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장애인 직업 재활 성공 모델, 카페 ‘히즈빈스’
바리스타 54% 정신장애인, 직원 1명당 평균 근속 기간 3년
전국 8개 지점 열 정도로 성장
2009년 경북 포항에 위치한 한동대 중앙도서관에 자그마한 커피숍 하나가 들어섰다. 얼마 후 학생들이 커피를 마시려고 선 줄로 복도가 가득 찼다. 바리스타 3명이 손님을 하루 평균 300여명의 손님을 맞느라 손발을 분주하게 움직여야 했다. 학생들은 “여기 커피 맛을 한번 보면 다른 곳에 못 간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로부터 7년. 커피숍은 월 최고 매출 4000만원을 찍을 만큼 ‘맛’을 인정받았다. 덕분에 포항에서만 7호점을 오픈할 정도로 급성장했다. 카페의 성공은 해외에서도 화제였다. 미국 메릴랜드 주립대 연구진이 10평 남짓한 카페를 직접 찾았다. 한국 카페의 작은 성공 스토리에 미국 주립대 연구진이 관심을 가진 이유는 직원인 바리스타의 절반 이상이 정신장애인이기 때문이다.
메릴랜드 주립대 연구진이 카페를 찾은 이유는 장애인 고용 시스템을 벤치마킹하기 위해서다. 미국정신재활협회는 장애 직원들의 달라진 모습을 소식지에 자세히 소개했다.
작지만 아름다운 카페 ‘히즈빈스’ 이야기다. 히즈빈스 장애 직원들의 평균 근속 기간은 3년 이상이다. 보통 정신장애인의 70%가 6개월 안에 회사를 떠난다. 3년 이상은 기록적인 숫자다.
정신 장애인을 고용했다는 다른 카페는 보통 허드렛일을 시킨다. 그러나 히즈빈스는 짧게는 3개월에서 길게는 1년 이상 전문 교육을 한 다음 정식 바리스타로 고용한다.
대학 구내 10평 공간에서 시작한 커피 전문점이 정신장애인의 직업 재활 성공 모델로 인정받은 된 비결이 무엇일까. 그 중심엔 청년 임정택(33)이 있다.
밤 9시에도 한동대 중앙도서관 3층 카페 히즈빈스 1호점은 영업중이다. 몰려드는 손님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저희 선생님들이세요.” 임 대표는 커피를 추출하고 와플을 굽는 직원들을 바리스타 선생님이라고 소개했다.
◇25세 청년의 ‘맨땅 헤딩’… 삶을 바꾼 정신장애인과의 만남
임 대표는 8년전 진로와 취업 고민으로 방황하던 25살 대학생이었다. “졸업은 코앞인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창업을 고민하던 시기 ‘아시아 대학생 창업 교류전’에 한국 대표로 나갈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중국 대학생들이 ’15억 중국 인구 중에서 약 1억명이 가난한 삶을 살고 있다’면서 ‘졸업 후 가난한 이들의 자립을 돕겠다’고 하더군요. 그들의 비전이 제 가슴을 울렸습니다.”
그때부터였다. 임 대표는 무작정 보육원·양로원·결손 가정·다문화 여성·장애인 등 포항에서 가장 소외된 이웃들을 찾아다녔다. 6개월간 매일 100여명을 만났다.
한 정신장애인과 만나 답을 찾았다. “뭘 할지 고민하던 제게 21세 때 정신분열증을 앓아 인생의 바닥까지 내려갔던 이야기를 하시면서 ‘잘할 수 있다’는 격려를 해주셨어요. 정신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완전히 깨졌습니다. 이분들이 일할 수 있다,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장애인이 주인공인 회사
2008년 9월 ‘㈜향기내는 사람들’을 설립한 임 대표는 정신장애인들과 같이 일하려면 ‘커피’ 사업이 적당하다고 봤다. 학력 등 스펙 없는 사람도 배울 수 있는 기술이면서 일하면서 대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서비스업이기 때문이다.
가진 것도, 아는 것도 없는 25살 청년은 전국의 유명 바리스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무작정 찾아가 배웠다. 모교인 한동대 총장, 부총장, 교수님들을 설득해 한동대 건물 안에 10평 남짓한 공간을 지원받았다.
하지만 초기 운영자금이 문제였다. 다시 무작정 포스코 본사를 찾아 사업계획서를 내밀었다. 거절당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매달 사업 계획서를 보완해 들고 포스코를 찾았다. 6개월 후 포스코 담당자가 지원금 5000만원을 줬다.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돈이었다. 직접 벽돌을 나르고 시멘트를 발라 커피숍을 만들었다.
또 면접을 통해 정신장애인 직원 4명을 선발했다. 세계 바리스타 챔피언십 심사위원이자 우리나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포항의 한 유명 바리스타를 교육 강사로 모셨다. 장애인들이 내린 커피 맛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1호점 오픈 1년 반만에 직원 수가 10명으로 늘었다.
“사람들과 눈도 못 마주치던 분들이 고객과 이야기하며 커피를 만들고, 신경정신과 의사 분들이 ‘기적’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일에 집중했습니다. 더 많은 분이 이런 변화를 경험할 수 있도록 2호, 3호점을 차근차근 준비해갔습니다.”
히즈빈스에 취업한 이들은 모두 3개월 동안 7단계 교육을 받는다. 가장 중요한 첫 단계는 동기 부여 교육이다. 바리스타를 통해 각자 이루고 싶은 꿈을 함께 그려본다. 다음 직업 서비스 이해 및 예절 교육, 바리스타 이론 교육, 단계별 실습 시험을 거친다. 장애인이 직업인 생활인으로 변신하는 과정이다.
사업장이 8개까지 늘어났다. 요즘은 ‘히즈빈스 바리스타 챔피언십’을 연다. 지점별로 대표 바리스타가 나와서 커피 맛 대결을 벌인다. 승리는 성과급과 승진으로 이어진다. 대표 자리를 따내기 위해서 직원들이 스스로 공부한다.
승진 시스템도 체계화했다. 매년 엄격한 테스트를 거쳐 수습·주임·선임·수석 바리스타·매니저로 승격한다. 직원들 중엔 매니저를 하다가 창업을 준비하는 정신장애인도 있고, 대학에 입학한 수석 바리스타도 있다.
◇전문가 그룹의 다각적 지지 시스템… 자립 가능성 높여
전체 취업 장애인 중 정신장애인의 고용률은 단 6%(한국장애인고용공단 자료, 2014년 기준). 이에 반해 히즈빈스의 정신장애인 고용률은 54%다. 이들의 평균 근속 기간이 3년 이상인 것은 작은 기적이다. 임 대표는 “지역의 다양한 전문가가 정신장애인들의 지지자가 되는 네트워크 시스템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임 대표는 정신장애인 1명을 전문가 7인이 도와주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의사·사회복지사·카페 바리스타 및 매니저·교수·히즈빈스 대표·대학생 서포터스가 장애인 직원들을 돕는 매칭 시스템이다. 모두 자원봉사다.
각 지점의 카페 매니저는 매일 퇴근 전 그날 일한 정신장애인의 업무, 증상, 관계 등에 대한 일지를 써서 이 7명에게 메일을 보낸다. 메일을 받은 전문가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해당 직원에게 실시간 증상에 대한 조언, 상담, 치료 등을 진행한다.
한동대학교와 연계해 매 학기 대학생 30명이 히즈빈스 장애인과 ‘짝꿍’을 맺고, 서포터스로서 장애 인식 개선과 홍보 활동도 한다. 지금까지 대학생 서포터스 150명이 히즈빈스와 인연을 맺었다.
“아기가 걸음마를 떼려면 부모의 지지가 필요하듯, 몇십년 만에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 정신장애인 분들께도 격려와 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신장애인 한 명이 지역 안에서 10년, 20년을 자립하며 성장할 수 있는 모델을 만들기 위해서는 다양한 네트워크가 협력하는 모델이 필요합니다.”
히즈빈즈의 운영방침과 시스템은 세상과 맞설 용기가 없던 정신장애인들에게 용기를 불어 넣었다. 20년 동안 정신분열증을 앓았던 9년 차 바리스타 김철민(가명)씨는 “망상과 싸우며 세상이 무서워 집 밖을 나가질 못했다”면서 “히즈빈스에서 ‘환자’가 아니라 ‘선생님’으로 불리면서 자존감이 높아졌고, 나를 믿어주고 응원하는 많은 분을 떠올리며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어금니를 물고 정신을 차렸다”고 말했다.
물론 순탄한 길만 걸어온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1호점을 연 지 몇 달 만에 정신장애 증상을 호소하는 직원들이 속출했다. ‘우울해, 집 밖에 나오고 싶지 않다’ ‘레시피가 어렵고 부담이 커 출근 못 하겠다’ ‘다시 병원에 입원하고 싶다’. 증상과 반응도 다양했다.
서로의 꿈을 응원하는 히즈빈스 사내 문화가 이런 직원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역할을 한다. 박승빈(30) 히즈빈스 1호점 매니저는 “직원들이 시집을 내는 게 꿈인 한 바리스타를 위해서 그 분이 20년간 오래된 종이에 써온 시를 모두 모아서 워드로 작성해 시집을 출판했다”고 했다.
또 “결혼이 오랜 소원이던 한 바리스타는 히즈빈스에서 일하면서 여자 친구가 생겼는데, 직원들이 플래시몹 프러포즈 이벤트를 해 3개월 뒤 결혼에 골인한하기도 했다”고 소개했다.
◇돈보다 사람 키우는 CEO
“매장이 8개라면 부자인 줄 오해하시더라고요. 히즈빈스를 설립하면서 직원 월급을 아래부터 채워주자는 원칙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6개월 넘게 대표 월급을 받지 못한 때도 있었죠. 바리스타 선생님들이 최우선 순위입니다.”
히즈빈스는 채용 때마다 경쟁률이 5대1을 훌쩍 넘는다. 또 고용 기회를 기다리는 다른 정신장애인들을 위해 수익은 모두 매장을 늘리는 데 재투자 한다. ‘경영학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구조’다.
중앙 정부 지원금은 받지 않는다. 사회적기업으로 전환하면 인건비·임차료 등 비용을 지원받을 수 있지만 법인 형태를 바꿀 생각은 없다. “지원금 없이도 살아남을 수 있는 수익 구조를 만들어야 지속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대신 커피 원두·빵·쿠키를 만드는 공장을 설립해 마진을 줄이고, 시청·학교 등으로부터 일정 기간 공간을 지원받았다. 임대료를 줄여 재정 자립도를 높인 것이다.
현재 히즈빈스 중앙아트홀점과 동빛나루점은 포항시청의 지원으로 운영 중이다. 기업의 장애인 의무 고용 부담을 덜어주는 동시에 정신장애인의 고용을 확대하는 방법도 활용하고 있다.
상시 50인 이상 근로자를 고용하는 사업주는 직원의 2.5%를 장애인으로 고용해야 한다. 이를 어길 때는 부담금을 내야 한다. 지난해 기업들이 낸 장애인 고용 부담금은 3261억원에 달한다.
임 대표는 이런 제도를 거꾸로 이용해 사업을 확장한다는 아이디어를 냈다. 기업이나 기관 구내에 히즈빈스를 만들어 운영한다는 것이다. 관리는 히즈빈스가 하지만 실제 고용주는 기업, 기관이다.
예를 들어 직원 수가 1000명에 달하는 세명기독병원은 히즈빈스를 유치해 장애인을 고용했다. 임 대표는 히즈빈스 세명기독병원점을 관리 운영하는 대가로 매출액의 5%를 받는다.
세명기독병원은 이미지 개선뿐만 아니라 부담금을 약 2억원 줄였다. 지난해 8월엔 부천 예손병원 1층에 첫 경기지역점을 냈다. 부천 시청, 병원, 사회복지기관 등을 누비며 7개월간 다각적 지지 시스템을 구축해 놓은 것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
◇전국을 넘어 전세계로…한국 대표 정신장애인 자립 모델로 우뚝
이제 히즈빈스는 세계 정신장애인 재활 모델로 부상중이다. 지난해 11월, 45개국 정신보건 전문가들이 서울에 모인 ‘제 12회 세계정신사회재활협회 세계학술대회’에서 히즈빈스는 한국의 대표 정신장애인 자립 모델 사례로 소개됐다.
이날 히즈빈스 5년 차 바리스타 최인모(가명·52)씨는 직접 무대에 올라 히즈빈스의 사례를 발표했다. 정신분열증으로 한 때 수없이 자살 시도를 했던 최씨는 히즈빈스를 만나기 전후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진솔하게 풀어냈다.
커피를 배우면서 자연스레 쌓은 영어 실력도 유감없이 뽐냈다. 임 대표는 “직접 영어 대본을 쓰고, 본사 직원에게 영어 발음 녹음을 부탁하더니 한 달 내내 밤낮없이 연습하더라”면서 “히즈빈스의 주인공은 정신장애인들임을 세계에 보여줬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실제 대회가 끝난 직후 홍콩대 정신보건학 교수는 바로 KTX를 타고 히즈빈스를 직접 보기 위해 포항을 찾았을 정도로 전 세계 정신재활 전문가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히즈빈스는 오는 4월 안양샘병원에 서울, 경기 지역 2호점을 개업할 예정이다. 안팎에선 기대가 크다. 지난해 8월 오픈한 부천 예손병원점이 6개월만에 월 매출 1400만원을 달성했기 때문이다.
임 대표는 “히즈빈스 이야기가 입소문이 나면서 장애인 의무고용률 달성을 고민하던 곳들이 먼저 연락을 준다”며 “현재 수도권 대학, 병원, 증권사가 매장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