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16일(토)

점자를 지울 수 있다니… 시각장애인들에겐 ‘혁신’

점자를 지울 수 있다니… 시각장애인들에겐 ‘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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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점자 연습장’ 만든 김상언 오버플로우 대표

세계 최초로 점자 수정되는 기기 개발
버튼 누르면 글자 삭제, 시간·종이 절약
지난 8월 캄보디아 맹학교에 기기 기부

지난달 25일 서울 성수동에서 만난 김상언 오버플로우 대표는 “장애인을 위한 많은 제품이 정부지원금 없이 사기엔 부담스러울 정도로 비싸다”면서 “로테크를 적용한 저렴한 장애인 제품을 만드는 게 오버플로우의 목표”라고 했다. / 장은주 C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지울 수 없는 글자가 있다. 바로 ‘점자’다. 점자는 종이에 요철을 만들어 손끝으로 읽는 글자라 한번 만들면 지울 수가 없다. 점자를 쓰다가 틀리면 새 종이에 처음부터 다시 쓰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시각장애인에게 ‘글자 수정’은 다른 세상 얘기다. 수정이 안 되니 불편함도 컸다. 들어가는 종이 값도 만만치 않았고, 한번 틀리면 처음부터 새로 써야 하니 시간도 배로 들었다.

우리나라 소셜 벤처가 시각장애인의 ‘지울 수 없는’ 고통을 해결하고 있다. 지난 2017년 설립된 소셜 벤처 ‘오버플로우’가 지난 5월 휴대용 점자 입력기 ‘버사슬레이트’를 내놨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세계 최초의 ‘점자 연습장’이다. 사용법은 간단하다. ‘점필’이라고 부르는 뾰족한 필기도구로 앞면에 점자를 입력하면, 뒷면에서 ‘점핀’들이 튀어나온다. 점자를 지우고 싶을 때는 버튼을 누르면 판이 다시 평평해진다. 지난 25일 서울 성수동에서 김상언(42) 오버플로우 대표를 만났다.

지울 수 있는 점자

버사슬레이트는 가로 20㎝로 성인 남성의 손바닥 정도 크기다. 모양은 게임기와 비슷하다. 평균 40자 정도 한글이 한 면에 들어간다. 지난 5월 출시 이후 6개월 만에 초기 물량 1000개가 모두 팔렸다. 국내에서만 7500만원, 미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8국에 수출해 2000만원가량의 매출을 올렸다. “시각장애인 보조 공학 기기 업계에서는 출시 전부터 주목받았어요. 2018년 미국에서 열린 보조공학박람회(CSUN conference)에 참가했는데, 외국 바이어들이 시제품만 보고 ‘출시하면 꼭 연락 달라’더군요. 출시 이후에는 해외 구매자들이 스스로 사용법 영상을 만들어 SNS에 올리고 추천하는 등 반응이 좋았어요.”

김상언 대표는 “버사슬레이트의 진가는 맹학교 수업 시간에 드러난다”고 했다. 점자를 처음 배울 때 특히 유용하게 쓰인다. “한글을 처음 배울 때 읽으면서 따라 쓰듯이, 점자도 읽고 쓰면서 배워요. 원래는 점자판이라는 틀에 종이를 끼워서 쓰고 다시 빼서 읽어보는 과정을 반복해야 하는데, 시간도 오래 걸리고 종이 낭비도 심했어요. 한번 찍힌 점자는 지울 수가 없으니 종이를 그냥 버려야 했죠.”

버튼만 누르면 지워지는 버사슬레이트는 시각장애인들에겐 하나의 ‘혁신’이었다. 특히 저개발 국가에서는 꼭 필요한 제품이다. 김 대표는 “저개발국에서는 아이들이 점자용 특수 종이를 구하지 못해서 점자를 배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안타까워했다. 오버플로우는 지난 8월 캄보디아 맹학교에 버사슬레이트 100대를 기부하기도 했다.

영업 사원에서 발명가로

사실 그는 발명이나 개발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지난 10년간 시각장애인 보조 공학 기기 회사의 영업 사원으로 일했다. 기기를 팔려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맹학교나 점자 도서관 등 시각장애 관련 전문가와 소비자를 만나게 됐다. 그러던 중 한 맹학교 교사의 이야기를 듣고 버사슬레이트의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됐다.

“시각장애 학생들은 수학 공부를 할 때 점자로 수식을 쓰면서 문제를 푸는데 이 과정이 상당히 번거로워요. 점자를 읽으려면 점자판에서 종이를 뺀 다음 뒤집어 읽어야 하잖아요. 한 문제 푸는데도 계속 뺐다 끼웠다를 반복하다 보니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냥 수학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대요. 종이를 뺐다 끼우는 과정만 없어도 너무 좋을 텐데, 하시더라고요. 곰곰이 생각해봤죠. 점자를 보니 위에서 찍고 뒤집어 읽는 구조니까, 종이 대신 플라스틱판으로 구현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혼자 점자 종이 들여다보며 연구를 시작한 거죠.”

개발 과정은 험난했다. 맹학교 교사, 시각장애인 교수, 사회복지관 팀장 등 영업 일을 할 때의 인맥을 총동원해 자문했고 시각장애인 사용자들을 대상으로 테스트도 진행했다. 그 과정에서 시제품을 수십 번 다시 만들어야 했다. 개발까지 걸린 시간만 2년 반. 2억5000만원가량의 개발 비용이 들었다. “창업 자본금을 다 쏟아붓고, 공모전 나가서 탄 상금으로 메워가면서 겨우 개발했어요. 과정은 힘들었지만 시각장애인들이 일상에서 느끼던 불편함을 해결했다는 것만으로도 큰 보람을 느낍니다.”

현재 오버플로우는 저시력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보조 공학 애플리케이션 ‘플로위’를 만들고 있다. 행사장에서 스크린에 띄우는 발표 내용을 ‘화면 공유’ 방식으로 스마트폰으로 확대해서 볼 수 있는 서비스다.

“우리 회사에 저시력 시각장애를 가진 개발자가 있어요. 대학을 나오고 직장을 다니는 동안 누구도 해결해주지 못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직접 개발하고 있어요. 오버플로우라는 회사 이름처럼, 우리가 하는 사업의 선한 영향력이 세상 곳곳에 ‘넘쳐 흐르는’ 날이 오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김지강 더나은미래 인턴기자 river@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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