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의 다양한 얼굴 <1>
2019년 등장한 국내 최초의 배달노동자 조합 ‘라이더유니온’은 설립 첫해 시민들을 대상으로 ‘늦어도 괜찮아요. 안전하게 와주세요’ 캠페인을 진행했다. 고객이 앱을 통해 음식을 주문할 때 ‘늦게 와도 괜찮다’는 메모를 라이더에게 남기는 것만으로도 오토바이 배달 사고율을 낮출 수 있다는 취지의 캠페인이었다.
배달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을 생각해달라는 당사자들의 호소는 시민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음식 배달원의 노동 인권뿐 아니라 새벽배송을 하는 택배기사의 수면권 등 플랫폼 산업 전반의 인권 문제로 번졌다.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초대위원장은 “배달 기사의 노동권이나 인권은 이전에는 크게 관심받지 못했던 영역”이라며 “시대 변화에 따라 등장한 인권의 새로운 주제”라고 설명했다.
인권단체들의 모습이 다변화하고 있다. 과거 한국 사회는 국가의 폭력, 억압적 시스템 등 주로 국가와 개인의 관계 안에서 인권의 개념을 정의했다. 최근에는 개인의 다양성과 특성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인권의 범위가 확장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간과했던 문화적 소수자들, 눈에 띄지 않는 차별로 고통받던 이들이 스스로 단체를 꾸려 자신들의 삶을 설명하고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올해 초 설립된 ‘청소년주거권네트워크 온(이하 청주넷)’은 가정밖청소년의 주거권 보장을 외치는 단체다. 청소년의 주거권을 우리 사회가 반드시 보장해야 할 ‘인권’으로 규정하고 이들이 더는 위험에 노출되지 않도록 안전한 집을 제공해야 한다고 말한다. 청소년을 직접 찾아다니며 돕는 아웃리치 조직들, 성폭력상담소, 청소년위기지원센터, 대안학교, 공익변호사단체 등이 합류해 총 17개 조직이 함께 네트워크를 꾸렸다.
변미혜 청주넷 활동가는 “그동안 우리 사회는 탈가정한 청소년의 권리에 대해 주목하지 않았다”면서 “청소년들은 본인의 열악한 주거 문제를 스스로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탈가정의 원인은 보호자의 부재, 가정폭력, 방임 등 타의에 의한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가정 밖으로 밀려난 청소년들이 ‘집다운 집’에서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게 사회가 이들의 주거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인권의 범위가 확장하면서 인권단체가 다루는 주제도 다양해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인권활동가의 인권’을 고민하는 단체도 등장했다. 2020년 설립된 ‘뜻밖의상담소’는 누군가의 마음과 생활을 돌보는 인권활동가들이 정작 자신은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2021년 이 단체가 진행한 ‘인권활동가 마음건강 기초조사연구’에 따르면, 조사 대상 중 소진 또는 간접 트라우마 수치가 높아 즉각적인 개입이 필요한 비율이 42.5%에 달했다. 특히 위험군의 비율은 우울(37.8%), 강박(31.1%), 대인예민성(28.9%), 불안(24.4%) 등 여러 분야에서 높게 나타났다. 뜻밖의상담소는 인권활동가를 대상으로 마음건강 검진, 불면증과 번아웃 치료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고 있다.
라이더유니온은 뿔뿔이 흩어져 있던 배달노동자들의 노동 인권을 대변하는 단체다. 배달노동자 당사자로서 라이더유니온을 설립한 박정훈 전 위원장은 “처음에는 조합원 100명만 모여도 성공이라고 생각했는데 벌써 1000명이 넘었다”면서 “덕분에 협상력이 제로에 가까웠던 라이더들이 거대한 플랫폼 기업과 마주앉아 노동자 인권에 관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출범 첫해 라이더유니온은 최초로 배달노동자들의 근무환경에 대한 실태조사를 진행했다. 보험 가입, 배달 중 안전사고로 발생하는 사례를 수집했다. 이듬해 배달 애플리케이션 운영사인 우아한형제들(배달의민족), DH코리아(요기요)에 단체교섭을 요구했고 플랫폼 노동과 관련한 첫 노사 합의안이 나왔다. 지난해 5월에는 배달노동자도 산업재해보험에 가입할 수 있게 법이 개정됐다. 박 전 위원장은 “이런 변화가 라이더유니온만의 노력으로 이뤄진 건 아니다”면서 “배달노동자의 인권에 공감해준 시민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고 말했다.
김현미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과거의 인권운동이 피해나 고통을 당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차원이었다면, 앞으로의 인권운동은 당사자의 경험에 공감하면서 함께 어젠다를 확산해나갈 ‘엘라이(협력자)’들을 만들어가는 방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시원 기자 blindletter@chosun.com
문일요 기자 ilyo@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