결된 것을 볼 수 있다.
포스코 홈페이지에 공개된 2016년 이사회 의결사항을 보면 K스포트재단 기금 출연건이 가결된 것을 볼 수 있다.
포스코 2016년 분기보고서를 보면 K스포츠재단 기금출연에 대해 이사회 전원이 찬성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포스코 2016년 분기보고서를 보면 K스포츠재단 기금출연에 대해 이사회 전원이 찬성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장기적으로는 공익법인에 대한 정보가 많아져야, 기업의 사회공헌이 확장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문형구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이사진이 공익법인의 특성·성과·투명성 등을 면밀하게 검토할 수 있는 충분한 정보가 주어질 때, 불합리한 의사결정에 대한 책임도 지울 수 있다”면서 “영리와 비영리 모두 투명성을 강화하는 건설적인 대안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공익법인과의 파트너십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것도 방법이다. 세계 1위 바이오 제약사 로슈(ROCHE)·유니레버·마이크로소프트 등 글로벌 기업들은 사익을 추구하는 공익법인과의 프로젝트를 엄격하게 금지하고, 파트너십 가이드라인을 홈페이지나 문서로 공개하고 있다. 박두준 한국가이드스타 사무총장은 “이사회 의결을 통해 정부 압력에 의한 준조세격 기부금이 줄면, 그만큼 정말 필요한 곳에 쓸 수 있는 사회공헌 비용이 늘어날 것”이라며 “장기적으로는 실력있고 투명한 비영리단체에게 기회가 될 것이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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