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토)

파퐁씨, 울지 말아요… 언니들이 있잖아요

[적십자 봉사원 동행 르포] 필리핀 이주여성 손잡아 준 희망풍차 사업
5년 전 만나 週에 2~3회 말동무 돼주고 도움 건네
희망풍차 사업 선정으로 집안 전체 리모델링하고
파퐁씨는 요양원 취직과 적십자사 회원 활동 나서

인적이 없는 2차선 도로를 달리다 보니, 오른쪽에 축사 2~3곳이 보이기 시작했다. 흙길은 중간중간 구멍이 파였고, 돌멩이가 차량 바닥에 닿을 듯 말 듯했다. 박현숙 대한적십자사(이하 적십자) 철원지구협의회장은 “3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을 다녀오면 승용차 바닥이 심하게 망가졌다”고 했다. 5분 남짓 갔을까. 파란 지붕과 하얀 외벽이 눈에 띄는 양옥집을 발견했다. 지은 지 얼마 안 돼 보였다.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신철원리, 집 입구에 ‘하모니’라는 팻말이 적힌 이집은 넬리디 파퐁(45)씨와 남편, 두 아들의 보금자리다. 파퐁씨는 16년 전 필리핀에서 시집온 결혼 이주 여성이다.

“선생님 오셨어요?” 파퐁씨는 박씨를 보자마자 반갑게 말을 건넸다. 급히 부엌으로 간 파퐁씨는 주전자에 보리차와 몇 시간 전에 찐 단호박을 내왔다. 동행한 채명옥 적십자 철원봉사회장이 “아직 덜 익었는데, 그래도 맛있다”고 했다. 박현숙씨는 “전자레인지를 돌리면 좀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거야”라고 자세히 일러줬다.

1996년부터 적십자 봉사원으로 활동한 박씨는 5년 전 파퐁씨를 처음 만났다. 다문화가정 실태조사를 위해서였다. 16년 전 국제결혼한 파퐁씨의 삶은 처참했다. 원래 이 집은 축사 창고를 임시로 개조해 만든 곳이었다. 창문도 없는 어두컴컴한 18평 내외의 공간에서 매월 대지 임대료 20만원을 내고 살았다. 생활 편의시설이라곤 임시로 설치한 녹슨 기름보일러, 1950년대를 연상시키는 재래식 화장실뿐이었다. 박씨는 “화장실 변기에서 올라오는 악취는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아 집 안을 가득 채웠고, 아이들이 냄새를 참지 못해 화장실에 가는 것을 거부하고 마당에서 용변을 보고 흙으로 덮는 일이 많았다”고 했다. 게다가 남편은 결혼 전부터 증세를 보이던 뇌전증(간질)이 악화돼, 아예 일용직 노동도 하지 못했다. 11년 전부터 시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소를 키워봤지만, 사료 값도 갚지 못한 채 빚 5500만원만 지고 작년 12월에 그만뒀다.

지난 3일, 적십자 봉사원들이 파퐁씨의 가정을 방문해 안부를 물었다. 왼쪽부터 채명옥 철원봉사회장, 이정화 철원봉사회총무, 파퐁씨, 박현숙 철원지구협의회장.
지난 3일, 적십자 봉사원들이 파퐁씨의 가정을 방문해 안부를 물었다. 왼쪽부터 채명옥 철원봉사회장, 이정화 철원봉사회총무, 파퐁씨, 박현숙 철원지구협의회장.

박현숙씨는 일주일마다 2~3회씩 꾸준히 파퐁씨 집을 방문해 안부를 물었다. 사정이 생겨 찾아가지 못할 경우에는 전화나 문자를 보냈다. 박씨는 “처음에는 파퐁씨가 어색함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말동무가 되어주자 점차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선생님을 만나고 나서 인생이 많이 바뀌었어요. (눈물을 훔치며) 집을 고쳐주는 것, 가구를 얻어주는 것…. 처음에는 장롱문이 다 떨어져서 형편없었는데 좋은 것을 얻어주셨어요.”

박씨는 ‘희망풍차’ 프로그램을 통해 파퐁씨와 결연했다. ‘희망풍차’는 봉사원 1~2명이 결연한 수혜자 가정에 주 1회 이상 직접 찾아가, 건강·주거·교육 등 생활환경 전반을 지원하는 서비스다. 봉사원 12만6000명과 집중 돌봄이 필요한 아동·노인·다문화가족·북한이주민 등 4대 취약계층이 일대일로 결연하는 것이다. 박씨는 매달 한 번씩 쌀과 참기름 등 생필품을 지원받아 파퐁씨 집에 전했다. 이뿐 아니다. 기름 살 돈이 없어서 추위를 그냥 견디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개인적으로 연탄보일러를 설치해줬다. 주방 일도 쉽게 하도록 스테인리스 싱크대도 설치했다. 박현숙씨는 적십자 철원지부와 지역 복지단체를 직접 찾아다니면서 총 300만원의 수리 비용을 직접 마련하기도 했다.

박씨는 파퐁씨의 열악한 집을 개선하기 위해 적십자의 ‘희망풍차 긴급 솔루션 지원’에 신청했다. 이 프로그램은 적십자 봉사원이 매주 1~2회 결연 가정을 방문하면서, 주거환경개선·교육비·의료비 등 수혜자가 일시적으로 큰 비용이 필요할 경우 긴급 지원해주는 프로그램이다. 지난 4월 1400만원의 기금을 지원받아 파퐁씨의 낡은 집을 수리할 수 있었다.

한국 생활의 어려움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외로운 파퐁씨에겐 큰 힘이 됐다. “오늘 아침 신철원리 마을에서 남편이 걷는 모습을 봤는데, 혹시 술 마신 건 아니야?” 채씨가 묻자, 파퐁씨가 말을 흐리더니, 잠시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술을 줄이고 있었는데, 얼마 전 마음이 힘들었는지 조금 마셨어요.” 이달 말 남편은 뇌전증 치료를 위한 검사를 받을 예정이다. 비용은 적십자가 지원키로 했다.

파퐁씨가 작은아들(11)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와 함께 지역 아동센터에서 놀고 있어요.” 씩씩한 목소리다. 작은아들은 봉사원들이 올 때마다 친이모가 온 것처럼 좋아한다. 책을 선물로 주기 때문이다. 얼마 전 20여권짜리 전집을 받기도 했다. 이날 가정 방문에 함께한 이정화 철원봉사회 총무는 “아이가 처음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조용히 지냈는데, 요즘은 이야기도 많이 하고 지원받은 책을 갖고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 뿌듯하다”고 말했다.

봉사원들은 친언니처럼 파퐁씨의 필리핀 친정 소식도 물었다. 방 2개가 이어진 복도 끝에 잡동사니가 쌓여있었는데, 알고보니 파퐁씨가 고향 가족에게 전하고 싶어 모으는 치약과 칫솔, 옷가지 등이었다. 얼마 전 남동생이 척추 장애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고 했다. 파퐁씨는 “고향에 가고 싶어도 가족에게 용돈을 드릴 처지가 안 돼서 가지 못한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적십자 봉사원들에게 받은 사랑의 힘으로, 파퐁씨는 얼마 전부터 노인 요양원에서 계약직 직원으로 일한다. 6월부터는 적십자 봉사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한 달에 한 번씩 새벽에 일어나 독거노인을 위한 도시락을 싸는 봉사 활동이다. 파퐁씨는 “적십자 봉사원분들에게 5년 동안 받은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눠주고 싶다”고 말했다. 말이 서툴러 ‘받는 만큼 주는 봉사자가 되고 싶다’는 표현을 거꾸로 ‘주는 만큼 받는 봉사자’로 말했지만, 파퐁씨의 감사함을 느끼기엔 손색이 없었다.

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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