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따뜻한 봉사에 중독… 12년간 빠지지 않은 이유죠”

굴착기 데몬스트레이터 이정달씨 매년 빼놓지 않고 해비타트 봉사 참여해 집 없는 저소득층 가족에 따뜻한 보금자리 마련 고마워하는 주민 보며 나눔의 묘미 느껴 17세 딸도 함께 참여 이정달(45·볼보건설기계코리아)씨는 국내 유일의 ‘굴착기 데몬스트레이터’다. 굴착기를 판매하기 전 고객들에게 흥미로운 방법으로 장비 시연을 하는 것이 그의 일이다. 굴착기로 붓글씨를 쓰고, 와인도 따른다. 2008년에는 하이서울페스티벌에서 국립오페라단 발레리노들과 함께 ‘몬스터 발레’ 공연도 선보였다. ‘굴착기 달인’인 그는 12년째 여름휴가를 반납하고 해비타트 봉사에 참여해 ‘집짓기 달인’이 되었다. 2001년, 이씨는 회사의 사회공헌 활동으로 처음 집짓기 봉사에 참여했다. 봉사활동에 참여하다 보니 실제 일에도 도움이 됐다. 다른 부서 사람들과도 친해지면서 전체적인 업무를 이해하기도 쉽고, 업무 협조가 편하다는 것이다. 임직원 80~100명 정도가 매년 집짓기 행사에 참여하지만, 12년째 한 번도 빼놓지 않고 봉사활동을 하는 이는 이씨뿐이다. 올해도 7월 30일부터 8월 3일까지 강원도 춘천에 다녀왔다. 여름휴가 대신 그가 다녀온 곳은 진주, 경산, 대전, 춘천, 아산, 군산, 천안 등 전국 방방곡곡에 퍼져 있다. “해비타트에선 매년 4월부터 기초공사를 시작해 10월까지 공사가 진행되는데, 기초공사가 끝난 8월쯤에는 자원봉사자들도 벽체를 세우거나 톱질, 망치질을 할 수 있어요. 아침 8시부터 시작해 오후 5시까지 꼬박 땀을 흘려야 해요. 막상 일을 시작하면 덥고 힘들어서 아무 생각이 안 나요. 할 때는 이게 뿌듯한 일인지 몰라요.” ‘집짓기 봉사’에선 경험으로 다져진 노하우가 중요하다. 합판 같은 자재도 전문가가 한 장을 쓸 때, 초보자는 한 장 반을 사용하기

친생부모 동의후 가정법원 허가 받아야 입양 가능

허남순 교수 인터뷰 미혼모 출생신고해도 아이를 입양 보내면 아예 흔적 남지않아 양쪽부모 알고 지내는 개방입양이 세계추세 입양, 특히 해외 입양은 우리나라에서 늘 동전의 양면 같았다. 해외 입양인의 눈물겨운 성공스토리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면서도, 연간 1000여명의 아이가 해외로 입양된다는 부끄러운 이면은 애써 외면했다. 지난 8월 5일부터 시행된 개정 입양 특례법으로 우리나라는 입양 문화 ‘후진국’을 벗어날 수 있을까. 허남순(64) 한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를 통해 달라진 입양 특례법의 취지와 의미, 방향이 무엇인지 들어봤다. ―이번에 개정된 입양 특례법의 취지와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나라에서는 그동안 입양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때문에 비밀 입양이 대부분이었다. 또 입양 부모를 중심으로 입양이 이뤄지다 보니, 입양 아동의 권리나 복지가 소홀히 다뤄진 측면이 있었다. 입양 부모에 대한 범죄 조회도 부족했고, 입양 부모가 이혼하거나 입양 아동과 갈등을 빚으면 쉽게 관계를 끊어 졸지에 고아가 돼버리는 사례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친생부모의 동의를 받아서 가정법원의 허가를 통해 입양이 이뤄진다. 친생부모와 아이의 법적 관계는 완전히 종료된다. 입양 아동과 입양 부모 모두 법적인 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와 함께 미혼모에게 아이를 출생한 후 일주일 동안 숙려기간을 두고 입양 동의서를 쓰도록 했다. 미혼모가 아이를 직접 키우면 어떤 경제적 지원제도가 있는지 충분히 설명하고, 고민할 시간을 갖게 하는 것이다. 선진국에서는 대부분 이 방향으로 가고 있다.” ―우리는 아직 비밀 입양을 선호하는 반면 선진국은 입양에 대해 훨씬 관대한 문화다. 현실을 앞서가는 법 아니냐는 지적이

[양준혁 야구재단] “글러브 없어 야구 못할 뻔한 유년시절 생각나… 꾸준히 도울 것”

지난 5월 야구재단 설립 야구 봉사 약속 지켜야구는 희생과 협동 그리고 배려의 스포츠어려운 환경 아이들 이승엽·박찬호보다 더 큰 인물들로 키우고파기업과 사회의 참여 필요 스포츠선수 중에는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낸 사람들이 많다. 브라질의 전설적인 축구선수 호나우두는 부잣집 아들이 콜라와 감자칩을 사준다고 해서 축구를 시작했고, 도미니카공화국 출신으로 미 메이저리그의 유명 야구선수가 된 새미 소사는 야구배트와 미트가 없어서 스틱과 빨래판으로 야구를 해야 했다.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 축구에 대한 꿈을 포기했지만 결국 대한민국 마라톤 역사를 다시 쓴 이봉주 선수도 그렇다. 당시 이 아이들이 세계적인 스타급 스포츠선수가 되리라고 누가 상상했을까. 지난 7일, 전(前) 프로야구 양준혁 선수가 전남 강진의 ‘산내들 지역아동센터’의 피해복구를 위해 자원봉사를 나섰다. 태풍 ‘볼라벤’으로 큰 피해를 입은 지역을 돕기 위해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이 마련한 봉사다. 휘어진 철제와 깨진 유리조각, 뜯겨나간 전기선이 엉켜있는 위태로운 현장에서도 그는 특유의 듬직함을 잃지 않았다. 양 선수는 지난해 5월 ‘양준혁 야구재단’을 정식으로 출범시키며, 본격적으로 사회공헌 활동에 뛰어들었다. “제가 굉장히 가난하게 자랐어요. 글러브 때문에 야구도 못할 뻔했어요. 선수 시절엔 어려운 환경 속에 있으면서 도움을 거의 못 받았기 때문에, 나중에 은퇴하면 형편이 어려운 애들을 도와야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선수 시절부터 구상을 했던 일이지만, 쉽지만은 않았다. 법적인 절차를 준비하는 문제와 재정적인 부분에 특히 애를 먹었다. 준비하는 데만 8개월 정도 걸렸다. 양 이사장은 “어려움을 하나씩 풀어나간다는 생각을 가지고 차근차근 준비했다”고 회상했다. 재단은 무슨 활동을 할까. 양

“장애인만을 위한 보조기구? 그 편견부터 깨라”

제리 와이즈만 보조공학협회장 인터뷰 고령화 시대 접어들면서 보조공학 필요성 높아져 장애·비장애 구분 없는 디자인이 대세 될 것 장애를 바라보는 편견 그 장벽을 무너뜨릴 때 보조공학의 미래는 밝아 “안경은 시력 보조기구지만, 보조기구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패션의 일부로 여긴다. 좋은 브랜드가 붙으면 고가를 지불하기도 한다. 휠체어나 보청기에도 적용되지 말란 법이 없다. ‘페라리’가 휠체어를 만든다고 상상해보라. 모두가 탐내고, 타는 것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을까.” 제리 와이즈만(Jerry Weisman) 북미 재활·보조공학협회장의 말이다. 그는 버몬트 기술대학에서 재활공학기술 프로그램을 가르치는 등 평생을 재활 엔지니어의 분야에 바친 대가다. 지난 8월 30일, ‘2012 국제 보조공학 심포지엄’의 기조연설을 위해 일산 킨텍스를 찾은 그를 만나, 선진국의 보조공학 기술에 대한 트렌드를 들어봤다. -앞으로 보조공학 기술이 점점 더 중요해질 것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먼저 의료기술이 발전했다. 과거에는 생명을 위협했던 질병을 극복하는 대신, 장애나 기능적인 제약을 안고 사는 사람이 많아졌다. 또 고령화로 청력이나 시력에 문제가 생긴 이들이 보조공학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20세기 초 47세였던 평균수명은 오늘날 75세가 됐다.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전쟁으로 장애를 입는 군인들도 계속 발생하고 있다. 이 때문에 장애인을 위한 특별한 디자인이 아닌, 모두에게 유용한 ‘보편적인 디자인’이 주목받고 있다. 방문의 원형 손잡이를, 누르는 ‘레버형’으로 바꾼다고 해보자. 비장애인들도 손이 자유롭지 못할 때 이를 유용하게 쓸 수 있다. 휠체어를 위해 만든 경사로 덕분에 일반인도 캐리어를 쉽게 이용할 수 있지 않나.” -한국은 보조기구와 관련된

[나눔의 리더를 찾아서] ⑦ 김성수 강화군 우리마을 촌장

장애인 대우하는 나라가 진짜 민주주의, 복 받은 나라 서울에서 차로 1시간을 달렸을 뿐인데, 시야가 탁 트였다. 고층빌딩이 없고, 자동차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도심에선 짜증을 불러오던 뜨거운 여름 볕이 이상하리만치 싫지 않은 곳,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에 위치한 ‘우리마을’이다. 이곳은 지적장애인 50여명의 직업재활시설이다. 김성수(82) 전 대한성공회 대주교는 성공회대 총장을 그만두고 2009년부터 부인 후리다(80) 여사와 함께 여기서 산다. 직함은 ‘우리마을 촌장’.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모두 기증해 ‘우리마을’을 지은 김 주교는, 말 그대로 ‘버리고 가는 삶’을 살고 있었다. ―물려받은 땅 2000여평을 기증해, 2000년 ‘우리마을’을 짓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지적장애인 학교인 ‘성베드로학교’ 졸업식에 갔는데, 졸업생을 불러도 애들이 안 나와요. 졸업을 해도 막상 일할 곳이 없어서 그렇다는 걸 알게 됐죠. 건립자금을 마련하려고 처음에는 성공회 성당 마당에서 커피 장사를 했는데 주변 상인들이 반대가 너무 심했어요. 아버지가 준 땅을 내놓기로 했어요. 당시 손학규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근로시설을 지어서 얘들 먹고살게 만들어줍시다’ 했는데, 배포 크게 도움을 줬어요. 처음에는 3년만 가르치면 자립해서 이곳을 나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못 나가는 거예요.”(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지적장애인들에게 기술을 가르쳐도, 이들을 받아줄 기업은 거의 없었다. ‘우리마을’의 장애인들은 콩나물 재배와 전기부품 조립 등을 통해 적게는 10만원부터 많게는 80만원대까지 월급을 받는다.) ―콩나물 공장을 통해 수익사업을 하고 계시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장애인 작업현장은 정말 열악해요. 우리는 꽉 짜인 틀에 맞추기보다 자유롭고 정서적인 면을 고려한 1차산업을 하기로 했죠.

5년간 7000명 아동 후원… 인도네시아 어린이날 노래 보급

박동철 굿네이버스 인도네시아 지부장 아동 권리교육에 역점 둬 거리 캠페인 벌이고 어린이날 행사 열어 현지 자원봉사자 늘어 식수 파이프 설치하고 화장실 개·보수 나서 지난 7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남부의 고르 라구난(Gor Ragunan) 지역에서 특별한 기념행사가 열렸다. 7월 23일 인도네시아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굿네이버스 인도네시아 지부가 주최한 기자회견이 바로 그것이었다. 회견에는 정부 아동복지 담당자, 인도네시아 시민단체 직원, 대학교수 등 전문가를 초청했다. 이 자리에는 6000여명의 인도네시아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가 공개됐다. 아동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바로 ‘무상교육’, 가장 원하지 않는 것은 ‘마약과 성매매’였다.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동현장에 내몰리거나, 가난으로 적절한 교육을 받지 못하는 인도네시아 아동들의 현 상황을 보여주는 결과였다. 굿네이버스 인도네시아 지부가 설립된 것은 지난 2008년. 박동철 지부장은 “지역사회가 제대로 개발되기 위해서는 지역주민이 스스로 개발의 주체가 되어야 하듯, 아동권리의 주체는 아동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다양한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도네시아 아이들이 모일 때마다 부르는 ‘인도네시아 어린이날 노래’를 만들어 보급한 게 대표적인 예. 박 지부장은 “인도네시아의 어린이날은 그동안 유명무실했는데, 아동들이 당연히 누려야 하는 권리의 중요함을 알리기 위해 어린이날 노래를 만들고, 어린이날 행사를 열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인도네시아 지역개발사업장 내에서도 다양한 아동권리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특히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UN 아동권리협약(Convention on the Rights of the Child, CRC)을 바탕으로 게임과 교육을 실시하고, 지역주민과 정부 관계자를 초청해 세미나와 전시회, 거리 캠페인 등을 실시했다. 박동철 지부장은 “작년 한 해

어릴적 빛을 잃은 시각장애인 소년 세계적인 음악가 되어 희망 전파한다

이상재 교수 인터뷰 미국 피바디 음대박사 재능 기부하고 싶어서 시각장애인들 모아 체임버 오케스트라 운영 연간 100회 이상 공연 “악기 부는 재주 하나로 남에게 도움돼 기뻐” 술래잡기를 하다 차에 치인 소년은 그 길로 빛을 잃었다. 3년 동안 9번의 수술을 해봤지만 허사였다. 앞이 보이지 않는 소년이 기댈 곳은 음악뿐이었다. 쓸쓸한 소리가 좋아 고른 악기는 ‘클라리넷’. 음악은 취미로만 하라던 부모님의 반대에 이틀을 굶으며 버텼던 소년은 미국 3대 음대 중 하나인 피바디(PEABODY) 음대 140년 역사상 최초의 장애인 박사학위 수여자가 됐다. 이상재 한국나사렛대 관현악과 교수는 몸값 높은 연주자가 된 지금도 오케스트라 운영, 재능 나눔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오는 9월 2일에는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이 주최하는 ‘나눔음악회’에 초청 연주자로 나서, 재능 기부를 할 예정이다. ―교통사고로 인해 갑자기 시력을 잃었는데, 어떻게 음악을 하게 되었나요. “일곱 살 되던 해, 동네 형들하고 술래잡기하다가 차에 치였습니다. 몇 미터를 날아갔대요. 발목은 부스러졌고 머리도 많이 다쳤죠. 처음엔 눈은 다친 줄은 몰랐는데, 나중에 병원에 갔더니 사고 충격 때문에 망막이 손상됐대요. 3년 동안 수술을 9번 받았는데 다 실패하고 열 살 때 완전히 실명했어요. 지금은 불빛도 감지가 안 돼요. 시력을 잃은 이후 초등학교 4학년 때 바이올린을 처음 시작했고, 중학교 1학년 때부터 클라리넷을 했어요. 클라리넷의 어원은 ‘클리어(Clear)’예요. 가을바람처럼 맑은소리를 내요. 그런데 소박하고 쓸쓸한 느낌도 있거든요. 시각장애인이 돼서 힘들고 어려운 시절, 강한 바이올린 소리보다 제 마음을 더

“여성 과학자여, 일이든 육아든 그대가 행복한 일 하세요”

로레알 여성생명과학상 수상자 이공주 이화여대 교수 20년전 남성중심의 과학계 여성 과학자 1300명 모아 ‘여성과학기술인회’ 만들어 작년엔 세계여성과학자 회장으로 선임돼 활동… 여성 과학자 위해 팔 걷어 “나이 먹어도 열심히 일하는 게 좋겠구나, 하는 걸 젊은 사람들한테 보여줄 수 있어서 기쁘네요.” 이공주(57) 이화여대 바이오융합과학과 교수는 올해 11년째인 ‘한국 로레알-유네스코 여성생명과학상’ 학술진흥상 수상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분초를 쪼개서 생활해온 습관 때문인지, 말이 빠르고 정확했다. 이 교수는 현재 직함만 여러 개다. 이화여대 대학원장, 세계여성과학기술인네트워크(INWES) 회장, 한국세포·분자생물학회 부회장, 교육과학기술부 기초연구사업 추진위원회 위원 등이다. 이 교수는 프로테오믹스(단백질 분석기술) 세계적인 권위자다. 암 전이, 스트레스 반응에 관여하는 중요 단백질의 기능을 연구해왔다. 그녀의 지론은 “과학이 발전하려면, 한두 명의 천재가 아니라 그들을 키우고 응원하는 사회 분위기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 사회에서 아직 소수자인 여성 과학자들을 위한 네트워크 활동을 중요시한다. 이화여대 약대와 카이스트 생화학 석사학위를 받은 이 교수는 애초 보건사회부(현재 보건복지부)에서 일하려고 했다. 하지만 당시 카이스트 남자 졸업생에게는 행정고시에 준하는 3급을 줬지만, 여성에게는 그 기회가 없었다고 한다. 결국 미국 스탠퍼드대로 유학을 떠났고 연구자의 길에 들어섰다. 귀국 후 첫 직장은 대전의 한국표준과학연구원. 대덕의 수많은 정부 출연기관 연구원 200명 중 여성은 서너 명에 불과한 시절이었다. 이 교수는 “여성 연구원끼리 모임을 만들자”고 주도했고, 이것을 토대로 1993년 1300여명의 대한여성과학기술인회(KWSE)가 탄생했다. “외톨이처럼 살다가 모임을 만드니 너무 좋아했어요. 수위실에서 발기인대회를 했어요(웃음). 모임이 만들어지자 회장님이 처음 고위층이 하는

“장애는 장벽 안돼… 꿈 찾으러 세계로 갑니다”

장애청년드림팀, 6대륙 도전 4대1 높은 경쟁률 뚫은 500명에 해외 연수 기회… 국제사회 리더 성장 발판 장애 청년 70명이 꿈을 찾아 해외로 떠난다. 오는 8월 23일부터 8박9일 동안 이뤄질 ‘장애인청년드림팀, 6대륙에 도전하다’ 프로그램에 4대1의 경쟁률을 뚫고 선발된 청년들이다. 세상에 나가 도전하고, 꿈을 찾는 길에는 눈이 보이지 않거나 귀가 들리지 않는 것쯤은 장애가 되지 않는다. 출국을 한 달가량 앞둔 지난 7월 19일 장애청년드림팀에 선발된 청년 3명을 만났다. 이들은 6대륙 중 한 곳의 장애 관련 단체나 기관을 방문해 선진 복지제도를 공부하고 다양한 직업 체험을 하게 된다. 시각장애인 김장훈 페루에 복지제도 전파 목표 ◇시각장애 청년 김장훈 “한국 시각장애 복지를 페루에도 전파하고파” 두 살 때 사고로 한쪽 눈이 실명된 뒤로 시각장애 3급 판정을 받은 김장훈씨(22·고려대 미디어학부 2년). 김씨는 페루의 시각장애인재활센터와 재활병원을 방문하고, 지체장애를 가진 페루의 한 국회의원을 만나 인터뷰할 계획이다. 그는 “페루는 한국의 1970년대 의료 상황과 비슷하고, 저시력 관련 전문 단체도 아예 없다”며 “앞으로 페루처럼 장애인 빈곤이 심각한 나라에 한국의 시각장애 관련 정책과 복지제도를 전파하고 싶은 비전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2010년 시각장애인대학생연합회 회장이었던 김씨는 시각장애 고등학생을 위한 수험서와 대학 입학 전형 책자를 직접 만들기도 했다. 시각장애를 가진 대학생들을 불러모아 입시전형을 분석하고, 대학 생활 노하우를 정리해 담은 책이다. 김씨는 “작은 글씨로 인쇄된 입학 전형 책자들을 일일이 확대해서 봐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앞이 잘 보이지

발로 뛰어 2000명 후원자 확보… “한 생명 도울 수 있어요”

어린이재단 최고모금자 이전선씨 3년 전 상금 5백만원 한 아이 병원비로 기부 아이 인생 변화 보고 본격적으로 나눔 실천 사람 마음 얻기 위해 2~3시간 얘기하기도 식당서 자체 기부 캠페인 아내도 후원 뜻 같이해 좋은 일하며 가족애 끈끈 이전선(47)씨는 매일 흰색 조끼를 입고 전남 순천 일대 아파트 단지와 단독주택, 사무실 등을 가가호호 방문한다. 그는 자신이 직접 만든 ‘착한스펙 캠페인’ 내용이 담긴 A4용지 한 장을 건네주며 나눔을 권유한다. 작년 한 해 이씨가 발로 뛰면서 만든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후원자는 무려 1200명이다. 올해엔 지금까지 400여명의 후원자를 모았다. 이씨는 8개월 전만 해도 광양제철소 협력업체에서 인사노무를 맡았던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무의탁 노인들에게 매주 한 차례씩 도시락 배달을 하고, 회사의 봉사단 단장을 맡기도 했지만, 직접 NGO 단체에 돈을 후원한 적은 없었다. 6년 전 이씨는 두 딸의 이름으로 처음 어린이재단에 정기후원을 시작했다. “아이들 인성교육에 도움이 되고, 좋은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평범하던 그가 ‘나눔에 미친’ 계기는 무엇일까. “3년 전, ‘여수MBC 전남시민상’을 받았어요. 상금 500만원을 한 아이의 병원비로 기부했어요. 아버지는 암에 걸렸고, 엄마는 가출했고, 동생은 어릴 때 사고를 당해 뇌사상태, 언니만 정상적으로 성장한 가정이었어요. 동생 병원비를 못 내 쫓겨날 형편이었는데, 상금 덕분에 동생이 치료를 받았고, 이 내용이 방송에 알려지면서 돕는 손길도 많아졌어요. 언니는 서울의 명문사립대에 진학했고, 지금은 미국 유학 중입니다. 그 아이가 하고 싶은 일을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는

[나눔의 리더를 찾아서] ⑥ 세이브더칠드런 김노보 이사장

“내가 직접…” 참여형 캠페인 든든한 후원자 모집 비결이죠 적선하듯 돈 주던 사람들 정기후원자 한 명도 없어 길거리 캠페인 최초 시도 현재 15만명 270억 모금 ‘신생아살리기 모자뜨기’ 아내 잃은 남편이 뜨개질 해 보내는 등 감동적 사연 잇달아 한국NGO 해외원조 과제 한 지역 오래 지원해야 1919년 영국 런던의 트래펄가 광장에서 에글렌타인 젭이라는 여성이 전단지를 나눠주다 체포됐다. “굶주림을 물리치자”는 제목과 함께 기아에 시달리는 오스트리아 어린이의 사진을 담은 전단지 때문이었다. 적국을 이롭게 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며칠 뒤 열린 재판에서 그녀는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그 취지에 공감한 재판장은 단지 벌금 5파운드만 선고했다. 검찰은 이 5파운드를 기부했고, 이것이 ‘세이브더칠드런(Save the Children)’ 기금의 시작이다. 1953년 6·25전쟁 당시 한국지부를 세웠던 세이브더칠드런 코리아는 이제 원조를 주는 나라 30개 중 9위에 속한다. 지난해 12월 세이브더칠드런 이사장으로 취임한 김노보 이사장은 2004년 이후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한 세이브더칠드런 코리아의 토대를 닦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30년간 기업에서 일하시다 한국네슬레 상무로 퇴직한 후 2004년 세이브더칠드런에 합류하셨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으셨는지요. “당시 저는 심장병 어린이 치료지원을 하던 한국어린이보호재단의 후원자였습니다. 2003년 정년퇴직하고 쉬고 있는데, 2004년 무렵 전임 이사장님께서 세이브더칠드런과 한국어린이보호재단의 합병작업을 도와달라고 하셔서, 감사로 활동했습니다. 직원 수 10여명인 작은 조직이었는데, 6개월 정도 지켜보니 너무 허술했어요. 직원들한테 10명씩 할당을 주면서 아는 사람을 통해 후원을 부탁하는 식이었어요. 기업체에 제안서를 써가는 것도, 구걸하는 형태였어요. ‘평생 할 일인데 전문성을 키워야겠다’ 싶어서, 제가

[Cover Story] 히트 제조 디자이너, 나눔을 히트시키다

카이스트 사회공헌디자인연구소 배상민 교수 세계 디자인 무대서 최연소 교수로 이름날려 코닥 디지털카메라 등 만든 제품마다 ‘인기’ ‘접는 MP3 플레이어’ 애플 ‘아이팟’ 제치고 획기적 디자인으로 찬사 소비자, 포장 푼 뒤에야 나눔상품인지 알게 돼…그만큼 제품 질에 승부 8년째 수익금 전액 기부 저소득층 교육지원 쓰여 “살기좋은 마을 선물하러 이번엔 아프리카로 떠나요” 동양인 최초로 27세에 세계 3대 패션스쿨 중 하나인 뉴욕 파슨스 디자인스쿨의 최연소 교수로 강단에 선 디자이너가 있다. 그의 손을 거친 제품은 항상 ‘대박’이었다. 코닥의 디지털카메라가 그랬고, 3M의 포스트잇 패키징이 그러했다. 소비자의 요구를 정확히 파악한 그의 제품은 곧장 기업 매출 신장으로 이어졌다. 코카콜라·샤넬·가네보·랄프로렌·골드만삭스·JP모건 등 미국의 대표 기업들이 앞다퉈 제품과 기업 로고(CI) 디자인을 부탁했다. 하지만 그는 지난 2005년 13년간의 화려했던 뉴욕 생활을 정리하고 돌연 귀국, 카이스트(KAIST)에 ‘사회공헌디자인연구소’를 만들었다. 세계 최초로 ‘사회공헌디자인(Philanthropy Design)’ 개념을 만든 그는 기부 상품을 기획·디자인해, 수익금 전액을 저소득층 어린이들에게 기부하는 나눔 프로젝트를 8년째 지속해오고 있다. 궁금했다. 미국의 성공한 디자이너로 꼽히던 그가 ‘기부 상품’과 ‘사회공헌디자인’에 열중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17일 오후, 카이스트에서 배상민(40) 교수를 만났다. “상업 디자인을 하면서 ‘아름다운 폐품(廢品)’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본주의 시장에선 소비자가 첫눈에 매력을 느껴 구입하도록 만들고, 6개월이 지나면 싫증을 느끼도록 제품을 디자인해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디자이너라고 하죠. 제가 디자인한 상품이 광고에 나오고, 상을 받아도 전혀 기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 디자인이 사람들의 과소비를 조장하고, 환경 문제를

제262호 창간 14주년 특집

지속가능한 공익 생태계와 함께 걸어온 1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