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박승권 잎스 대표
네모난 투입구에 크고 작은 투명 페트병 20여개를 우르르 쏟아 버렸다. 한 2초 흘렀을까. ‘꽈드득’ 씹는 소리가 들렸다. 기기를 열어 보니 수거함에는 구멍이 뚫려 압축된 투명 페트병들이 놓여있었다.
지난달 8일, 인천 SSG랜더스필드에는 페트병을 넣으면 재활용 가능 여부를 선별하는 빨간색 인공지능(AI) 로봇이 설치됐다. 로봇은 투명 페트병만을 구별해 압착하고 나머지는 반환한다. 로봇공학 스타트업인 잎스가 2년 간의 개발 끝에 선보인 국내 최초 다중투입방식 수거로봇 ‘모이지(Mo-EZ)’다.
잎스는 SSG과 함께 분리배출에 참여하는 관람객을 위해 추첨을 통해 경기 중 선수가 실제 사용한 ‘친필 사인 리사이클 배트’ 등을 증정하는 이벤트를 마련했다. 지난달 28일 경기장을 찾은 관람객 A씨는 “SNS 이벤트를 보고 왔는데 환경적으로도 기여할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경기장 인근에 버려져 있는 쓰레기를 주워왔다는 초등학생 관중도 있었다. B군은 “떨어진 쓰레기에 음식물이 묻어 있어서 씻어서 가져왔다”고 했다.
실제로 이벤트를 시작한 지난달 24일부터 일 평균 약 500개의 페트병이 수집됐다. 심지어 우천으로 시작 직전에 경기가 취소됐던 지난달 26일에도 페트병 400여개가 모였다.
15배 빨라진 선별 속도…인구밀집 지역에 적합
잎스를 설립한 박승권(43) 대표는 수원대에서 화학공학과를 졸업했고 아주대에서 환경공학 석사학위를 받은 공학도다. 졸업 후 전공을 살린 진로를 고민하다 2019년 8월, ‘지구 대기를 정화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공기질 모니터링 시스템 ‘잎스온(EAPS ON)’을 개발해 출시했다.
“사실 창업하고 얼마되지 않아 코로나19로 위기가 왔어요. 지인으로부터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의 ‘예비 사회적 기업 사업화 프로그램’에 대해 들었어요. 아이템을 실제 사업으로 실현시켜주는 프로그램인데, 수거로봇 기술을 구현해줄 회사가 없다고 고충을 토로하는 거예요. 저희는 기술 개발이 가능하다고 했죠.”
그렇게 3개월 만에 수거로봇을 개발해 수원시 장안구민회관에 설치했다. 문제는 설치 이후 쏟아진 민원이었다. 한 번에 하나씩 넣어야 하는 방식 때문에 이용자들이 불편을 토로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이에 박 대표는 한 번에 여러 개를 동시에 투입할 수 있는 ‘다중투입방식’을 생각해 냈다. 국내에 나온 사례가 없다 보니 연구와 개발, 출시까지 2년이 걸렸다. 그렇게 2023년 12월에 출시된 로봇이 ‘모이지’다.
모이지는 한 번에 여러 개를 넣어도 동시에 처리되기 때문에, 대기 시간이 대폭 감소하고 손쉬운 수거가 가능하다. 기존 국내 선별 로봇은 1분에 3~7개까지만 처리가 가능하지만, 모이지는 1분에 약 100개의 폐기물을 분류할 수 있다. 때문에 인파가 몰려드는 행사 장소나 공동주택 등 인구밀집도가 높은 지역에 적합하다.
독자적 광학센서를 탑재해 기존 AI 이미지 센서 기반의 선별로봇보다 정확도도 높였다. 이미지 센서 기술은 폐기물의 이미지를 인식해 선별하는 것으로, 찌그러지거나 디자인의 큰 변화가 있는 경우 선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광학센서로 작동되는 모이지는 근적외선 가시광선으로 분자 구조를 파악하고 플라스틱 재질과 색상까지 동시에 인식해서 종류별로 세밀하게 선별할 수 있다.
이렇게 골라낸 폐플라스틱은 다시 정유사에 보내져 새 플라스틱 등을 생산하는 원료로 재사용된다. 박 대표는 “플라스틱을 재활용하면서 순환경제 시스템이 구축될 것을 기대한다”고 전했다.
박 대표가 모이지를 세상에 처음으로 선보이기까지 가장 큰 걸림돌이 된 것은 폐기물관리법이었다. 현행 폐기물관리법은 폐기물을 관리하기 위해서 일정 시설과 장비를 갖추고 허가를 받도록 하고 있는데, 이를 위해선 밀폐형 압착차량과 덮개 설치차량 등 불필요한 설비를 갖추는 데 10억 가량을 투자해야 한다는 게 박 대표 설명이다.
박 대표는 이에 지난해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개최한 ‘규제샌드박스 심의위원회’에 심의를 신청했다. 규제샌드박스는 2019년 1월 본격 시행된 것으로, 신기술 제품이나 서비스에 대해 일정 기간 현행 규제를 면제하거나 유예해 주는 제도다. 모이지는 심의 끝에, 지난해 9월 ‘환경부로부터 허가 없이 신고만으로도 출시 가능하다’는 ‘적극적 유권 해석’을 받아냈다.
이용자 포인트 보상으로 올바른 재활용 방식 습관화
박 대표가 잎스를 통해 창출하려는 사회적 가치는 무엇일까. 일상에서의 올바른 재활용 방식을 습관화하는 것에 있다. 이를 위해 박 대표는 사용자가 폐기물을 넣을 때마다 현금으로 보상하는 시스템을 개발했다. 이용자가 폐기물을 하나 넣을 때마다 모바일 앱에 10원씩 포인트가 적립되며, 포인트는 현금으로 전환할 수 있다. SSG와의 PoC(사업실증)를 통해 모이지의 사업화 가능성을 증명한 후 앱도 출시할 예정이다.
그는 “모이지가 설치된 지자체의 수거인력과 협업해 신규 일자리도 창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지역 내 취약계층 등을 수거인력으로 등록한 후 수거함이 가득 찼을 때 알림 메시지를 보내면, 투명 페트병을 수거해 정해진 위치에 가져다 놓을 수 있게 하는 방식이다. 이럴 경우, 폐지 등을 직접 찾아 나서야 했던 취약계층은 고정적인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 또한 수거인력이 취약계층일 경우, 가중 보상체계를 적용해 더 많은 포인트를 적립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박 대표는 모이지를 이용한 관광 융복합콘텐츠도 계획 중이다. 관광지의 쓰레기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취지다. 오는 7월에는 은행권청년창업재단 ‘디캠프’와 계약을 맺고 전주 한옥마을에 모이지를 설치하기로 했다. 한옥마을에 설치되는 모이지에는 관광 콘텐츠를 이용한 증강현실 기술을 추가할 예정이다. 이용자가 모이지 앱을 통해 ‘OO관광지 방문 후 버려져있는 페트병 수거’와 같은 미션을 수행하면 포인트나 상품권 등으로 보상받는 시스템이다.
“사업을 하다보니 제가 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는 사명이 생겼어요. 나중에는 모이지 기기는 무상으로 지원하고, 투명 페트병을 재생원료로 제공한다든지 자원순환 비즈니스를 통해서만 회사 매출을 내는 것이 목표랍니다.”
조유현 더나은미래 기자 oil_lin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