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리더에게 리더십을 묻다_”일은 강하게, 사람에겐 부드럽게… 배려의 리더십 통하더군요”

박윤아 강남세브란스 외과 교수, “마음으로 다가가야 사람은 따라옵니다” 박기정 롯데백화점 이사, “지시가 아닌 부탁 조직을 움직이더라고요” 홍승현 검사, “나만의 전문성 키우고 조직문화 전반을 살펴야” 김주연 한국 P&G 상무, “멀티태스킹에 능한 여성 비즈니스도 두각 보이죠” 양진옥 굿네이버스 본부장, “사업마다 새로운 기획 일에 대한 열정은 필수” 김인희 서울발레시어터 단장, “자신의 일에 혼을 담아 열정적으로 행동하세요”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가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각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여성들이 늘어남에 따라 ‘여성 리더십’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여성 리더십은 권위적이고 강한 카리스마를 내세운 기존의 리더십과는 달리 감성적이고 구성원들을 배려하며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리더십 유형을 말한다. 여성의 날을 맞아 의학, 법조, 기업, 문화예술, 사회복지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젊은 여성 리더들을 만나 그들이 현장에서 배운 여성 리더십은 어떤 것인지 물었다. 편집자 주 여성 리더십이 기존의 리더십과 가장 다른 부분은 ‘부드러움’이 강조된다는 것이다. 지난해 오너 일가를 제외한 롯데그룹의 첫 여성임원이 된 롯데백화점의 박기정(47) 이사는 “여성 리더십은 부드러우면서도 당당한 힘을 가진 리더십”이라고 말했다. 박 이사는 디자인과 패션 기획에서 뛰어난 성과를 내왔다. “패션은 재단에서 포장까지 모든 분야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 하기 때문에 맨 아래 직급의 직원에게까지 우리가 하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자세히 설명했어요. 남성 리더들이 하듯이 ‘지시’하는 게 아니라 ‘부탁’하듯이 부드럽게 말했죠.” 여성으로서 20대에 실장, 30대에 부장과 이사가 되는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면서 박 이사는 어려움도 많이

엄마와 딸에게 ‘우리 사회 여성’을 묻다_”사회 진출 문턱 낮아졌지만 ‘직장 지키기 장벽’은 높아”

우리 땐 대학 나와도 바로 결혼 취업하더라도 공무원·교사였지… 진학·전공, 남녀 경계 없지만 출산·육아 생각하면 막막해요 오늘은 ‘세계 여성의 날’이다. 세계 여성의 날은 1908년 미국 여성 노동자들이 미성년자의 노동을 금지하고 여성에게 참정권을 달라고 시위한 것을 기념하여 만들어졌다. 유엔은 1975년, 3월 8일을 공식적인 ‘세계 여성의 날’로 지정했다. 전통적으로 남성을 우대하는 유교문화권에 속한 한국은 여권(女權) 신장의 속도가 서구 국가에 비해 더뎠다. 그러나 최근 변화가 사회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특히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는 추세다. 지난 30년 동안 한국 여성들의 사회 진출을 둘러싼 사회여건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이제 막 사회에 진출한 20대 딸과 스무 해 넘게 사회생활을 해온 50대 어머니를 만나 이들이 체감하는 과거와 현재 여성의 경제활동 여건의 변화를 들었다. 편집자 주 삼일절 오후. 딸 박예림(25)씨와 어머니 전연숙(53)씨를 신사동 가로수 길에서 만났다. 삼성엔지니어링에서 2년차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는 박씨와 경기도 평택시 공무원인 어머니 전씨는 “모녀가 여유롭게 ‘데이트’를 하는 건 참으로 오랜만”이라고 했다. 모녀는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일 얘기부터 시작했다. “제가 엔지니어로 하는 일은 국내외에서 수주를 받아 공장을 짓는 과정을 총괄하는 거예요. 한 프로젝트가 보통 1~3년씩 계속 되는데 그 기간 중에는 국내외 현장에 가서 살다시피 하죠.” 딸 박씨가 밝게 웃으며 자신이 하는 일을 소개했다.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가 늘어나면서 최근에는 여성이 하는 일과 남성이 하는 일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 이 때문에 박씨처럼 과거에는 남성의 영역으로만 여겨졌던 업종에

장애인 고용할당제 등 법·제도는 갖췄지만 사회구성원으로 인정해야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김형수 사무국장 인터뷰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의 김형수(36·사진) 사무국장은 1994년 6월, 대입에 ‘장애인 특별 전형’이 생긴다는 것을 들었다. 고3 생활을 하며 ‘차별받는 것은 나중의 문제고 일단 대학을 가야겠다’라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연세대학교 국문학과를 지망한 김 사무국장은 수능과 대학별 본고사, 면접까지 봤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장애인 특별 전형 제도가 정착되어 있지 않아서 동기들이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돌아온 날에야 겨우 합격 통지를 받았다. 대학 입학 후 학내의 장애인 문제와 교육권을 주제로 한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장애인 문제에 대한 사례를 접하면서 ‘장애인으로서 어떻게 하면 조금 더 능숙하게 사회생활을 할 수 있을지’ 노하우가 생겼다. 김 사무국장은 ‘이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물려줘야겠다’는 생각에 2000년 대학 졸업 후 ‘장애인편의시설촉진시민연대’에 들어가 장애인 학생들의 대학 입시와 구직 활동을 돕는 일을 했다. 2003년, 장애인편의시설촉진시민연대에서 독립해도 되겠다고 생각하고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를 정식으로 설립했다. 장애인 학생들을 도우면서 김 사무국장이 안타까울 때는 “장애인이라 어차피 대학 졸업해도 취업이 힘든데 그냥 기술을 배우는 것이 낫지 않느냐”라는 질문을 받을 때다.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하지 못하는 사람이 태반인 상황에서 장애인에게 고등교육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말이다. 김 사무국장은 “그런 말은 걱정으로 포장한 차별일 뿐”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 대졸 실업률이 50%에 달해도 대학을 가지 않고는 자아실현이 거의 불가능한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이라고 예외는 아니라는 것이다. 비장애인이 단지 취업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만나고 견문을 넓히기 위해서 대학에 가는 것처럼 장애인 역시 똑같은 이유로 대학에 간다는 말도

한 푼 두 푼 모아 더 어려운 이웃에 도시락 배달

사람 이야기 서울 용산동2가 언덕 위에 자리 잡은 ‘해방촌 성당’은 멀었다. 지하철 역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가다 결국 택시를 잡아탔다. 아슬아슬하게 약속 시간에 맞춰서 성당에 도착해 마침 앞마당에 계신 한 어르신께 “도시락 배달…”하고 말을 꺼냈다. “강당으로 가봐요. 이미 다 모였어.” 할머니는 지하로 난 계단을 가리켰다. 지하 강당에 들어서자 오늘 도시락 배달 봉사를 할 할머니 10여명이 보였다. 한쪽 구석엔 설 선물로 전달할 가래떡과 김이 봉투에 담겨 늘어서 있었다. 도시락 배달 봉사자 박무진(84)씨는 “설을 맞아 특별히 일주일 전부터 준비했다”라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20년 전부터 해방촌에서 살고 있는 김재흠(83)씨는 현옥분(78)씨와 짝을 이뤄 1년째 도시락 배달을 하고 있다. 그전에도 여러 봉사 활동을 했지만 이번 일은 특히 의미가 크다. 어떤 봉사보다 자신의 경험이 빛을 발하는 것 같아서다. “요리는 아무래도 연륜과 정성이 필요하다 보니 나이 든 우리가 젊은 사람들보다 더 잘할 것”이라고 말하는 김씨는 무엇보다 나물로 하는 밑반찬에 자신이 있다고 했다. 현씨 역시 도시락 배달을 하면서 건강이 더 좋아진 것 같다며 장점을 말했다. 지난 1년 동안 김씨와 함께 맡은 세 가구를 내 집 드나들 듯 다니며, 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하면 갖다 주고 사는 얘기도 나눴다. “우리 때는 다 같이 고생했잖아요. 그때 얘기를 하면 시간가는 줄 모르겠어요. 봉사활동을 시작하고서 바쁘게 움직이니깐 오히려 아픈 허리와 쑤신 몸이 나은 것 같기도 하고”라고 말하며 밝게 웃었다. 김씨와 현씨를 따라 성당을 나섰다. 성당에서

수익금 30% 기부… 남 도우니 기업도 성공

소망화장품 강석창 대표 소망화장품이 이윤의 30%를 기부하는 사회공헌으로 화제가 되고 있다. 서울시 양천구 목동에 위치한 소망화장품 본사에 있는 강석창(51) 대표의 방은 한쪽 벽면이 화장품 진열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소망화장품은 ‘꽃을든남자’, 한방화장품 ‘다나한’ 등을 선보인 국산 화장품 브랜드다. 소망화장품은 2010년부터 매해 이윤의 30%를 국제구호개발 NGO 기아대책에 기부하기로 했다. 이윤을 내는 것이 목적인 기업이 왜 이윤의 30%나 기부하게 됐냐고 묻자, 강 대표는 “소망화장품을 설립할 때부터 좋은 일을 하는 것이 기업의 목적이라고 생각했다”며 “정기적으로 기부를 하려면 항상 이익을 내는 초우량 회사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기부가 오히려 기업활동을 열심히 하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라며 웃음 띤 얼굴로 답했다. 이 회사가 처음 기부를 시작한 것은 1995년. 당시에는 매출액의 1%를 기부했었다. 매년 꾸준히 이어지던 기부는 사업 확장으로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잠깐 그 흐름이 끊길 뻔했다. 2004년 저가 화장품 가게들이 속속 들어서면서 소망화장품은 ‘뷰티크레딧’이라는 새로운 브랜드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회사의 재정이 나빠지면서 5년 정도 기부를 쉬었던 것이다. ‘다나한’이 성공을 거둔 2009년, 강 대표는 그동안 하지 못했던 5년치 기부를 한 번에 몰아서 했다. 23억7000만원이었다. 밀린 기부를 한 번에 하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약속한 것을 지켰을 뿐”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지금까지 소망화장품이 기부한 기부금은 국내외와 북한에서 빈곤 퇴치사업을 하는 데 쓰였다. 기아대책의 김성식 ‘생명지기’ 사무총장은 “내년부터는 소망화장품 기부금을 어려운 경제사정으로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무료로 진료하고 수술해주는 ‘생명지기’ 사업에

이정근 사람인 대표 “얼마 전 흑자전환 이뤘지만 사회공헌은 당연히 할 일”

후원자 모집 ‘배너 광고’수천만원 기부하는 셈 작년 1월 최악의 참사라 불린 아이티 지진이 일어났을 때, 채용정보 사이트 ‘사람인’의 홈페이지에는 기업의 구인광고 대신 아이티 어린이를 돕자는 배너가 내걸렸다.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한 구직자들이 찾는 사이트에서 ‘남을 돕자’는 호소가 효과가 있을까 싶었지만 반응은 뜨거웠다. 이처럼 사람인 홈페이지에 걸린 후원, 기부 참여 배너를 통해 2005년부터 지금까지 600명이 넘는 사람이 국제국호개발 NGO 굿네이버스의 정기후원자(월 1만원)로 등록했다. 사람인의 일주일 배너 광고비용이 300만원이 넘는 것을 생각하면 배너 후원을 통해서 ‘정기후원자 연결’ 외에도 수천만원을 기부한 셈이다. 얼마 전에야 흑자 전환을 이룬 중소기업이 사회공헌 사업에 뜻을 둔 데는 ‘공익성’을 염두에 두고 일을 해야 한다는 대표와 직원들의 생각 덕분이었다. 이정근(49·사진) 대표는 “한 회사가 굴러가기 위해서는 국가가 만들어놓은 도로나 전기 등 기본 환경을 이용하지 않느냐”라며 “회사를 운영하며 국가와 사회의 어려운 구성원들을 위해 기여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사람인이 사회공헌 활동에 열심인 것은 업종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다. 2005년 직원 20명으로 시작된 채용정보 사이트가 300여명의 중소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해가 갈수록 심해지는 ‘청년 실업’ 때문이었다. 통계청에 따르면 작년 대졸 실업자가 35만명으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고, 고졸 실업자 수도 40만명이 넘는다. 사람인 직원들도 이 점을 잘 알고 있기에 보통 중소기업이라면 잘 하지 않는 사회공헌 활동을 최대한 많이 하려고 했다. 2005년 법인 설립 당시부터 배너 후원을 시작으로 사내 모금활동을 통해 ‘아름다운

이규철 안양 성문고 교사 “성문고 3학년 8반 학생이 되면 페루의 루쓰를 후원하지요”

아이들 1000원씩 나머지는 교사가…선배 졸업하면 후배가 또 이어 나누는 법 배우고 입시에도 도움 지난 9일 졸업식, 학생들은 평생 못 잊을 선물을 받았다. 담임선생님이 전날 밤잠을 설치며 만들었다는 동영상이었다. 반장선거, 단합대회, 체육대회, 수능 D-50 파티, 수능 전날 격려 행사까지, ‘고3’으로 살아온 지난 한 해가 차례차례 화면 위로 흘러갔다. 그중에는 경기도 안양시 성문고 3학년 8반 학생들만 가진 특별한 추억도 있었다. 바로 페루에 있는 여자아이 루쓰(14)를 후원한 일이었다. 이규철(44·사진) 성문고 교사가 제자들과 함께 루쓰를 후원한 것은 이달로 만 2년째다. 반 아이들이 1000원을 내면 이 교사가 나머지를 채워 매달 페루로 보내고 있다. “매년 제가 맡는 반 아이들이 같은 아이를 후원하는 거죠. 선배들이 졸업하고 나면 후배들이 이어서 후원하는 식으로요. 졸업한 선배들이 학교에 찾아오면 다 같이 루쓰 이야기로 꽃을 피워요. 선후배가 ‘나눔’이란 한 테마로 묶이는 거죠.” 이 교사가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가 처음 후원을 시작한 건 재작년. 가수 션과 탤런트 정혜영 부부가 쓴 ‘오늘 더 사랑해’라는 책을 읽고 나서다. 좋은 일이니 반 학생들과 함께하고 싶어, 조심스럽게 후원 이야기를 꺼냈다. “요즘엔 매점 가서 과자 하나, 음료수 하나만 사도 1000원이니 큰돈은 아니었지요. 그래도 학생들이 제 호주머니를 털어 후원하는 거니까 망설여졌어요.” 이 교사의 걱정은 기우였다. 아이들은 뜨거운 호응을 보냈다. 그는 반 아이들과 상의해서 제3세계 국가에 사는 여자아이를 후원하기로 했다. 학생들 가운데 매달 돈을 걷을 ‘나눔 도우미’도 정했다. 그렇게

“오늘도 무대에 오릅니다 상처받은 영혼 치유하려고요”

가톨릭 문화기획 IMD 어린시절 누나 잃었던 현요안 신부… 슬럼프 빠져 괴로웠던 배우 우기홍씨 아파 본 사람들이 만든 연극 ‘바보 추기경’… “평범함 속 위대한 사랑 깨달았으면…” “영혼을 고치는 의사가 되라는 것이 누나의 마지막 유언이었습니다. 쉽진 않지만 평생을 걸고 노력해야죠.” 사람들의 영혼을 치유하고 위로하기 위해 성직자의 길을 걷고 있다는 제주교구 중문성당의 현요안(41) 주임 신부를 만났다. 조용한 성당 안에서가 아니라 젊은이들과 예술인들이 오가는 홍대 인근의 한 극장 안에서였다. 그가 지도신부로 있는 공연기획사 ‘가톨릭 문화기획 IMD’의 새 작품이 이곳에서 지난달부터 공연 중이다.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큰 누나가 하느님 곁으로 갔어요. 공부도 잘하고, 소아마비 장애가 있는 작은 누나도 잘 챙기던 참 착한 누나였는데 1월 1일 설날에 백혈병으로 쓰러져 3개월 만에 돌아가셨어요. 누나가 죽기 전에 가족들 한명 한명에게 유언을 남겼는데, 제게도 세 가지를 남겼습니다. 하나가 부모의 가슴에 묻히는 자신과 장애가 있는 작은 누나를 대신해 ‘세 배’로 효도하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평생 책을 놓지 말고 끊임없이 진리를 탐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유언이 영혼을 고치는 의사, 성직자가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작은 누나의 장애를 고쳐주고 싶었던, 그래서 정형외과 의사가 꿈이었던 소년은 그때부터 성직자의 꿈을 마음에 품었다고 한다. 신학교 시절 연극부 활동도 했던 ‘끼’ 많은 현 신부는 2008년 가톨릭 창작 뮤지컬 ‘이마고데이(Imago Dei·하느님의 모상)’를 제작, 기획하면서 ‘가톨릭 문화기획 IMD’를 세웠다. “영혼을 치유하고 회복하려면 가슴에 다가가야 하거든요. 위로, 치유, 회복은 머리로

[Cover story] 귀화자 10만명 시대

“우린 외국인 아닌 한국인… 이젠 가슴으로 받아들여 주세요” “다문화라는 말이 되려 꼬리표처럼 느껴져… 한국인 情으로 품어주세요” 투표해봤느냐는 질문에 “당연한 걸 왜 묻는 거지?” 이민 2·3세에 대한 고민 필요… 학교에서 ‘다문화’로 불리면 아이들 소외감·큰상처 받아 한국 사람이 되고 싶어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외국인 수가 지난달 24일 기준으로 10만 명을 넘어섰다. 귀화자 10만 명 시대, 귀화 한국인들은 ‘다문화사회’ 한국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해 어떻게 느낄까. 귀화 한국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한국 사회를 들여다봤다. 편집자 주 가야금 소리가 잔잔히 울려 퍼지는 인사동 전통찻집에 귀화 한국인 네 사람이 찾았다. “여기 유자차 둘, 매실차 하나, 녹차 하나 주세요.” 유창한 한국말로 주문하는 모습이 내 집처럼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귀화한 지 최소 3년에서 13년이 된, 한국 사회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한국인들’이다. KBS ‘러브 인 아시아’의 고정패널이자 다문화가정 네트워크 ‘물방울 나눔회’의 사무총장인 필리핀 출신 이쟈스민(34)씨, 세종대 교양학부 부교수이자 ‘독도 문제 전문가’로 알려져 있는 일본 출신 호사카 유지(54)씨, 여자축구단인 고양 대교눈높이 캥거루스의 수석코치 겸 골키퍼 코치인 타지키스탄 출신 신의손(50)씨, 한국과학기술연구원에서 컴퓨터 디스플레이 연구원으로 일하는 러시아 출신 사베리에프 블라디미르(56)씨는 전통차를 홀짝이며 화기애애한 대화를 이어갔다. “한국에 왜 귀화했느냐고요? 축구하려고요. 옛날에는 외국인 골키퍼는 경기에 못 나간다는 규정이 있었거든요.”(신의손) “독도 관련 연구를 하려면 일본보다 한국이 좋았어요. 직접적인 동기는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한국이 너무 멋져 보였던 거고요.”(호사카 유지) “한국은 컴퓨터 디스플레이를 연구하기에 최고의 나라니까요.”(사베리에프 블라디미르)

“역사적 사실에 초점 맞춘 여행 청년들 인생의 전환점 되길 기대해”

그랜드투어 저자 송동훈 각 도시 이야기 담은 ‘그랜드투어’ 여행의 화려함보다 역사에 주목, 선진국의 역사적 사실 알면 現대한민국 방향도 알 수 있어… 1937년 여름, 부모님의 강권에 못 이겨 유럽 여행길에 오른 존F 케네디는 책으로는 알 수 없었던 유럽의 생생한 현장을 경험했다.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독일의 행보는 심상치 않았고,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의 변화에 침묵했다. 그는 급박하게 돌아가는 유럽을 주제로 하버드대학교 학사 졸업논문을 썼고 이 논문을 보완한 책 ‘영국은 왜 잠자고 있었는가’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항상 잘난 형 때문에 기죽어 있던 존F 케네디가 역사의 중심에 들어선 순간이었다. 케네디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에선 여행을 통해 미래를 설계하고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 청소년과 젊은이가 많다. 18세기 유럽 귀족의 자녀들은 대학교육까지 포기하고 가정교사를 대동해 6~7년씩 여행하기도 했다. 일명 ‘그랜드투어’다. 우리나라에도 ‘그랜드투어’라는 이름으로 나온 여행서가 있다. 이탈리아·프랑스·영국 이야기를 담은 〈그랜드투어 서유럽 편〉과 독일·러시아·오스트리아를 담은 〈그랜드투어 동유럽 편〉이다. 하지만 저자 송동훈(41)씨는 과거 유럽 귀족이 했던 ‘그랜드투어’의 화려함이 아닌 그들이 여행을 통해 배우고자 했던 역사적 사실에 주목했다. 송씨는 그 이유를 “지난 200~300년간 세상을 이끌었던 나라의 역사를 알면 지금 대한민국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알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책에는 여행한 도시의 풍경묘사나 감상보다는 각 도시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는 로마의 대귀족이면서도 ‘귀족 중심의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라고 앞장서서 외쳤던 그라쿠스 형제 이야기를 꺼내며 “현재 한국

“분쟁지역 청소년이 자립할 기틀 마련이 목표”

‘권홍헤어아카데미’ 권홍 원장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 위치한 ‘권홍헤어살롱’에 들어서자 ‘권홍헤어와 함께하는 기아대책’ 벽보가 한눈에 들어왔다. 벽보에는 권홍(46) 원장이 후원하는 저개발국 아이 5명을 비롯해 직원들이 후원하는 아이들 26명의 폴라로이드 사진이 붙어 있었다. 권 원장은 “사진을 보고 관심을 갖는 고객과 직원들에게는 후원을 권유하는데, 동참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며 뿌듯해했다. 미용실뿐만 아니라 미용교육기관 ‘권홍헤어아카데미’로 유명한 권홍 원장은 봉사와 나눔에 열정적이다. 권홍헤어 직원들과 아카데미 학생들의 지각벌금을 모아 지역 독거노인들에게 정기적으로 후원하고, 북한이탈주민들의 사회정착지원기관인 ‘하나원’과 미혼모시설 ‘여성의집’ 등에서 지속적인 미용봉사도 했다. 미용교육에 뜻이 있는 북한이탈청소년에게는 무료로 미용교육을 해주기도 했다. 그중 한 명은 미용실 직원으로 채용했다. 권 원장은 “실력도 좋았지만 북한이탈주민 신분이 알려지면 아이가 힘들어질 수도 있을 것 같아 우리 직원으로 채용했다”며 “형편이 어렵거나 공부에 뜻이 없지만 열심히 하려는 의지가 있는 친구들을 가르치는 것이 ‘미용교육가’로서 나의 보람”이라고 말했다. 권 원장이 방황하는 청소년들에게 특히 관심을 갖는 것은 자신의 어린 시절과 비슷해서다. 권 원장은 구두수선하는 아버지와 몸이 편찮으신 어머니와 함께 목포 달동네에 살았다. 친구들이 모두 좋은 대학에 가고 권 원장만 연이어 대학입시에 실패해 절망에 빠져 있을 때, 형은 “미용기술을 배워보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다. 당시 미용실은 권 원장에게 ‘의자 두 개 달랑 놓고 동네 아줌마들이 모여 화투 치는 곳’이었지만, “유학을 가서 한국 최고의 미용사가 되어 보라”는 형의 말에 의지가 생겼다. 보조미용사로 1년 일해 비행기표를 마련하고, 일본에서 4년, 영국에서 3년간 미용기술을

도시의 지속가능성? 이상적인 큰 그림 가지고 접근해야

건축가 김석철 교수 인터뷰 도시·농촌의 효과적 융합이 우선 지역단위 문화시설 확충 필요해… 억지 개발보다 좋은 기획부터… 2011년 현재 한국의 도시화율은 90%를 넘는다. 전체 인구 중 도시 지역에 거주하는 인구의 비율이 90%를 넘는다는 뜻이다. 1960년 이후 한국 사회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도시화’라는 개념을 떠올려야 한다. 농촌과 지방에 거주하던 인구가 도시로 유입되면서 1차 산업이 2·3차 산업으로 대체되었다. 기자는 ‘도시화’라는 화두를 통해 한국의 지속가능성을 가늠해보기 위해 김석철(67) 교수를 만났다. 김수근과 김중업에게 사사하고, 29살이 되던 해 여의도 마스터플랜을 작성했고, 39살이 되던 해 예술의 전당 국제 현상에 당선되는 등 15차례에 걸쳐 국내외의 도시 설계에 참여했던 그라면 적절한 답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지난 19일, 가회동에 있는 사무실 ‘아키반건축도시연구원’에서 그를 만났다. ―도시의 지속가능성이란 무엇일까? “요즘 도시의 지속가능성을 이야기할 때 에너지 절감이나 환경 정화 같은 것들을 얘기하곤 한다. 하지만 도시의 지속가능성을 다음 세대도 우리가 가진 가능성을 다 가지고 살 수 있어야 한다는 소박한 바람 정도로 한정 지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에너지를 절감하고 대기를 정화하는 것은 언제나 할 수 있는 일이고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오히려 이상적인 도시가 무엇인가라는 큰 그림을 그리고, 이것에 접근해가는 것이 지속발전이 가능한 도시가 아닐까.” ―이상적인 도시란 무엇인가? “서울이 인구 천만 명을 유지하면서 전기자동차를 운행한다고 해서 발전한 도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의 툴루즈는 인구 50만명 정도의 도시다. 그런데 이 도시가 시애틀과 함께

제262호 창간 14주년 특집

지속가능한 공익 생태계와 함께 걸어온 1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