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금)

‘따로 또 같이’ 힘 모아 부산 중앙동의 활력 되찾다

‘또따또가’원도심 문화창작공간

미상_사진_또따또가_임금칠1_2010“미군 부대에서 시레이션(C-ration)이라고 전투 식량을 담는 박스가 나왔어. 이게 안에 기름종이가 발라져서 비가 안 샜다고. 이 박스랑 판자를 엮어 만든 박스집들이 용두산 공원에 바글바글했다니까.”

부산 중구 토박이 임금칠(64)씨가 전하는 중앙동의 옛 모습은 한 끼 밥벌이를 위해 뛰어다니는 사람의 활력으로 가득찼다. 그 후로도 중구는 “무역이면 무역, 장사면 장사, 안 되는 일이 없었다”고 했다. 중구, 그중에서도 중앙동은 부산 일번지였다. 그랬던 곳도 다른 오래된 도심처럼 쇠락하기 시작했다.

“서면 쪽에 호텔이 생기면서 상권이 흩어지기 시작”하더니, 1998년 시청이 이전하면서 인구가 급격히 감소했다. 1990년대 초반 8만명에 달했던 숫자가 98년 이후에는 5만명으로 줄었다. 빈 건물이 늘어갔다.

이렇게 활력을 잃어가던 중구에 최근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문화 바람’ 덕분이다.

임금칠씨는 지난 9월 어르신 여덟 분과 함께 용두산 공원에서 사진 전시회를 열었다. “14살 때부터 신문 배달하고, 인쇄업을 하면서 맺어온 사진과의 인연이 전시회까지 이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했다. 그것도 평생을 곁에 두고 살아온 용두산 공원에서의 일이다. 어르신들에게 무료 사진 수업을 진행하고 전시회까지 치른 사진작가 프리야 김(39)씨는 지역에서 열리는 조그마한 전시회에 많은 후원이 쏟아져 깜짝 놀랐다고 했다.

“중구노인복지회관 후원으로 전시회에 참여하신 어르신들 사진엽서를 1000부씩 만들었어요. 엽서 뒷면에 전시회 소개를 넣었는데 그건 인쇄골목에 계시는 분이 실비로 해주셨어요. 사진 인화비하고 전시회 포스터, 플래카드는 ‘또따또가’에서 제공했죠.”

임금칠씨가 이번 전시회에 출품한 사진이다. 임금칠씨는 사진을 통해 자신이 살아왔던 중앙동과 지하철역을 오가는 사람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임금칠씨가 이번 전시회에 출품한 사진이다. 임금칠씨는 사진을 통해 자신이 살아왔던 중앙동과 지하철역을 오가는 사람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지난 7월에는 ‘또따또가’에 입주한 몇몇 예술가들이 ‘중앙동 인쇄 골목에 화분을 놓자’는 취지로 자선 콘서트를 열었다. 작업실에서 나와 지역민들에게 찾아가려는 예술가들의 열의는 대단했다. 설치미술작가인 김경화(41)씨는 “콘서트를 위해 작가들이 모여 직접 팸플릿을 만들고 골목에 포스터를 붙이며 홍보를 다녔다”며 “콘서트를 통해 같은 골목에 사는 주민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며 하나의 공동체를 구성해 간다는 것이 더 의미 있었다”고 말했다. 콘서트를 통해 모은 총 102만원의 수익은 꽃 화분으로 바뀌어 중앙동 인쇄골목을 지키고 있다.

조금씩 의미 있는 변화들이 생기고 있는 중앙동, 그곳에서 공통적으로 ‘또따또가’라는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또따또가는 부산시가 시행하는 ‘원도심’문화창작공간 지원사업으로, 지자체와 지역주민, 예술가가 ‘따로 또 같이’ 힘을 모아 만들어낸 예술가 창작촌을 의미한다. 부산시는 개별 예술가 41인, 예술단체 22곳 등 총 362명의 예술가에게 중구 중앙동과 동광동 일대 18개소 36실의 창작 공간을 지원했다. 입주한 작가들에게는 창작 여건을 안정적으로 제공하기 위해 3년의 입주를 보장해주었다.

부산시가 이 사업을 해내기 위해 책정한 예산은 불과 10억원. 3년간 10억원의 예산으로 362명의 예술가에게 36곳의 창작 공간을 지원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또따또가 지원운영센터 차재근(51·사진) 회장은 “지역주민의 협조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했다.

부산시가 창작공간으로 제공한 건물들은 중앙동과 동광동 일대의 빈 건물들이었다. 상권이 쇠락하는 탓에 임차인을 찾지 못한 건물들에 부산시가 임대료를 지급하고 예술가들을 입주시킨 것이다. 물론 지급할 수 있는 임대료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건물주들이 보증금을 받지 않고 월세로만 지급하겠다는 조건을 수락했어요. 여기에 월세 1년치를 선지급하겠으니 그만큼 깎아 달라는 부탁도 들어줬죠.”

건물주 입장에서 손해인 제안이었지만 “토박이 건물주들이 가진 원도심 지역에 대한 문화적 자부심”은 이만큼 대단했다.

입주한 예술가들 역시 ‘조건을 넘어선’ 열의를 보였다. 부산시는 입주작가들에게 창작활동만 하지 말고, 창작을 매개로 지역주민과 소통해줄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대신 입주 후 초기 6개월은 창작기반 조성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유예를 뒀다.

하지만 예술가들 스스로가 입주 직후부터 지역 주민과의 소통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6개월이 되기도 전에 ‘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 ‘바람’은 외지 사람들까지 불러모았다. 또따또가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인문학 서점 ‘백년어 서원’의 운영자인 시인 김수우(51)씨는 “철학·연극·영화 등의 주제를 가지고 문화와 인문학 수업을 하는 데 평균 20명 안팎의 경남 지역 사람들이 참석한다”고 했다. 부산은 물론 울산·포항과 같은 주변 도시의 인문학 마니아들이 모인다는 것이다.

차재근 회장은 불과 6개월 만에 프로젝트가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을 묻자, “처음 약속한 3년이 지나야 종합적인 평가가 가능할 것”이라고 몸을 낮추면서도 “부산시가 이 사업에 ‘간섭 없는 지원’이라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서 관(官) 주도가 아닌 지역주민과 예술가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사업이 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또따또가 프로젝트를 담당했던 김형량(52) 부산시 경제산업본부장(당시 문화관광국장)은 “이 프로젝트가 원도심을 더 뚜렷한 문화 정체성이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가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창작자와 관객을 이어주는문예회관은 책임감 가져야”

미상_사진_또따또가_문예회관_2010부산의 또따또가 프로젝트처럼, 최근 문화 예술이 공간을 매개로 지역에 공동체 정신을 되살리는 사례가 늘고 있다. 반면, 이미 문화 예술 활동을 하도록 만들어진 공간조차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는 경우도 여전하다.

대표적인 예가 전국 각 지역에 있는 문화예술회관이다. 문예회관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건립비 일부를 지원하고 그 운영책임은 지방자치단체에 있는 공공시설이다. 그만큼 지역주민들에게 다양한 문화서비스를 제공해야 할 책임이 뒤따른다. 2008년 12월 31일을 기준으로 전국 문예회관은 167개, 문예회관에 포함된 공연장 수는 254개다.

1년 365일 중 문예회관의 공연장 평균 가동일은 155.7일, 그중 공연일은 122.5일에 불과하다. 공연 가동률이 38.5%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이 수치도 감소추세다. 2008년 문예회관 가동률은 38.5%로, 2007년(40.8%), 2006년(43.8%)에 비해 계속 줄고 있다. 국내 전체 공연장 927개의 평균 가동률(54.2%)과 비교해도 상당히 낮은 수치다.

특히 지방 공연장의 가동일이 적어 문화서비스를 즐길 수 있는 권리조차 지역 편중이 심한 것으로 나타났다. 비수도권의 평균 공연일은 111.2일로 수도권 지역의 평균 공연일(151.7일)보다 평균 40일이 적었다. 광주문화예술진흥위원회 모상근 과장은 “보통 군 단위 등 지방에서는 서울에서 좋다고 소문난 공연이 아니면 객석이 잘 차지 않아 공연장 가동률을 높이기 힘든 것이 현실”이라며 “지역에서 활동하는 예술 단체들을 발전시킬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방 문예회관의 경우 시설이 낙후되어 가동률이 떨어지는 경우도 많다.

공연장 가동률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문예회관 167개 중 입주 공연예술단체가 있는 문예회관은 119개뿐이다. 전속단체는 77개, 상주단체는 33개, 입주단체는 45개다. 167개 중 28%에 이르는 48개 문예회관이 입주 혹은 상주단체가 없다. 제대로 된 연습공간과 공연 공간이 부족해 애를 먹고 있는 예술단체 입장에서 보면 속이 탈 일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측은 “올해부터 전문단체와 문예회관을 연계해 상주시키는 사업을 시작했다”고 밝혔지만 갈 길이 멀다. 전라북도와 광주에서 이 사업의 경쟁률은 4대1에서 5대1 사이, 수요에 비해 공급이 많이 부족하다. 더군다나 내년엔 사업 예산도 삭감된다. 전라북도 문화예술과 윤효선 주무관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매칭으로 사업이 이루어지는데, 중앙정부의 예산이 줄면 지자체들이 매칭을 하기 쉽지 않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용인대학교 연극학과 김종석(44) 교수는 “창작자와 관객을 연결시켜주는 극장은 문화예술생태계에서 일종의 유통업자”라며 “관객과 예술단체를 잇는 매개체로서의 책임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고대권 기자

신보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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