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와 ‘고물가’ 합성한 신조어
작황 부진에 따른 식료품 물가 상승
점심으로 나물비빔밥을 요리해먹는다고 가정해보자. 시금치·상추·당근·고사리·콩나물 등 기본적인 재료가 필요하다. 농산물 유통 정보를 제공하는 농넷에 따르면, 11일 기준 전국 공영 도매시장에서 시금치 1kg은 평균 1만220원, 상추 8960원, 당근 1580원, 고사리 2760원, 콩나물 730원에 거래됐다. 도합 2만4250원이다. 불과 3개월 전인 지난 5월 11일 시금치와 상추 1kg은 2000~3000원대에 거래됐다. 세달만에 가격이 3배 이상 오른 것이다.
채소·과일값이 널뛴 건 날씨 때문이다. 적도 부근 수온이 올라가는 엘니뇨가 4년 만에 발생하면서 폭염과 폭우, 가뭄 등 이상기후 현상이 장기화하고 있다. 이로 인해 농산물 수확량이 감소했고, 식량 가격이 급등했다. 특히 엽채류의 주요 산지인 충청권에 집중호우가 쏟아지면서 상추 등을 재배하는 농지가 침수·낙과 등의 피해를 입었다.
기후변화로 인한 물가상승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최근 영국 BBC의 시사 프로그램 뉴스나이트는 ‘기후플레이션(Climateflation)’이라는 신조어를 소개했다. 기후플레이션은 ‘기후(Climate)’와 ‘고물가(Inflation)’의 합성어로, 기후변화가 작황 부진 등을 초래하면서 식료품 물가가 뛰는 현상을 의미한다.
서울에 거주하는 주부 임씨(53)는 “기본적인 밑반찬 재료값이 너무 오르다 보니 밥상을 어떻게 차려야 할지 끼니마다 고민이 된다”며 “가격이 올랐다고 해서 채소나 과일의 품질이 더 좋은 것도 아닌 게 문제”라고 말했다.
기후플레이션의 영향은 국경을 가리지 않는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뉴멕시코주를 덮친 가뭄은 할라피뇨 고추 흉작을 초래하며 세계적으로 사용되는 ‘스리라차 소스’의 가격을 폭등시켰다. 스리라차 소스는 원래 한병(481g)에 5달러(약 6500원) 수준이었지만, 최근에는 아마존 등 온라인 상거래에서 10배가 넘는 50달러(6만5000원)에 판매되고 있다.
인도에서는 토마토 품귀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토마토는 인도에서 광범위하게 쓰이는 필수 식재료로, 각 지역에서 시기별로 출하된다. 하지만 올해 3~5월 안드라프라데시주 등 특정 지역에서 홍수 피해가 발생하면서 토마토 생산에 막대한 타격을 받았고, 올 상반기 토마토 가격이 445% 넘게 급등했다. 이에 토마토를 노린 강도 사건이 빈발하면서 인도 북서부 마하슈트라에 사는 한 농부는 자신의 토마토밭에 CCTV를 설치하기도 했다. 지난달 인도는 자국 내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백미 수출을 금지하기도 했다. 인도는 세계 쌀 무역량의 40%를 차지하는 주요 수출국으로, 지난해에만 140국에 2200만t의 쌀을 수출했다.
이 밖에도 설탕값이 상승해 다른 식품값이 오른다는 ‘슈거플레이션’이나 우유값이 식품 물가 인상을 이끌고 있다는 ‘밀크플레이션’ 등이 기후플레이션에 포함된다.
유럽중앙은행(ECB)이 올해 5월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코로나19와 우크라이나 전쟁 요인을 제외하고 폭염 영향만으로 지난해 유럽 식품 물가는 0.67%p 올랐다. 독일 포츠담기후변화연구소는 이 보고서를 통해 2035년에는 기후변화가 세계 식품 물가 상승률을 최대 3.23%p 끌어올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에 전문가들은 치명적인 식량난이 도래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미네트 바터스 영국전국농민연합(NFU) 회장은 “기후변화가 전 세계 식량시스템에 대혼란을 가져오고 있다”며 “전쟁·분쟁 장기화와 더불어 기후변화가 더 심해진다면 각국은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막대한 돈을 써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카베 자헤디 유엔식량농업기구(FAO) 환경국장은 “기후위기와 식량안보를 분리할 수 없다”며 “정부와 기업은 탄소배출량을 줄이고, 농부들이 변화하는 기후에 적응할 수 있도록 탄력적인 대응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수연 기자 yeon@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