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회비·포인트 모두 기부해 난치병아동 소원 들어줄래요”

착한카드로 ‘소원성취사업’ 힘 보태는 배우 강석우 각종 후원 행사 참여 난치병 어린이와 가족 격려 “‘착한카드-메이크어위시’로 행복한 어린이 더 많아지길…” 지난달 30일 ‘메이크어위시 자선골프대회’에서 탤런트 강석우(54)씨를 만났다. 한국메이크어위시재단 후원회장을 맡은 지도 어느덧 4년째인 그는 이날도 ‘난치병 어린이들을 위한 소원성취사업’을 알리느라 열심이었다. 여느 연예인들처럼 메이크업이나 헤어스타일을 챙기는 대신 그는 공연을 준비하는 난치병 어린이들을 챙겼다. 재단과 사업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에겐 먼저 다가가 소원성취사업의 가치를 알리고 참여를 격려했다. 어느새 난치병 어린이와 가족들이 부르는 또 하나의 이름, ‘소원아저씨’의 모습, 그대로였다. ‘소원아저씨’는 언제 어떻게 첫 소원을 이루었는지, 강씨의 첫 소원 이야기부터 물었다. “아마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5학년 즈음일 거예요. 내 스케이트를 갖는 게 당시 제 소원이었거든요. 어리니 뭐 알아요? 다른 건 없어도 좋으니 그거 하나만 있으면 된다고 매일 부모님께 졸랐죠. 그러던 어느 날 저와 형제처럼 지내는 형님 한 분이 제 칭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시장에 데려가더니 하나 사주셨어요.” 형님이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 힘겹게 살아왔음을, 그래서 강씨의 부모님이 아들 삼아 돌보셨음을, 당시 군인이었으니 얼마 안 되는 월급으로 무리한 것임을, 강씨는 이제는 잘 안다. 그래서 수십 년이 흘러도 형님이 사 준 ‘스케이트’를 잊을 수 없다. “난치병 어린이들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것이 이런 의미 아닐까요? 형님이 사준 스케이트가 제 가슴에 이렇게 평생 남아 가끔씩 그 선물을 떠올리면서 행복해지듯 말입니다. 물론,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선물은 병이 낫는 거겠지만 그건 우리 사람이 할 수

“자포자기 삶 살던 영훈이 엄마… 그녀를 일으킨 이웃 관계망”

‘사회복지사업은 마중물과 같다.’ 몇 년 전, 한 선배 사회복지사에게 들었던 말이다. 사회복지사업의 목표 중 하나가 사람들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볼 때, 사회복지사 혹은 사회복지사업이 마중물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광주광역시의 한 임대아파트에 살고 있는 김영훈(가명·초 6) 아동의 어머니는 장애를 갖고 있는 아들 영훈이와 딸 영미를 키우고 있는 한부모 가정의 가장이다. 한 때 우울증을 앓고, 주변 사람들과의 왕래도 전혀 없던 영훈이 어머니는 한 사회복지사의 적극적인 방문을 통해 도움을 받게 됐다. 이 과정에서 가장 도움이 되었던 것은 같은 임대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는 한부모 가정 어머니들의 자조모임인 ‘아이사랑’에 참여한 것이었다고 한다.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는 이웃들과의 정기적인 만남을 통해 공감하고 위로하고 지지받으며 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영훈이 어머니는 “우리 집, 남의 집, 내 아이, 남의 아이 구분하지 않고 가족처럼 서로 돌보고 돕는 사람들이 생겨 이제 저는 살아났어요. 지금은 행복해요.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우리아이 희망센터(영훈이 어머니가 이용하는 사회복지기관)가 계속 되게 도와 주세요”라고 말한다. 놀랍게도 영훈이 어머니의 변화는 자신과 자기 아이들의 삶을 개선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았다. 영훈이 어머니의 관심은 주변에 있는 방임된 아동의 삶의 문제로까지 확대되었다. 영훈이 어머니를 비롯한 ‘아이사랑’ 참여 어머니들은 같은 아파트 단지의 한 아버지 가정 아이들이 의식주를 비롯한 기본적인 생활환경이 더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한 가정이 1~2명씩의

[날아라 희망아] 아홉식구 집안일 도맡는 백만이… 또래처럼 뛰놀고 배울 수 있게 도움의 손길을

집안으로 들어서자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바닥에는 흙먼지가 가득하고, 벽지는 누렇게 찌들어 군데군데 흉한 얼룩이 생겼다. 좁은 방을 가로질러 널린 옷가지들과 화장실 한가득 쌓인 빨래가 번잡함을 더했다. 전라도 두메산골, 인적 드문 허허벌판에 자리 잡은 낡고 허름한 이 집이 백만(가명·남·13세)이네 아홉 식구의 보금자리다. 이 집도 사정을 딱하게 여긴 이웃이 이사를 가면서 무상으로 빌려줘 겨우 얻었다. 올해 6학년인 백만이의 오후 일과는 여느 초등학생과 다르다. 또래 친구들이 뛰어놀 때, 백만이는 동생들을 위한 저녁 준비를 위해 팔을 걷어붙인다. 남은 찬밥에 김치를 넣고, 프라이팬에 슥슥 비벼 볶음밥을 만드는 손놀림이 제법 익숙하다. 반찬 하나 없는 밥상에 ‘백만이 표’ 볶음밥을 내놓자 동생들이 우르르 모여앉아 순식간에 해치운다. 백만이는 동생들이 다 먹고 난 뒤, 막내가 남긴 몇 숟가락으로 허기를 채운다. “하루는 백만이가 냉장고를 열어보더니 먹을 게 하나도 없냐고 묻는데, 아무 말도 못했어요. 반찬이 없어 김치 하나만 놓고 밥 먹일 때도 많아요.” 부모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우울증을 겪었다는 엄마는 아이들 이야기를 시작하자 이내 눈물을 보였다. 백만이네 가족은 뱃속 아이까지 포함해 총 9명이다. 임신 7개월 차에 접어든 어머니까지 농사일에 힘을 보태지만 벌이가 시원찮다. 아버지도 오래 전부터 앓고 있는 늑막염 결핵과 갑상선암 수술 후유증으로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느라 잠잘 시간도 부족한 고등학생 형들을 대신해, 또 병약한 부모님을 대신해 셋째 백만이가 5살 막내와 7살, 10살

벽돌 수백장 나르고 700원밖에 못 받는 소녀

배우 이정진의 네팔 자원봉사 벽돌공장 노동자는 대부분이 어린 아이… 기본 교육도 못 받아 꺼이랄리 미래 위해 지속적인 관심 필요 지난 5월 배우 이정진(34)씨가 네팔 오지로 봉사 활동을 다녀왔다. 2009년 방글라데시에 봉사활동을 다녀온 그는 1년에 한 번 이상은 꼭 빈곤아동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올해로 세 번째, 이정진씨는 어김없이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켜오고 있다. 그가 직접 전해온, 네팔에서 만나고 느낀 나눔 이야기를 소개한다. 편집자 주   인천공항에서 7시간의 비행 끝에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 도착했다. 계속해서 국내항공을 타고 2시간, 다시 차로 3시간을 이동해 최빈국 네팔에서도 더욱 가난한 마을로 꼽히는 꺼이랄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뜨겁고 습한 공기가 엄습해왔다. 45도를 웃도는 불볕더위, 숨이 턱턱 막혔다. 꺼이랄리는 땅이 척박해 과거 노예들이 모여 살았던 지역으로, 사람들은 아직도 이곳 사람들을 ‘옛날 노예들’이라 부른다고 한다. 10여 년 전 노예제가 사라졌지만, 여전히 꺼이랄리 주민들의 삶은 예전보다 나아진 게 없는 ‘절대빈곤’ 상황이기 때문이다. 내가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는 국제구호개발NGO 굿네이버스는 꺼이랄리에서 급식, 교육, 의료 지원, 소득증대 활동 등 다양한 지원 사업을 펼쳐오고 있다. 이전까지 나에게 네팔은 그저 신비롭고 장엄한 히말라야의 나라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가난하고, 약하고, 힘없는 꺼이랄리와 같은 풍경이 있으리라고는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충격이었다. 도착한 다음 날, 나는 바로 현지 굿네이버스 지부장님과 함께 마을 주민들을 만났다. 첫 번째로 만난 아이는 연로한 할머니와 살고 있는 13살의 소녀 상기타(Sangita)였다. 두

잘나가는 건설사 회장에서 ‘집짓기봉사 首長’ 된 사나이_켄 클라인 국제 해비타트 이사회의장

“집짓기의 진정한 의미? 땀의 가치와 자립용기 일깨워 주는것” 집이 없다는 것은 삶의 첫 단추를 꿸 수 있는 기회가 없다는 뜻이다. 집은 가족의 건강과 마음, 그리고 의지를 키우는 요람이다. 1976년에 설립된 해비타트는 전 세계인 모두가 집을 가지는 날을 꿈꾸는 비영리조직이다. 작년 한 해에만 7분에 한 채씩 집을 지었고, 7분마다 한 가족에게 새로운 희망과 출발을 선물했다. 지미 카터 전(前) 미국 대통령이 매년 참가하는 ‘카터 워크 프로젝트(Carter Work Project)’를 비롯해 전 세계 100개국에서 진행하는 여러 프로젝트들을 통해, 설립 후 지금까지 40만 세대 이상을 지어 공급했다. 이 과정에는 70만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이 함께했다. 이달 초 한국을 찾은 켄 클라인(Ken Klein, 67·사진) 국제해비타트(Habitat for Humanity International) 이사회 의장을 만나 그간의 여정을 들어봤다.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는 클라인씨는 주택건설회사 KLEINCO Properties의 회장으로, 미국 주택건설업협회(NAHB) 부회장, 오클라호마주 올해의 중소기업인 등에도 선출된 바 있는 주택건설 분야의 베테랑이다. 집이 없는 사람들에게 관심은 많았지만 딱히 돕고 참여할 방법은 알지 못했던, 그래서 비즈니스맨으로서의 삶만 영위하던 그가 해비타트와 연을 맺게 된 것은 10여 년 전, 해비타트 총재(밀라드 풀러, Millard Fuller)와의 만남 덕분이다. “제 삶을 바꾼 만남이죠. 건설업자인 제 재능과 경험을 살려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고, 세상을 좀 더 낫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으니까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방법도 알게 됐죠. 제 신앙이 제 직업, 제 일과 만나는

[Cover story] 강원도 평창 ‘감자꽃 마을축제’

“바람이 노랩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이 음악입니다.” 김창완밴드의 보컬 김창완이 외치자 관객들은 환호성으로 답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두 시간의 공연 동안 김창완밴드는 17곡의 노래를 쉬지 않고 불렀다. 교복을 입고 팔짝팔짝 뛰는 고등학생들 사이로 김창완밴드를 응원하는 플래카드가 드문드문 보인다. 여느 콘서트장과 다를 바가 없는 뜨거운 열기지만 이색적인 무대다. 고등학생들 사이로 하얀 한복 바지에 검정 저고리를 입은 할아버지가 덩실 춤을 춘다. 무대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학교 운동장에 마련되었고 학교 담장 밖으로는 마을버스가 지나갔다. 운동장 한쪽에선 가마솥에서 곤드레 된장국과 쌀밥이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익어가고 있다. 무대 왼쪽의 천막에선 동네에서 마실 나온 것 같은 차림의 어르신들이 정성스럽게 만든 지역 음식을 판매하고 있다. 메밀부침이 3개에 3000원이고 막걸리는 한 잔에 1000원이다. 이 공연의 무대는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감자꽃 스튜디오다. 서울에서 평창읍까지 버스로 3시간, 그리고 다시 택시를 타고 10분을 들어가면 폐교를 개조한 감자꽃 스튜디오가 있다. 지난 5월 28일과 29일, 감자꽃스튜디오는 이틀에 걸쳐 인근의 마을 주민들과 힘을 모아 ‘감자꽃 마을축제: 분교로 가는 봄 소풍’을 개최했다. 이선철 감자꽃스튜디오 대표의 사회로 진행된 축제는 이름 그대로 마을축제였다. 지역주민들이 준비한 음식과 공연, 감자꽃스튜디오의 기획이 만나 지역주민이 80명에 불과한 마을에 1000명의 외지인이 찾아왔다. 평창중리농악보존회의 길놀이로 시작된 공연은 감자꽃스튜디오 관계자들이 결성한 밴드 ‘The Trout’의 공연에 바통을 넘겼고, 무대는 동네 주민들이 결성한 기타합주반 ‘Jesus People’의 기타연주와 노래로 이어졌다. 감자꽃스튜디오 예술강사에게 플루트 강습을 받은 플루트 합주팀과 평창아라리 보존회의

“사회적 기업의 인프라 지원 중요 자립 돕는 펀드도 만들고 싶어”

사회적기업지원네트워크 정선희 상임이사 “장기적으로 ‘나’를 (사회에) 투자할 수 있는 일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사단법인 사회적기업지원네트워크의 정선희(51) 상임이사가 기자가 질문할 새도 없이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정 이사는 우리나라에 사회적 기업의 개념을 처음 소개하고 지금의 형태가 되기까지 산파 역할을 한 사람이다. 서울대 역사교육학과 81학번이었던 그녀는 노동운동에 열심이었다. 근로기준법조차 지켜지지 않고 노동조합 설립 자체도 원천 봉쇄됐던 그 때, 뜻 맞는 사람들과 함께 구로공단, 인천공단, 울산까지 내려가 노동운동을 했다. 하지만 사회주의 몰락은 그녀의 인생을 바꿨다. 서울로 다시 돌아와 대기업에 입사했다. 하지만 평범한 직장 생활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36세가 되던 1996년,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유학 준비에 몰두했다. “남편의 반대가 없었느냐”는 질문에 “평생 든든한 후원자”라는 답이 돌아왔다. 결국 이듬해 아이를 데리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본인의 인생을 통틀어 봤을 때 너무나도 잘한 일이라 자부한다. 아이와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우리나라에서는 개념조차 생겨나지 않았던 때 사회적 기업을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 이사는 “사회적 기업은 인내를 필요로 하는 페이션트 비즈니스(Patient Business)”라고 말했다. 정부나 시장의 실패로 생기는 영역에서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창의성으로 사업을 꾸리고, 노동시장에서 통합되지 못하는 사람들을 포용하기 때문에 일반 기업에 비해 손익분기도 늦게 오고 더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드는 비즈니스라는 얘기다. 정 이사는 미국 유학 중 인내하는 투자로 사회적 기업을 키워내는,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독특한 형태의 활동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지구촌나눔운동 몽골사무소

무담보 대출로 몽골 유목민 웃음꽃 피운다 마이크로크레딧… 경제적 자립 위한 무담보 ‘소액대출’, 가축·사료은행과 더불어 소·닭·묘목도 대출 아무도 갚지 않을거라 예상… 초조함 감출 수 없었지만 꼬깃꼬깃한 지폐 받았던 첫 상환 순간 잊지 못해 지금까지 상환율 90%… 곧 ‘빈곤 퇴치’ 보게 될 것 마이크로크레딧(Microcredit)은 가난한 사람들의 경제적 자립 지원을 위한 무담보 소액대출을 말한다. UN이 2005년을 ‘마이크로크레딧의 해’로 선포하고, 대표적 기관인 그라민 은행과 무하마드 유누스 총재가 2006년 노벨 평화상을 받으면서 널리 알려졌다. 최근에는 지역사회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소나 닭, 심지어는 묘목을 빌려주는 재미있는 마이크로크레딧도 세계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지구촌나눔운동 몽골사무소 조현주(43) 소장 역시 가축은행, 사료은행 등 마이크로크레딧 모델을 활용해 지역사회 개발을 꾀하고 있다. 잠시 한국을 방문한 조 소장을 직접 만났다. 편집자 주 조 소장은 지역사회 개발의 사명을 처음 품은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대학교 3학년 때 필리핀 빈민촌으로 떠난 단기봉사에서였습니다. 어느 날 봉사를 마치고 빈민촌을 빠져나오는 중에 ‘네가 이런 곳에서 함께 살아야 하지 않겠니?’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날 이후 ‘아시아의 빈곤에 동참하는 것’이 인생의 좌우명이 됐죠.” ‘서울대 수의학과’ 정도면 좀 더 편안한 삶을 꿈꿨을 법도 한데, 조 소장은 “인생에 있어 젊음은 ‘계란 노른자’와 같은 시간”이라며 “그 시간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값진 일 아니겠느냐”고 오히려 되물었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계란 노른자 시간’을 헌신했다. 대학 졸업 후 6년간 방글라데시에서 개발사업을 담당하며 봉사했고, 이후 2002년에

주류社 페르노리카코리아 – 음주운전예방의 날 캠페인

끝까지 품위 있는 음주문화 위해 뛴다 기업 수익도 중요하지만 위험한 음주습관 막고 싶어 최근 외국계 기업들의 국내 사회공헌 활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만큼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페르노리카코리아가 진행해 온 스마트 드라이빙 캠페인이 올해로 5주년을 맞았다. 페르노리카코리아의 프랭크 라페르 대표를 만나 페르노리카코리아의 사회공헌 철학과 지난 23일에 진행된 ‘음주운전예방의 날(Responsib’ALL Day)’ 캠페인에 대한 얘기를 들어봤다. ―최근 외국계 기업이 국내에서 사회공헌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국적을 떠나 일단 수익만 챙기는 기업활동은 곤란하다. 한국의 기업들이나 외국계 기업들이 외국에서, 또 한국에서 사회공헌을 하는 건 당연하다.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에 대한 비판은 감수해야 한다.” ―페르노리카 그룹은 어떤 사회공헌 활동을 하고 있나? “페르노리카는 많은 사회공헌 활동을 해왔다. 환경과 관련된 책임에 대해 고민했고, 좋은 술을 만들기 위해 물을 가꾸고 보호하는 활동을 해왔다. 특히 1971년부터 젊은 성인과 임산부를 비롯한 소비자들에게 음주운전과 과도한 알코올 섭취를 막을 수 있는 책임 있는 소비습관을 장려해오고 있다.” ―술을 파는 회사가 과음이나 음주운전에 대해 고민하는 것 자체가 신선하다. “기업의 수익도 중요하지만 타인을 희생해가며 성장하고 싶지는 않다. 술은 사람 사이의 관계를 윤택하게 해주고 품위 있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만 절제하지 못하면 누군가가 희생된다. 특히 음주운전이 그렇다.” ―지난해 국내에 ‘음주운전예방재단’을 설립했다. “음주운전은 나뿐만 아니라 나의 가족, 타인의 가족에게까지 해를 입힌다. 다행히 다른 사회문제들에 비해 음주운전에는 대안이 있다. 특히 한국은

팬들과 병원·학교 짓기 프로젝트… “나눔으로 리드합시다”

기아대책과 나눔 펼치는 이지성 작가 착한 카드로 나눔 실천해요 ‘꿈꾸는 다락방’, ‘여자라면 힐러리처럼’, ‘리딩으로 리드하라’ 등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저술한 이지성(37) 작가. 지금까지 출판한 책만도 거의 50권에 달한다. 작가 자신도 정확히 몇 권인지 모를 정도다. 100만권이 넘게 팔린 ‘꿈꾸는 다락방’을 비롯해 베스트셀러도 수십 권으로 인세 수입만도 18억원을 넘는다. 많지 않은 나이에 큰 성공을 거둔 그는 요즘 ‘나눔으로 리드하라’고 외치고 있다. 특강을 할 때에도, 인터뷰에 응할 때에도 그의 관심 주제는 나눔이다. 급기야 팬 카페 회원들과 ‘Dream 프로젝트’까지 시작한 그를 프로젝트 비전 선포식 현장에서 만나보았다. “Dream 프로젝트는 앞으로 10년 동안 기아대책 해외 사업장에 병원과 학교 100개를 짓는 프로젝트예요. 빈곤문제를 보다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병원과 학교가 세워지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100개를 저 혼자 짓기는 쉽지 않겠더군요. 그래서 팬 카페 회원들을 끌어들였죠. 좋은 일인데 같이 하면 더욱 좋잖아요. 저 혼자 할 수 있는 수준에 맞춰 꿈을 줄이는 것보단, 이 꿈에 맞춰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게 나을 거 같더라고요.” 이날, 양재동의 힐스테이트 갤러리에서 이씨와 500명의 팬들은 ‘Dream 프로젝트’의 비전을 선포했다. 팬 카페에서 그동안 모은 후원금과 이날 행사 참가비, 현장에서 모금한 후원금 1700만원도 기아대책에 기탁했다. 이씨는 “기아대책을 통해 나눔을 체험하면서 행복해졌다”는 고백으로 나눔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꿈에 그리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공허해졌습니다. 한 2년간 그랬을 거예요. 돈도 많이 벌고, 여기저기서

투병생활로 가려진 꿈… 마음과 손길 모여 이루다

메이크어위시 콘서트_신곡 쇼케이스 연 신민지양 지난달 말, 열다섯 살의 신민지양은 평소 꿈인 ‘가수’가 되어 무대에 올랐다. 첫무대인데 긴장한 기색도, 아픈 기색도 없이 총 3곡의 신곡을 선보였다. 민지는 꿈을 이룬 흥분으로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민지의 특별한 무대를 축하하기 위해 멀리서 달려온 가족과 친척, 친구들 역시 함께 설레는 모습이었다. 이날의 특별한 무대는 한국메이크어위시재단(www.wish.or.kr)이 마련했다. 첫 번째 소원성취의 주인공, 크리스가 경찰관 체험으로 소원을 이룬 날을 기념하는 월드위시데이(World Wish Day·매년 4월 29일)를 맞아 난소생식세포종양으로 투병 중인 민지의 신곡 발표 쇼케이스를 열어준 것이다. 메이크어위시재단은 소아암, 백혈병, 근이영양증 등 난치병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장기간 투병하는 아이들의 소원을 이루어 주는 소원성취기관이다. 국내에는 2002년 설립되어 현재까지 약 1600여명 아이들의 소원을 이루어주며 희망과 용기를 전하고 있다. 무대에서 내려온 민지는 “오늘 하루가 너무 짧다”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공연 전에 청심환을 먹었다”고 고백한 민지는 “재미있고 좋았다”며 내내 웃는 얼굴이다. 2009년 발병 이래 대전과 서울을 오가며 종양제거수술, 집중항암치료를 끊임없이 받느라 몸도 마음도 지쳤을 법한데 여전히 밝다. 투병생활로 빨리 철이 들었는지 감사인사도 빠뜨리지 않는다. “저 하나를 위해서 참 많은 분들이 긴 시간 동안 함께했거든요. 저를 보러 이렇게 와주신 분들, 다 너무너무 감사드려요.” 고마운 사람들 이야기를 꺼내니 목이 메는지 민지는 잠시 말을 멈췄다. 민지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성기영(40)·이규원(37)·유태환(33)씨 등 작곡가 3명이 한 곡씩을 무료로 선물했고, 그룹 SES의 슈(30·본명 유수영)와 신예 가수들도 출연료 없이 이날

‘본사랑재단’ 설립한 본죽 대표_’죽’ 한 그릇으로 전하는 한국인의 따뜻한 ‘정’

병원·아프리카… 아프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죽 기부 가맹점 1000여 곳·협력업체도 동참 본사 본아이에프도 수익 10% 기부 연세의료원에 의료선교기금으로 올해부터 10년간 총 10억 지원 예정 “약속을 지키는 것뿐입니다.” 2009년 6월 본사랑재단을 설립한 이후 남모르게 펼쳐 오던 선행을 더욱 체계적으로 펼치고 있는 본 아이에프㈜의 김철호(48) 대표, 최복이(46) 이사장이 말하는 ‘나눔의 이유’다. 대학 졸업 후인 1989년 단돈 100만원으로 서울에 올라온 부부는 사업 초반에 고생이 많았다. “한 번은 기차 타고 대전에 있는 친척 집에 돈을 빌리러 갔어요. 자존심 때문에 정작 ‘돈’ 얘기는 꺼내지도 못하고 거실에 앉아 있는데, 부엌에서 친척들 목소리가 들리더라고요. ‘돈 빌리러 온 거 아니냐’, ‘한 번 빌려주기 시작하면 버릇 되니, 차비도 주지 마라’ 이런 얘기들이 들리는데, 너무 속상해서 그냥 뛰쳐나왔죠. 한 분이 따라 나와 차비 얼마를 쥐여 주시는데, 자존심은 상해도 그 돈이 아니면 서울로 돌아갈 방법도 없는 터라 받으면서 너무 속상했어요. 돌아오는 기차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울면서 최 이사장은 “앞으로 꾸는 삶이 아니라 베푸는 삶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돈을 벌게 되면 열심히 베풀며 살겠다”고 약속도 했다. 하지만 사업이 바빠지면서 그 약속은 잊혀지고 말았다. 1998년 외환위기로 당시 운영하던 사업이 부도를 맞으면서, 비로소 그 약속이 다시 생각났다. “망하기 전 1~2년간 사업이 꽤 잘 됐거든요. 그러다 갑자기 망하니까 허망하기도 하고, ‘돈이 이런 거구나, 있다가도 사라지는 것이구나’라는 생각도 들었죠. 그리고는 옛날의 약속이 생각났습니다. 예전에 베풀며 살겠다고

제262호 창간 14주년 특집

지속가능한 공익 생태계와 함께 걸어온 1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