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고민주공화국
지난 2월 17일(현지 시각) 탄자니아 카술루 지역의 냐루구수 난민촌에서 난민들이 생필품을 배급받기 위해 모여들고 있다. /탄자니아=김소희 해외통신원
[르포] 민주콩고 아이들 “난민촌 바깥 세상 보고 싶어요”

‘자원의 저주’ 민주콩고, 수십년째 내전 중난민 700만명,우간다·탄자니아 국경으로냐루구수 난민촌에만 1만3000명 정착 “집에 갑자기 들이닥친 정부 반군의 공격으로 할머니를 잃었습니다. 저 또한 한 팔을 잃고 불구가 됐어요. 국경을 넘는 과정에 군인에게 강간도 당했습니다. 저의 삶은 끔찍하고 고통스럽습니다.” 지난 2월17일 탄자니아 카술루 지역의 냐루구수(Nyarugusu) 난민촌을 방문한 기자에게 콩고민주공화국(DRC·이하 민주콩고) 북키부(North Kivu) 지역 출신의 무브와 나미가베 노엘라(18)씨는 말했다. 그는 지난 2021년 12월 27일 크리스마스 시즌의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정부 반군의 가택 습격으로 유일한 보호자였던 할머니를 잃었다. 이듬해 8월 정부군과 반군간 갈등이 고조되면서 마을은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노엘라씨는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피난길은 험난했고 고단했다. 길가에서 오토바이를 얻어타고 하루를 꼬박 걸려 우간다 국경에 도착했지만, 그들을 기다리는 건 군인들이었다. 군인들은 여성인 노엘라씨에게 국경을 넘는 조건으로 성관계를 요구했다. 남성 오토바이 운전수는 그 자리에서 사살됐다. 우여곡절 끝에 우간다에 이어 탄자니아 국경을 넘었고 지난해 이곳에서 난민으로 인정 받았다.  노엘라씨는 “고향 사람들이 나를 계속해서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최대한 먼 곳으로 도망쳐오고 싶었다”면서 “난민촌에 가족도 없이 혼자 머무르고 있어 하루하루가 불안하고 언젠가 고향 사람들이 이곳에 넘어와 해코지할까봐 두렵다”고 말했다. 냐루구수 난민촌, 1996년 설립 이후 매년 난민 유입 더나은미래는 지난 2월 15일(현지 시각) 노엘라씨와 같은 민주콩고 내전 피해자들의 증언을 듣기 위해 세계적 인도주의 기구인 국제구조위원회(IRC)의 도움을 받아 냐루구수 난민촌을 찾았다. 2박3일간 머물며 민주콩고를 떠나온 이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냐루구수 난민촌은 1996년 설립

[우리 옆집 난민 ②] “고국땅에서 못 이룬 법학 교수 꿈, 한국에서 이루고 싶습니다”

마퓨타 피오피오 프레디(45)는 경계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기자가 악수를 청하자, 잠시 망설이더니 조심스레 손을 잡았다. “그동안 기자들을 여럿 만났는데, 다들 심문하듯 꼬치꼬치 캐물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사람을 대하다니….”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난민이다. 고향땅 콩고민주공화국을 떠나 한국에 온 건 2006년. 콩고 최고 명문인 킨샤사대 법학과 2학년을 다니고 있을 때였다. “당시 콩고는 정치적으로 혼란기였어요. 지식인으로서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죠.” 그는 장기 집권 세력에 반대하던 콩고자유운동(MLC)에 가담했다가 쫓기는 신세가 됐다. 법학 교수를 꿈꾸며 착실히 공부하던 모범생이 하루아침에 정치범이 된 것이다. 기약 없이 숨어지내던 그는 결국 고국을 떠나기로 했다. “한국으로 가겠다고 선택한 게 아니었습니다. 주선자가 건네준 비행기표의 목적지가 한국이었을 뿐이죠.” 바다 건너 낯선 땅에 오니,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온 법학 지식은 아무 쓸모가 없었다. 난민 신청자가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그저 하루빨리 난민으로 인정받기를 기도하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당장 먹고사는 것도 문제였다. 어릴 적부터 그냥저냥 연주해온 젬베(아프리카 전통 타악기)가 밥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과 공연팀을 만들었다. 대학 축제 등을 돌며 젬베 연주를 했다. 난민지원 비영리단체 ‘피난처’는 그에게 큰 힘이 됐다. 그는 “피난처가 없었다면, 버티기가 힘들었을 것”이라며 “난민에게 무엇보다 힘이 되고 필요한 존재가 바로 ‘피난처’ 같은 비영리단체들”이라고 말했다. 12년을 기다린 끝에 그는 지난 2월 13일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다. “난민 인정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심정은…말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잠시 먼

“살아남기 위해 모였고, 끈끈한 신뢰 바탕으로 자립했죠”

콩고 난민 공동체 협동조합 아프리카 대륙의 정중앙에 위치한 234만㎢의 광대한 땅, 콩고민주공화국(이하 콩고). ‘아프리카의 심장’이라 불리는 이 땅엔 상처가 가득하다. 15년 동안 이어진 내전으로 500만명에 달하는 주민이 폭력단체에 의해 살해당했고, 콩고 동부에서만 20만명의 여성이 강간을 당했으며, 자국을 탈출한 난민이 50만명을 넘어섰다. 레베카(가명·36)씨도 2004년 전쟁터로 변한 콩고를 뒤로 하며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레베카씨처럼 콩고에서 피난 온 이들은 함께 모여 콩고 커뮤니티를 이뤘다. 그러나 콩고 커뮤니티에 속한 20명 중 난민 인정을 받은 인원은 고작 5명에 불과했다. 한국 땅에서 함께 살아남기 위해서는 ‘콩고 커뮤니티’만의 경제적 자립 모델이 필요했다. 특히 지난 2008년 ‘콩고 커뮤니티’ 회원 중 한 명이 공사장에서 작업 중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러한 필요를 절실히 느꼈다. 장례를 치르고, 시신을 콩고로 보내기 위해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지만, ‘콩고 커뮤니티’가 경제적으로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부나 다른 기관으로부터 지원받을 방법도 없었다. 그날 이후 이들은 지속가능한 운영 방법을 모색하며 머리를 맞댔다. 조직도를 만들고, 공동체 규약을 정했다. ‘매월 1만원 이상의 회비를 낼 것’ ‘한 달에 한 번 가지는 모임에 반드시 참석할 것’ ‘커뮤니티 내에선 정치적 발언을 삼갈 것’ 등이 그 내용이다. 회비를 통해 모인 금액은 응급 상황이 발생한 이들에게 보증 없이, 이자 없이 빌려준다. 이 덕분에 보증금이 없어 월세 방에서 쫓겨난 회원이 ‘콩고 커뮤니티’의 도움으로 지낼 곳을 마련할 수 있었고, 갑작스런 사고로 병원에 입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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